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39

북경9 - 옹화궁은 왜 자금성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가?

청나라 강희제는 재위 33년(1694년)에 저택을 지어 넷째 아들 옹친왕(윤정)에게 하사하고 옹친왕부라 불렀다. 윤정이 강희제의 뒤를 이어 옹정제가 되자 황제의 잠저라 하여 옹화궁으로 바꿔 부르다가 1725년에 라마교 거루파에게 하사했다. 1735년 옹정제 사망 후 뒤를 이은 건륭제는 부왕의 능침정을 용화궁 영우전에 안치했다. 그래서 영우전은 옹화궁 건물 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도 옹화궁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옹정제와 건륭제 등 2명의 황제를 배출한 잠저라 해서 건물의 지붕은 황색, 담장은 붉은색이며 규모를 떠나 자금성과 동일한 대접을 받고 있다. 건륭제 9년(1744년)에 옹화궁은 라마 묘가 되고 몽골에서 온 라마교도들이 집단으로 상주하면서부터 중국 최대의 라마 불교사원이 ..

북경8 - 근대 서구 열강의 만행을 증명하는 원명원

원명원의 폐허를 둘러보면서 우리나라의 덕수궁과 근본적으로는 느낌이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점은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석조전)은 제대로 남아있지만 원명원은 철저히 파괴되고 잔해만 남았다는 것이다. 원명원(圓明園)은 명나라의 정원이었던 것을 1700년대 초에 청의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로부터 하사 받았고 황제가 된 옹정제와 다음 황제 건륭제가 증축을 거듭해서 청 말기에는 황제가 실제로 거주했던 황실의 정원이다. 임진왜란 후 궁궐이 불타 머물 곳이 없던 선조가 월산대군 집에서 임시로 거주한 후 궁으로 승격한 현재의 덕수궁과 시작은 좀 다르지만 근대식 서양식 건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점, 마지막에 황제가 거주한 이궁이란 점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우리가 아는 원명원은 바로 이웃해 있는 장춘원, 기춘원(후에..

북경7 - 서태후가 끝까지 집착했던 황실 별장 이화원

사람들은 자금성이 헛갈린다는데 나는 이화원에서 내내 방황해야 했다. 사전 지식없이 들어간 데다 예측할 수 없는 건물의 배치와 어마어마한 정원의 크기 때문이었다. 사진에 팔려서 몇번이나 일행을 놓쳤는데 그 때마다 그런 엄마가 걱정이 되어 제 볼 걸 포기하고 갈림길에서 조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착한 딸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곤 했다. 곤명호를 낀 평지에서는 그래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만수산 자락을 따라 지어진 고풍스럽지만 미로 같은 건물들 사이에서 일행을 잃으니 정말 곤혹스러웠다. 내 행동 패턴을 잘 아는 광나루님은 답사 때마다 "몇시까지 어디로 꼭 오셔야 합니다"라는 사전 예고를 하는데 이화원에서는 그게 없었다. 우리는 북문으로 입장했다. 북문으로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것이 소주거리(街)이다. 강남의 소주..

북경6 - 정릉 출토 유물들

정릉은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지하궁전의 큰 규모에 비해 유물의 양이 너무 적다. 중국여행을 전문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의 글을 보니 대부분의 출토 유물이 국민당 정부에 의해 대만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정릉의 발굴은 1949년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발굴된 유물이 적을까? 정릉에는 전시실 2개(라는 것은 사진 정리하면서 알았다)가 있고 인근의 장릉에도 일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양은 적지만 최고 권력자의 사후를 위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섬세하고 값진 유물을 보니 민초들의 삶과 무관한 엄청난 황제의 권력이 느껴졌다. 가장 그 느낌이 큰 것은 황후의 보관(봉황, 용관)과 다산을 바라며 100여명의 아..

북경5 - 동양의 피라미드 정릉

정릉은 명나라 13대 황제인 신종 만력제와 두 황후의 무덤이면서 유일하게 발굴, 공개하는 황릉이다. 신분이 높은, 죽은 이를 기리는 신도비에 특이하게 단 1줄도 내용이 없는 걸로 유명하기도 하다. 황제 재위 기간이 48년이나 되는데 우째 그런 일이... 그래도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낸 고마운 장본인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중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우방에 원병을 보내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인력과 물자를 쏟아부은 '등신 같은 황제'였는지도 모른다. 내용은 좀 다르지만 미국과 베트남전쟁의 결과가 생각났다. 명나라의 멸망은 조선 원병 파병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종이 재위 기간 중 18년인가 걸려 지었다는 그의 무덤은 동양판 피라미드였다. 생전의 궁궐 못지 않은 엄청난 규모와 탄탄함, 망자를 ..

북경4 - 팔달령에서 본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세계적인 명소(!)이다. 설레는 마음을 얼게 할 정도로 만리장성은 입구부터 살벌하게 추웠다. 가장 길 때는 15,800里였다는데 중국의 1리는 우리나라보다 짧다니 계산은 생략... 눈이 탁 트이는 끝이 안 보이는 절경(?)인데 감상하기에 너무 추웠다! 윈드 스토퍼 2장을 겹쳐 입고 목도리로 중무장을 했어도 추웠다. 동행한 딸과 동생은 반도 구경 못하고 중도 포기했다. 나는 늦을까봐 눈치를 봐가며 양쪽 보루를 다 돌았다. 우리가 간 곳은 북경에서 40여분 지점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 조망하는 팔달령 코스이고 역시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용관은 걸어서 오르는 코스이다. 우리가 본 만리장성은 수많은 깃털 중의 한가닥 정도로 아주 작은 구간에 지나지 않지만..

북경3 - 자금성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경산공원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 바로 건너편(정확히 자금성 북쪽)에 경산공원이 있다. 경산공원은 자금성 해자와 인공호수를 만들면서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이다. 북경이란 도시는 번듯한 강이나 산이 하나도 없는 평지이다. 북한산이나 남산 같은 제법 높은 산과 한강을 낀 서울을 수도로 둔 우리로서는 이상하지만 상당수의 오늘날의 수도들이 허허벌판에 세워졌다. 50m도 안되지만 평지에 있는 유일한 산이다 보니 그 위에 올라서면 자금성을 비롯한 북경의 대부분을 잘 조망할 수 있다. 거대한 자금성을 제대로 조망하려면 반드시 바로 뒤에 있는 景山에 올라야 한다. 북경은 황사에 대기오염까지 높아 깨끗한 경치를 보기 힘들다는데 우리가 오른 날은 해질 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계가 상당히 좋았다. 정상의 정자는 만춘정이다. 우리나라에..

북경2 - 머리에 쥐 나는 자금성 구조

자금성은 성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분간할 엄두가 안나고 어디가 어딘지 마구 헛갈렸다. 자금성에는 800여개의 건물과 9,000여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경복궁 구조와 애써 비교한 결과 약간은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우리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떠 지었다고 착각하면 유홍준 교수님이 거품을 물 것이다. ㅎㅎ... 자금성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재위 4년째인 1406년에 난징에서 뻬이징(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짓기 시작했으니 1392년에 건국한 조선이 정도전의 주도로 경복궁을 짓기 시작한 시기보다 확실하게 뒤진다. 경복궁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됐다면 자금성도 청대를 거치면서 증축을 거듭했으니 결론적으로 우리 경복궁이 자금성을 모방했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자금성 한가운데 남북으로 일자..

북경1 - 먹자골목 왕부정거리, 민주화의 산실 천안문광장

그간 북경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았다. 그런 북경여행은 내게 어떤 의미였는가? 인지도 때문에 그냥 다녀와야겠다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자금성과 거대한 왕릉 외에는 잡히는 게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북경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빡빡한, 백두산 지역을 여행할 때 느낀 삼엄함이 전혀 없었다. 그 점이 이번 여행에서 느낀 가장 큰, 편견을 깨는 충격이었다. 백두산 지역은 국경지역이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두번째는 북경 주변에 의외로 볼 게 많다는 점이다. 아무리 황제라도 죽은 이의 무덤을 구경 삼아 간다는 건 즐거운 일은 아니다(그 동안 능원묘답사를 3년 여를 한 내게는 예외지만...). 그래도 북경의 거대한 황제릉은 볼 게 많다. 죽은 '최고 권력자의 집'을 들여다보면 당시 역사의 상당한 면을 들여다볼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