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22.05.연세창립 132주년·합동 60주년/세브란스 역사 기록화전

큰누리 2022. 8. 11. 16:39

'연세창립 132주년·합동 60주년 세브란스 역사 기록화 전시'입간판(!)에는 '광혜원·제중원 137주년 연세의료원 출범 60주년 기념 사진전'이라고 되어 있었다. 긴 제목들인데 제목이야 어떻든 상관 없지만 문제는 연세창립 132주년, 광혜원·제중원 137주년이라고 다르게 되어 있어 헷갈린다. 다른 세브란스나 신촌 연세대에 관한 글 모두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대기 시간이 길어서 그 시간에 본 전시들이다. 그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도 학교 연혁은 제대로 알기 쉽지 않고, 관심도 크지 않은 편인데 이러다가 연대 출신보다 내가 더 잘 알지도 모른다, ㅎ...

 

 

<연세창립 132주년·합동 60주년 세브란스 역사 기록화 전시관 앞의 인물 사진들>

1. 사진의 가장 큰 인물은 호러스 N. 알렌 박사의 민영익 刺傷 치료(1884.12.4)

- 갑신정변에서 개혁파의 칼에 찔린 민영익을 알렌박사가 수술로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이다. 이 사건으로 알렌은 고종에게 큰 신임을 얻고 선교 밖에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제중원을 설립하고 그 외 분야로도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2. 맨 위의 학사모를 쓴 7인 : 졸업 후 모교에 남겠다는 7박사(1908)

3. 알렌 양손 사이의 인물과 붉은 커튼을 배경으로한 중앙의 가장 작은 사진 : 호러스 G. 언더우드의 토론토 강연과 올리버 R. 에비슨(1892.9)

4. 아래의 서 있는 세 남성들 : 카네기홀의 에비슨과 루이스 H. 세브란스(1900.4.30)

5. 화분에 가려진 수술복 입은 남성 : 세브란스의 구한국 군인 치료(1907. 8)

 

 

<세브란스병원 종합관(?)에 대한 안내와 전시에 대한 안내>

정확한 건물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다음 지도에는 '종합관'으로 뜸). 세브란스 본관 3층에서 바로 이어지는 건물이고, 이 건물 지하 1, 2층에 장례식장이 있다.  

 

 

<연세대학교 출범을 알리는 소식지>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전시≫

--윗사진에 있는 내용이다--

연세대학교는 창립 132주년과 합동 60주년을 맞아 5월 둘째 주에서 제중원이 문을 연 4월 둘째 주로 변경하여 개최한다. 의료원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우리나라 의학 발전과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한 세브란스의 역사와 정체성의 보존 발전하기 위한 역사기록화 전시회를 마련했다.

 

역사기록화는 펜화와 유화 두 가지의 형태로 제작됐다. 역사적 건물을 기록한 펜화는 김영택 화백이 맡았다.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유화는 김건배 화백이 맡아 주요 사건과 정황을 구현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알렌 박사의 민영익 치료, 에비슨 박사의 내한, 카네기홀에서 처음 만난 에브슨 박사와 세브란스, 통감부에 의한 구한국 군대의 해산 중 부상당한 한국 군인을 치료하는 세브란스 의료진과 학생들, 3.1 독립선언문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 등 13점이다.

(PS : 건물을 그린 펜화는 옆 장소에서 전시 중이었고, 이 글에서는 사건을 그린 유화만 다루었다.)

 

특히 에비슨 박사의 초청으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의 토론토 강연은 훗날 세브란스와 연희의 두 주역이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선교사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던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강연을 계기로 결심을 굳히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서 좋은 동역자로 서로의 사업을 도우며 활동했다.

 

1915년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된 언더우드가 이듬해인 1916년 세상을 떠나자 에비슨은 세브란스와 연희 양교의 교장을 18년간 역임하며 두 학교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에비슨은 양교를 합동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구상은 에비슨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7년에 양교가 합동도디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면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작가 김건배≫

--이하 모두 현지 안내문--

국내 정상급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로 화단에 등단한 김건배 화백은 1994년 미국 이주 후 인물의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맑고 투명한 색채로 표현하는 수채화 기법을 새로이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미국 내 아트 페스티벌에서 20여 차례 대상의 수상과 많은 전시에 초청된 김건배 화백은 철저한 고증 속에 우리나라 근대의학을 개척한 세브란스 130여년 역사를 13점의 작품을 통해 그려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1. 1884.12.4 (호러스 N. 알렌 박사의 민영익 자상 치료)>

우정국 개원식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은 심한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민영익은 치료를 위해 외교고문이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겼다. 그를 치료하런 온 여러 명의 어의(御醫, 한의사)들은 칼에 찔리고 베인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미국 공사관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급히 불러 치료하게 했다.

민영익은 알렌의 지혈과 봉합 치료 등 서양 외과술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이듬해인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개원한다. 제중원에서 시작된 한국의 근대의학은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2. 1892.9.29 (호러스 G. 언더우드의 토론토 강연과 올리버 R. 에비슨)>

토론토 대학교 의학부와 온타리오 약학교 교수이자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일본으로 파송된 선교사의 소식을 통해 선교사로서 막연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에비슨은 마침 1892년 9월 토론토를 방문한 언더우드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조선의 실상과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언더우드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에비슨은 의료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했다.

에비슨은 자신이 소속된 캐나다 감리교회에 파송을 요청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지원하였고, 마침 언더우드도 그를 조선에 파송할 적임자로 추천했다. 이에 따라 에비슨은 의료선교사로서 조선땅을 밟을 수 있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3. 1893.6.16 (에비슨의 한국 도착)>

에비슨이 한국으로 출발할 즈음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고, 셋째 아들은 심한 폐렴과 중이염으로 매우 위중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에비슨은 '아이가 죽는다 해도 병 치료를 위해 출발을 늦출 수 없다. 아이가 벤쿠버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있으면 조선으로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조선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출발을 강행한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4. 1895 (이승만을 단발하는 에비슨 박사)>

1895년 내려진 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배재학당 학생으로 여의사 조지아나 E. 화이팅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이승만은 에비슨과 조선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발령이 내려지고 얼마 후 이승만은 에비슨의 집에 찾아와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의 요청을 받은 에비슨은 이승만의 상투를 자르고 남은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이승만은 잘린 상투를 거즈에 싸서 들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5. 1900.4.30 (카네기홀의 에비슨과 루이스 H. 세브란스)>

1899년 3월 안식년으로 귀국한 에비슨은 이듬해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만국선교대회에서 조선의 선교에 대해 발표하였다. 에비슨은 '조선의 낙후된 의료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큰 병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루이스 H. 세브란스는 병원 건축기금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세브란스의 기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되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6. 1900.8 (에비슨과 박성춘·박서양 父子의 만남)>

에비슨이 치료한 환자 중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있었다. 박성춘의 부탁으로 에비슨은 아들 박서양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1908년 세브란스 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가 되었고 그는 모교에서 교육과 진료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문제를 삼은 학생들에게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자'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학교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이주해 구세병원을 개업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조선 동포를 진료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軍醫로 활동한 세브란스가 배출한 큰 의사였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7. 1905~1910 (한글 의학 교과서 편찬)>

1894년 9월 제중원을 넘겨 받은 에비슨은 1895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방역국장으로 활동하다 콜레라 유행이 끝난 후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을 다시 시작했다. 의학교육을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한글로 된 의학교재였다. 이를 위해 에비슨은 먼저 그레이의 해부학 교과서를 조금씩 번역해 교재로 활용했다.

1904년 제시 W. 허스트가 합류하자 에비슨은 교육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 1905년 약물학 교과서를 펴낸 이후 해부학, 생리학을 비롯하여 산과, 외과 등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의 의학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한글 교과서 사용을 금지하여 에비슨의 노력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8. 1907 (루이스 H. 세브란스의 구한국군 치료)>

1907년 8월 통감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에 나서자 그 과정에서 구한국 군인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부상당한 한국 군인 50여명은 일본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세브란스로 가기를 요청하였다. 에비슨은 적십자대를 조직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에 전념했다.

갑자기 몰려든 부상병들을 돌볼 인력이 부족해서 의학생, 병원 가족들까지 참여했으나 남녀유별의 관습에 따라 간호학생이 남자환자를 돌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갑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한국군 부상병들이 몰려들자 남녀유별의 인습이 허물어져 간호학생들은 밤새워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9. 1907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한 루이스 H. 세브란스)>

1904년 9월 23일 루이스 H. 세브란스의 기부로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문을 열었다. 세브란스는 개원 후 3년이 지난 1907년 9월 주치의사인 러들로 박사와 함께 새 병원을 찾았다. 이 방문은 아시아 지역의 장로회 선교부를 알아보는 여행의 일환이었다.

서울을 방문해 자신의 기부로 건축된 병원을 직접 본 세브란스는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병원에 의학생의 교육을 위한 공간이 없는 것을 보고 3만 달러를 추가 기부하였고, 1913년 학교 교사 겸 외래진료소가 세워졌다. 1913년 세브란스가 타계한 이후에는 아들 존과 딸 엘리자베스가 대를 이어 세브란스를 후원하였고, 그 지원은 지금까지 이어자고 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10. 1908>

(촬영과정에서 그림은 누락된 듯한데 다행히(!) 내용은 촬영이 되었다.

이 글 가장 윗 사진에 있는 학사모 쓴 7명이 관련 사진일 것으로 추측...)

엄격한 교육과 지도를 받고 첫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에비슨은 졸업 후의 계획을 묻자 모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겠다고 대답했다. 에비슨은 '나는 일곱 사람의 의사를 양성한 줄로 생각했더니 의사뿐 아니라 참다운 인격자를 양성하였다!'고 감탄했다. 첫 졸업생들은 의술개업인장 제1번~7번까지 받은 한국 최초의 면허의사가 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의사에 그치지 않고, 모교에 남아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서양의학이 한국인에 의해 토착화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11. 1919 (독립선언문을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

1919년 3월 1일 일제지배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세브란스의 교수, 학생, 직원들도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세브란스 병원의 약국에서 근무하던 이갑성은 최연소자로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세브란스 학생들은 세브란스 외래 진료병원 4층에 있는 암실에서 독립선언문을 찍었다. 일본 경찰이 병원을 수색하자 학생들은 독립선언문 및 관련 증거들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겼다. 이때 찍어낸 독립선언문은 지방에도 전해져 만세운동 등에 사용되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12. 1945 (해방 후 귀환동포를 구호하는 세브란스 학도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국내외에서 징용이나 징병되었던 수많은 동포들이 귀환하였다. 학교가 서울역 앞이라 귀환하는 동포들을 많이 본 세브란스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동포들이 굶주리고 헐벗은 상태에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서울역에 세브란스 역전 구호소를 설치하고 귀환동포를 위한 음식제공, 진료, 서울역 주변의 청소와 질서 확립 등의 활동을 벌였다.

급한 질병을 치료하고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귀환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서울역 당국과 협의하여 무료승차권도 발급해주었다. 또 건국준비위원회와 서울시청을 방문하여 이재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머무를 동안 제공할 식량과 옷가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13. 1960 (4.19 민주의거에 나선 연세의대생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되었고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정부의 무력진압은 더 큰 반발을 불러왔고, 의과대학 학생들도 거리에 나서 독재정권 퇴진을 외쳤다. 시위 과정에서 의예과 2학년 최정규 학생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었고, 최정규 학생에게는 이후 명예 의학사 졸업장이 주어졌다.

또한 시위현장에서 부상당한 많은 학생들이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으로 몰려들어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 그래서 학생은 물론이고 기초의학 교수까지 모둗 나와 밤을 새워가며 부상자들을 돌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