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22.04. 경복궁3(자경전, 향원정, 건청궁, 소주방)

큰누리 2022. 8. 4. 11:14

경복궁3은 2022년 4월 10일에 촬영한 경복궁1, 2와 달리 2015년 7월 18일에 촬영한 것이다. 1, 2편은 코로나 19에 걸렸다 나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인데 격리 기간 동안 답답함을 털고자 무작정 나섰고 그곳이 경복궁이었다. 그에 비해 3편은 경복궁 해설사를 모시고 카페에서 단체로 들른 것이어서 1, 2와 사진 색깔도 다르고 싯점도 약간 다르다.

 

당시에 고궁이나 능원묘 답사를 미친듯이 따라다니던 시기였고, 지금처럼 휴대폰 촬영이 아니라 꽤 고가의 디카로 촬영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보다 고궁에 대한 지식이 얕았고(!), 고가의 디카로 촬영한 당시 사진들은 지금 보니 우중충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조만간 경복궁에 다시 들르기 힘들 것 같아 당시에 촬영한 것을 기반으로 나머지 경복궁에 대한 것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경복궁 자경전(慈慶殿)과 십장생 굴뚝≫

자경전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중건할 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것이다. 조대비는 고종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것이다. 굴뚝 한가운데에는 십장생 문양을 구워 박아 넣었고, 위 아래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벽사의 의미를 담았다.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다른 궁에 비해 왠지 쓸쓸해 보였고, 나이든 대비라면 오르내리기에 계단이 가파르다 싶었다.

 

 

 

 

<자경전에서 본 소주방>

경복궁의 주방인 소주방은 정확하게 자경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자경전 서쪽 담(사진 왼쪽)과 뒷마당>

자경전 뒷쪽에 있는 십장생 굴뚝을 보러 가는 중이다. 서쪽 담 바깥쪽의 문양도 십장생 못지 않게 아름다운데 당시 사진에서는 놓쳤다! 십장생 굴뚝은 두번째 사진의 왼쪽(보호각 아래)이다.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문화재청에도 그냥 '보물'이라고만 되어있다.).

그림못지 않게 아름다운 굴뚝인데 사진이 정말 안 받쳐준다. 중앙의 십장생도 아름답고, 위 아래의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도 눈여겨 볼만하다.

 

 

 

<경복궁 향원정>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 영역에 조성된 정자이다. 연못인 향원지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다. 첫번째 사진은 동(남)쪽에서 서(북)쪽, 두번째 사진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본 모습이다.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하게 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하였다.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나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줄곧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어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고, 문화재청이 건청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건청궁(乾淸宮) 배치도와 건청궁 외관>

 

 

 

<건청궁 곤녕합(坤寧閤)>

양반가옥 안채에 해당하는 곳이며 건청궁 동쪽에 위치한다.

명성황후의 처소로 이용되었고, 건물 동쪽에 옥호루(玉壺樓)가 있다.

 

 

 

<한옥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건청궁 곤녕합>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 점, 단청을 하지 않고 나무를 그대로 살린 점 등 한옥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건청궁 곤녕합 뒤쪽의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은 왕세자와 세자비의 거처이다. 세종 9년(1427) 근정전 동쪽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고종 25년(1888)에 중건되었다. 1914년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기고 1916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자신의 자택에 '朝鮮館'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 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93년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 국내로 들여왔다. 구조 안전상의 문제로 자선당 복원의 기초에 재사용하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에 남게 되었다.

 

 

<건청궁 부속건물인 녹금당(綠琴堂)과 복수당(福綏堂)>

 

 

 

<건청궁 관문각터>

고종 10년(1873)에 건립된 관문각 터이다. 건청궁 장안당 뒤쪽에 위치하고 고종 12년(1875)부터 역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고종 28년(1891)에 러시아 건축가 세레친 사바틴(A. S. Sabatine)과 친군영이 2층(일부 3층)의 서양식 건물로 개축했다.

 

사바틴이 관문각에 기거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에 미국인 다이장군과 함께 일본공사 미우라, 한성주둔 일본군수비대와 공사관원,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목격하고 명성황후 시해장소와 시해에 대한 증언서를 작성하여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관문각이 헐린 시기는 광무 5년(1901) 이후로 보인다.

 

 

 

<건청궁 장안당>

건청궁은 양반가옥을 응용했기 때문에 사랑채에 해당하는 곳이며 고종의 처소로 이용되었다. 두 번째 사진 오른쪽의 3칸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곤녕합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복도였다.

 

 

 

<건청궁 장안당과 곤녕합 사이의 문>

장안당에서 본 곤녕합 방향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전을 연결하는 문이지만 건물에 붙어있는 연결복도도 따로 있다. 

 

 

<경복궁 소주방(燒廚房) 일원>

경복궁 소주방은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와 궁중의 잔치음식을 준비하던 궁중 부엌으로 내소주방, 외소주방, 생물방 등 3구역으로 나뉜다. 내소주방(內燒廚房)은 임금의 수라를 만들던 곳, 외소주방은 궁중의 잔치, 고사 음식을 차리던 곳, 생물방은 임금의 간식인 다식, 죽, 과일, 떡 등을 차리던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 경복궁 중건 때 건립되었으나 1915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할 때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현재의 소주방은 2011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5년 복원 완료하였다.

 

 

<경복궁 소주방(內燒廚房) 생물방(生物房)과 부엌>

생물방은 복회당, 생것방이라고도 부르며 「승정원일기」에는 생과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금의 후식과 별식, 왕가의 친척이나 손님이 왔을 때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죽 등을 만들어 올렸다.

 

 

 

<소주방(內燒廚房) 생물방(生物房)의 주건물인 복회당(福會堂)과 내부>

 

 

 

<생물방의 고종 11년(1874년) 건기 재현 사찬상>

고종 11년(甲戊, 1874년) 2월 28일 원자(순종)의 삼칠일(탄생 21일)에 왕실에 올린 진어상이다. 상에 올린 음식은 녹두차시루편, 백두메시루편, 대추주악, 돈전병, 색산승을 한그릇에 담고, 전복초, 느름적/ 생선전유아, 양전유아, 편육/청포/생이, 준시, 생율, 오미자병/각색 정과/산사, 수정과/초계탕/면/초장/개자/청 등 13기 23종이다.

 

 

<경복궁 소주방 우물과 4대궁 우물의 특징>

2010년 서울의 4대궁과 종묘 내 우물은 총 32개가 남아 있으며, 우물 평균 깊이는 3.41m, 평균 수심은 2m였다. 바닥은 마사토-암반-석재-자갈 순이었으며, 암반을 둘글게 파거나 바닥에 숯을 넣는 구조였다.

 

 

<경복궁 外소주방>

외소주방은 연회음식 등 각종 잔칫상을 준비하던 곳으로 밖소주방이라고도 한다. 정월,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음식과 왕과 왕비의 탄생일, 궁밖 종친들의 생일과 왕족의 관례나 가례 같은 잔치음식을 준비했다. 

 

 

<외소주방의 '고종 어극 30주년 근정전 외진찬'>

1892년(고종 29) 고종(1863~1907)의 보령 41이고 왕위에 오른지 30주변이 된 것을 경축하기 위해 왕세자의 주청으로 9월 24~26일 3일간 근정전과 강녕전에서 거행한 진찬을 재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