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개화산 약사사

큰누리 2017. 6. 22. 21:44

<개화산(開花山)>

개화산(開花山)의 원래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인데 신라시대에 주룡선생이라는 도인이 이곳에 살면서 매년 9월 9일에 동자 두 세명을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 구구절에 용산에 올라 술을 마시다)이라고 하였다 하여 주룡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간 후에 그 자리에 이상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났고 그 이후부터는 개화산(開花山)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선생이 살던 곳에 절이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절 이름을 개화사(開花寺, 고려 공민왕 2년 1353년)라 하였으나, 개화사에 있는 좋은 약수 때문인지 조선 말기쯤에는 약사사(藥師寺)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조선 조에 사용했던 봉화대가 있었으나 그 터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또한 개화산에는 미타사(고려 후기 추정)와 사찰 옆에는 6.25때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호국충혼위령비가 있으며 인근 주민들이 즐겨찾는 약수터 3개가 있다.

 

개화산은 자연경관의 보호와 시민의 건강 휴양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개화근린공원, 꿩고개근린공원으로 결정 고시되었으며 면적은 약 566,500㎡이며, 산 높이는 123.5m이다.   --이하 설명은 현지 안내문, 개화산 약사사 홈페이지에서 요약 발췌--

 

 

<약사사(藥師寺)>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금낭화로17길 261

보유 문화재 : 약사사 삼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 고려 말 ~ 조선 초), 약사사 석불(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 고려 말).

약사사는 개화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경내에는 고려 후기 3층석탑과 석불이 있어서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창건되었다고 유추된다. 1486년(성종 17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이 주룡산에 있다고 나와 있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양천읍지>에 따르면 신라 때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머물렀다 하여 주룡산(駐龍山)이라 이름하였고, 주룡선생이 돌아간 후 기이한 꽃 한 송이가 피어 사람들이 개화산(開花山)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봉화를 받는 산이라 하여 개화산(開火山)으로도 불리었는데, 조선 초기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하였다고 한다.

 

1737년에 이르러 송인명(宋寅明)이 개화사에서 공부하고 재상이 되어 그 인연으로 절을 중수하였고, 순조 이후에는 약사사(藥師寺)로 개칭하였다. 1827년 송숙옥(宋叔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에 의하면 '약사암'이라 하고 삼한고찰(三韓古刹)로 표기하였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은 개화사라는 제목으로 사찰과 주변풍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으로 약사암은 잠시 봉은사의 말사가 되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소속 사찰이다. 1928년에는 원표스님이 약사전을 고쳐지었다. 1984년 설호스님이 다시 고쳐지었으며, 1988년 요사채와 범종각을 신축하였다.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여 향화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원을 비는 약사사의 촛불>

 

 

<개화산 약사사 입구>

이 위치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 풍산심씨묘역이 있고 지하철 5호선 종점인 방화역과 연결된다. 답사 일자가 마침 석탄일 3일 전이라 절은 입구부터 화려한 연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개화산 약사사>

 

 

<개화산 약사사 범종각>

 

 

<개화산 약사사 3층석탑>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

시대 : 고려 말 ~ 조선 초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332-1번지.

이 탑은 원래 약사사 석불 입상이 모셔져 있던 금당 바로 앞에 서 있던 3층석탑으로 약사사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화산 중턱에 있는 이 탑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투박한 듯 하면서도 날렵하다. 이 석탑은 1층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이다. 석탑의 받침부(기단부)에는 사각형 지대석 위에 큼직한 사각형 기단과 판석으로 된 갑석이 놓여 있다. 다소 육중한 기단 위에는 갓기둥(隅柱)이 있는 1층 탑신과 큼직하고 가파른 지붕돌(屋蓋石)이 놓여 있고, 다시 2, 3층 탑신과 지붕돌이 올려 있다.

탑의 몸체부(塔身部)는 투박한 받침대에 비해 날렵한 모양이다. 이 석탑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희귀한 석탑의 예로 그 가치가 크다.

 

 

 

 

<개화산 약사사 3층석탑을 대웅보전 앞에서 본 모습>

 

 

<개화산 약사사 대웅보전>

 

 

 

<개화산 약사사 대웅보전 사분합문의 아름다운 목각들>

 

 

 

 

 

<개화산 약사사 석불입상>

지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

 

높이 3.3m, 어깨폭 0.9m, 돌보관의 지름은 1m이다. 본래 약사전 옆 목조건물 안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974년 건물을 철거하면서 기단 위에 노출된 채 옮겨졌다가 약사사 증축 때 대웅전 안으로 봉안되었다. 돌보관 아래쪽에 명문이 있으나 마모되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옷주름이나 자세,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 조선시대 능이나 묘의 석인상 조각양식과 비슷한 특징을 나타낸다.

 

 

 

 

<개화산 약사사 대웅보전의 불상들>

중앙 상단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인 석불 약사여래불, 아래 중앙은 석가모니불, 좌우로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상이다.

 

 

 

 

 

<개화산 약사사 대웅보전의 탱화>

약사사 홈페이지에는 대웅보전 양쪽에 걸린 아래의 탱화가 신중탱, 감로탱이라고 되어 있다. 아래 탱화에 물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윗 사진은 신중탱, 아래 사진은 감로탱으로 보인다. 신중탱으로 추측되는 윗 사진 아래에는 돌아가신 분의 영정이 있고, 탱화 양쪽에는 죽은 이들의 명패가 빼곡이 채워져 있다.

 

 

 

<개화산 약사사 대웅보전의 16나한상>

어느 사찰이나 금강역사상과 나한상들의 표정이 가장 생동감 있다. 약사사의 16존자상도 어느 하나 같은 표정, 동작이 없고 특히 표정이 살아있다.

 

 

 

<개화산 약사사 대웅보전 안에서 본 사분합문 실루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