경상도 79

거창 수승대(요수정, 거북바위)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지정 : 국가지정 명승 제53호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번지 일원. 수승대(搜勝臺)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으로 이름난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하나인 원학동(猿鶴洞)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화강암 암반과 함께 아름다운 숲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전국의 시인묵객들이 무릉도원으로 여기며 즐겨 찾았던 곳이다. 이곳은 신라, 백제간 국경지대였던 당시, 사신이 떠날 적에 안위(安危)를 걱정하며 근심(愁)으로 보냈기(送) 때문에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전한다. 한편으로는 이 일대의 빼어난 경관이 사람들의 근심을 잊게 하기 때문에 수송대(愁送臺)라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1543년(중종 38), 퇴계 이황 선생이 이웃 영승마을에 내방하였다가 수송대를 방..

경상도 2017.07.20

거창 개봉고분, 거창향교, 상림리 석조보살 입상

지정 : 경상남도 기념물 제51호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 181. 개봉고분은 거창에서 김천으로 가는 국도변의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모두 5기의 무덤이 있는데, 1, 2호 무덤은 복원 및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외형상 거대한 무덤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나머지 3기의 무덤은 외형상 많이 허물어져 있으나 본래는 상당히 규모가 큰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지름이 무려 30m, 높이가 10m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고분의 주변에 각종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이곳에는 이들 무덤 외에도 상당수의 옛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습된 토기조각과 대형 무덤..

경상도 2017.07.19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아침식사

지정 : 사적 제239호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산 298-1. 거창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꼭 하나의 무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좁은 산등성이 양쪽으로 급한 경사를 이룬 깊은 계곡으로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라 한다. 근처에는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된 고려, 조선시대의 민묘(民墓)가 흩어져 있다. 벽화고분은 이중의 벽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石室)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서쪽 돌방에는 1개의 나무관(木棺)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 양쪽 돌방의 모든 벽은 회칠하고 그 위에 흑, 녹, 갈색으로 인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

경상도 2017.07.19

함양 승안사지, 정여창 묘, 안의면 광풍루, 거창의 숙소

지정 : 보물 제294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263.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나,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을 계승하고 있다. 상층기단에 불(佛), 보살(菩薩), 비천(飛天)을 조각하였으나 조각수법은 다소 떨어지며 격식에도 벗어나 있다. 1층 탑의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특수한 수법을 구사하고, 장엄한 구성미 조형에 힘쓴 점에서 고려초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1962년에 현재의 장소로 탑을 옮길 때, 홍치(弘治) 7년(1494)의 중수에 관한 내용이 한지에 먹으로 쓴 문서(韓紙墨書重修記)에서 발견되어 조선시대에 탑이 옮겨졌음이 확인되었다. 1층 몸돌 위에 만들어진 사리구멍에서는 원통형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머니, 유리구슬 등이 ..

경상도 2017.07.14

함양 개평마을, 솔송주문화관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左안동 右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 5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그리고 초계 정씨 3개의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문화재자료 제76호), 일두선생의 명상 장소였던 개평리 소나무군락지(도기념물 제254호) 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있어 민속자료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개평마을은..

경상도 2017.07.10

함양 일두고택(정여창 고택)

내가 일두 (정여창)고택을 항상 눈여겨 본 이유는 젊은 날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제작된 최수지가 주연인 의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처음 대하소설 를 접한 직후에 나는 "뿅" 가서 근 열흘을 잠도 안 자고 미친 듯이 토지를 완독했다.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고, 그것을 소설에 표현할 수 있구나, 세익스피어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박경리 선생도 표현하는구나' 등등... 젊은 날의 내게 박경리 선생의 소설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전율을 잊을 수 없고, 그것을 경험했던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의 일생≫ '左안동, 右함양'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 안동(安東)과 서쪽 함양(咸陽)..

경상도 2017.07.08

함양 청계서원(靑溪書院)

지정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6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이 서원은 1907년에 청계정사(靑溪精舍)가 있던 터에 세워진 것으로,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김일손 선생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희생되었다. 그가 이곳 청계정사에서 한 동안 공부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그 뒤쪽 높은 지대 위에 묘우(廟宇)인 청계사(靑溪祠)가 있고,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東齋)인 역가재(亦可齋)와 서재(西齋)인 구경재(久敬齋)가 있다(현지 ..

경상도 2017.07.07

함양 남계서원(濫溪書院)

지정 : 사적 제499호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 강익(介菴 姜翼)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 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을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

경상도 2017.07.07

함양 지안재, 오도재, 지리산제1문

지리산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 인오조사(靑梅 印悟祖師, 1548~1623. 서산대사의 제자)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도재(773m)는 삼봉산(1,187m)과 법화산(911m)이 만나는 지리산의 마지막 쉼터로 가야 마지막 왕이 은거 피신을 할 때 중요한 망루지역이었고 임진왜란 당시는 서산, 사명, 청매 등 승군이 머물렀던 곳으로 영남학파 종조인 김종직 선생을 비롯하여 정여창, 유호인, 김일손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걸음을 멈추며 지리산을 노래했던 곳이다.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 하동지역의 소금과 해산물이 이 고개를 지나 전라북도, 경상북도, 충청도 지방으로 운송된 육상 교역로였다. --현지 안내문-- 문 오른쪽의 안내석에는 '오도령(悟道..

경상도 2017.07.06

함양 화림계곡 농월정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산 92.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함양 안의면 성북마을 출신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榑, 1571~1639) 선생이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방대한 너럭바위와 주변경관이 수려한 이곳에 서당을 짓고 심신을 수련했다.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도호부사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37년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쉬던 곳으로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 앞 오른쪽 암반에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자를 후손들에게 힘있게 새겨 놓았다. 달 밝은 고요한 ..

경상도 2017.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