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낙양

낙양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 백거이 묘

큰누리 2025. 7. 20. 23:03

≪낙양 용문석굴 봉선사(奉先寺)=노자나대불(盧舍那大佛)≫

* 봉선사(奉先寺, 1280)는 원래 대노사나불상(大盧舍那佛像 루셔나불)이라 불렸다. 당 고종 영휘 3(672)에 조각을 시작하였고, 황실에서 경비를 부담한 불상 조성 공사로 무측천이 나중에 2만 관을 들여 상원 2(675)에 완공하였다. 봉선사는 용문석굴 중 가장 큰 석불 조상군이며, 남북 길이 34m, 동서 폭 38m이고, 큰 불상은 북쪽에, 서쪽과 남쪽의 3 벽에는 제자 2, 보살 2, 천왕 2, 금강역사 2기가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대노사나불은 높이 약 17.14m, 머리 높이 4m, 귀 길이 1.9m이다. 제자상은 약 10.65m, 보살상은 약 13.25m, 천왕상은 10.5m, 금강역사상은 9.75m이다. 봉선사의 노사나불은 화엄종에서 숭배하는 주불로 법신불(法身佛)이다. 대불은 얼굴이 풍만하고 우아하며, 눈썹은 달 같고, 눈은 살짝 아래로 향하고, 미소는 자애롭고 밝다. 오른쪽 어깨는 노출되어 있고, 상체는 단정하고 자연스럽다. 이러한 고대 조각예술은 당나라의 강성한 국력과 황실의 후원 및 예술가의 뛰어난 조각 기술이 결합된 성과물로 당대의 위대함을 상징하며 동방 불교예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챗GPT로 번역한 현지 안내문1--

* 용문석굴 1280굴(봉선사)의 원래 이름은 대노사나불이다. 당 고종 3년(672년)에 조성되었으며, 무측천이 2만 관의 자금을 보태 675년에 완공되었다. 노사나불 높이는 17.14m, 대좌 높이는 4m이며, 풍채가 뛰어나고 의복 표현이 정교하며, 안면이 온화하고, 자비롭고 장엄하며, 천상의 위엄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 이는 중국 당대 불교 조각 예술의 걸작이다.   --챗GPT로 번역한 현지 안내문2--

 

노사나불은 불교의 삼신불(법신=비로자나불, 보신=노사나불, 응신 또는 응신=석가모니불) 중 보신불, 수행과 공덕을 통해 깨달음을 이룬 부처를 상징한다. 손 모양(수인)설법인(說法印)으로 두 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양 손바닥을 좌우로 벌린 형태로 중생에게 불법을 설하는 모습이다. 설법인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두루 비추어 원만하고 완전무결함을 뜻한다. 삼신불이 함께 모셔지면 노사나불은 보통 오른쪽에 위치한다.

 

<낙양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로 오르는 계단>

용문석굴 봉선사(奉先寺) 혹은 봉선사 1280굴, 용문석굴 노자나대불(盧舍那大佛), 대노사나불상(大盧舍那佛像 루셔나불)은 모두 같은 말이다. 봉선사(노자나대불)는 용문석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산자락 하나를 차지할 정도이다.

 

<전면에서 본 낙양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

봉선사는 남북 길이 34m, 동서 폭 38m이고, 큰 불상은 북쪽에, 서쪽과 남쪽의 3면 벽에는 제자 2, 보살 2, 천왕 2, 금강역사 2기가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대노사나불은 높이 약 17.14m, 머리 높이 4m, 귀 길이 1.9m이다. 제자상은 약 10.65m, 보살상은 약 13.25m, 천왕상은 10.5m, 금강역사상은 9.75m이다. 

 

<확대한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 좌(남쪽), 우(북쪽) 벽면>

왼쪽 남쪽벽은 마모가 심하고, 오른쪽 북쪽 벽은 주불인 노사나불보다 상태가 양호하다.

 

<오른쪽, 왼쪽에서 본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

 

<용문석굴 봉선사(노자나대불) 동영상>

 

<용문석굴 지화동(地华洞), 팔작사동(八作司洞), 육좌탑(六座塔)>

봉선사(노사나대불)까지는 그래도 제대로 보았지만 이곳부터는 시간이 모자라 아래의 이정표를 보고 대조해 가며 훑듯이 지나쳤다. 언제 다시 갈 지도 모르는 곳인데 중국의 불완전한 컴퓨터 시스템과 사진을 찍고 현장에서 출력까지 하느라 일행의 발목을 붙잡은 다른 일행 한 명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용문석굴 극남동(極南洞), 용화사(龍华寺), 정토당(淨土堂), 노동(路洞)>

 

<용문석굴 서산(용문산) 끝에서 본 건너편 동산(향산)석굴>

서산(용문산)과 동산(향산) 사이에 이하(伊河)가 흐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용문석굴은 대부분 서산에 있고, 건너편 동산은 규모도 작고 유명세가 덜하다. 무측천이 석굴을 많이 조성했다고 한다.

 

<이하를 건너며 다리에서 본 용문 서산석굴>

남쪽의 극남동(極南洞), 용화사(龍华寺), 정토당(淨土堂), 노동(路洞) 등이다.  

 

<伊河의 다리에서 본 용문 서산석굴, 동쪽 향산 동영상>

 

<용문 동산석굴 쪽에서 본 용문 서산석굴>

윗사진의 극남동(極南洞), 용화사(龍华寺), 정토당(淨土堂), 노동(路洞) 등에 노사나대불(봉선사)까지 포함한 구역만 보인다. 사진 오른쪽 밖에 있는 잠계사(潜溪寺), 빈양동(賓陽洞), 황보공굴(석굴사), 만불동(萬佛洞) 등은 보이지 않는다. 

 

<동쪽 강 건너에서 본 서쪽의 용문석굴 봉선사(노사나대불)>

계단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노사나대불과 불상군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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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 향산의 백원(백거이 묘원)≫

--챗GPT+구글 번역기+기타 자료를 합성한 백원(白園, 白居易 묘원) 현지 안내문--

백원(白園,백거이 묘원)은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기리는 묘역으로 용문 향산 북쪽 기슭의 비파봉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청곡, 정이정, 낙천당, 백정, 송풍정, 어두문, 비파봉, 백거이 묘, 와(석)비, 남북시랑각 등의 명승지가 있다. 백원은 당나라 양식의 건축 정원으로 백거이를 기리고 추모하는 장소이다. 푸른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우거진 장엄하고 고요한 정원은 1961년 용문석굴과 함께 국가중점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당나라 태종 시기인 772년 낙양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백거이와 당나라를 대표하는 3대 시인 이백이 죽은 지 10년, 두보가 죽은 지 2년 후이다. 이후 산시성 웨이난(陝西省 渭南)으로 이주했으며, 무종 시기인 846년 75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백거이는 당나라의 뛰어난 시인으로 중국 국내외 시문계에서 명성을 누렸다. 그는 장저우의 시마, 항저우와 쑤저우의 자사, 허난의 윤 등의 관직에 있었으며, 말년에는 태자의 스승이 되어 낙양의 마을에서 은거했다.그는 퇴락한 향산사(香山寺)를 자신의 사재와 주위의 도움을 얻어 증수를 한 뒤, 친구인 여만선사(如滿禪師)가 향산사 주지가 되도록 도왔다. 그 후 백거이는 여만선사 등과 함께 9명의 향산구로시사(香山九老詩社)를 맺고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18년간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죽기 전 ‘향산사 탑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가족들은 그를 용문 동산(향산사 옆)에 안장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장한가'와 '비파행(琵琶行)', '진중음(秦中吟)' 이 있다.

백거이의 묘는 원형의 흙무덤으로 높이 2.5m, 지름 약 10m로 아래에 화강암 호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높이 2.8m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강희 48년에 황실 관리 왕세홍과 좌순방 좌중운무군이 새긴 묘비의 글은 ‘당소전백공묘(唐少傳白公墓)’이다. 성도 왼쪽에는 3개의 비석이 있는데 <太守趙于京題> 비, 건륭 55년(1790년)에 高密單可가 세운 <唐太子少傳香山白文公墓>, 건륭 36년(1771년)에 세운 <特調 洛陽O정당O지장공O수비> 등이다.  

* PS : 최근에 접한 챗GPT 번역이 괜찮은 것 같아 백원(白園, 백거이 묘원) 현지 안내문을 번역했는데 틀린 곳이 많았다. 그래서 예전에 종종 이용한 구글 번역기를 돌리니 이번에는 구글 번역기가 더 나았다. 결론은 둘다 고유명사에 대한 번역이 엉망이라 안내문과 2개의 번역문을 보면서 정리했더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두어 곳은 결국 못찾았다. 

 

<용문 향산의 백원(백거이 묘원) 입구>

용문석굴 봉선사(노사나대불)의 강 건너편에 있다. 

 

<용문 향산의 백원(백거이 묘원) 안내도>

 

<용문 향산의 백원(백거이 묘원)의 白池>

 

<용문 향산의 백원(백거이 묘원)의 낙천당(樂天堂)>

낙천(樂天)은 백거이의 자이다. 안에 백거이 동상과 관련 글, 용품,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향산 백원(백거이 묘원) 낙천당(樂天堂)의 백거이像>

 

<백원(백거이 묘원) 낙천당(樂天堂)의 백거이 관련 자료들>

 

<용문 향산의 백원(백거이 묘원)의 남시랑과 기념비>

왼쪽 건물은 남시랑이며, 북시랑이 더 있다. 오른쪽의 비는 백거이 탄생 1220주년 기념비이다(1991. 08. 24 건립).

 

<용문 향산 백원(백거이 묘)의 비파봉석, 백거이 비문>

 

<용문 향산 백원(백거이 묘)의 백거이 초상과 비문>

 

<용문 향산의 백거이 묘와 비석들>

 

<용문 향산 백원(백거이 묘)의 비석들>

일본인 불교신자들이 세웠다는 여러 기이다.

 

<향산 백원(백거이 묘)의 백거이 묘와 묘비>

묘비의 글은 강희 48년에 황실 관리 왕세홍과 좌순방 좌중운무군이 새긴 ‘당소전백공묘(唐少傳白公墓)’이다. 

 

<용문 향산 백거이 묘 성도 왼쪽의 비석 >

성도 왼쪽에 3개의 비석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확인한 것은 건륭 55년(1790년)에 高密單可가 세운 아래 사진의 <唐太子少傳香山白文公墓> 비석이다. 다른 비는 <太守趙于京題> 비, 건륭 36년(1771년)에 세운 <特調 洛陽O정당O지장공O수비> 라는데 촬영한 사진에 있을 법하지만 너무 귀찮고, 번역기는 부정확해서 패스!

 

<정면에서 본 백거이 묘와 묘비, 비석>

 

<용문 향산 백원(백거이 묘) 입구의 어두문(魚頭門)>

챗GPT나 구글 번역기 모두 인명이나 지명, 저서 등의 고유명사에서 틀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두문은 둘다 오두문으로 오역했다. 

 

<점심을 먹은 낙양의 구룡수석궁(九龍水席宮)>

백거이 묘까지 보고 전동 카를 타고 나와 매표소 주차장에 있던 우리 버스를 타고 이곳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낙양 관림(관우 묘), 낙양 고묘박물관을 관람하고 서안으로 갔다. 규모가 큰 이 식당에도 청룡언월도를 든 재물신 관우상이 있었고, 엄청난 크기에 섬세한 구룡 목각 부조가 있었다. 

 

<낙양의 구룡수석궁(九龍水席宮)의 점심 메뉴>

모두 먹을만 하다. 특이한 것은 표고버섯 모양의 밀가루빵이었다.

 

<낙양의 노점상이 팔던 해당과와 오디>

낙양 구룡수석궁(九龍水席宮) 식당 앞 노점상에서 팔던 해당과와 오디이다. 노란 '해당과'는 처음 본 과일인데 식감은 아삭하지만 단무지와 가장 맛이 비슷했다. 즉 맛이 별로란 뜻... 오디는 우리가 아는 달착지근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