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21.09. 공세리 마을 풍경과 삼도해운판관비

큰누리 2021. 11. 13. 13:32

≪아산 공세곶 고지(貢稅串庫址)≫

조선시대 백성들이 조세로 낸 곡식을 저장하였던 조창(漕倉)인 공진창(貢進倉)이 있었던 자리이다. 공세곶창(貢稅串倉)은 공진창의 처음 이름이다. 이곳에서 충청도 각지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서울로 옮겼다. 초기에는 창고 없이 해안 포구에 곡식을 쌓아두었으나, 1523년(중종 18)에 80칸의 창고를 마련하고 이름을 공진창(貢進倉)이라 하였다.

 

공진창에는 곡식을 운송하기 위하여 적재량이 800석인 배 15척과 운반인 720명이 배치되었고, 곡식의 수납과 운송 책임자로 해운판관(運判官碑)이 임명되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충청도 도사가 해운판관을 겸임하였고 1762년(영조 38) 이후에는 아산 현감이 공진창을 관리하였다. 19세기에는 조창 자체가 폐지되어 건물만 남아 있었는데, 1897년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현재 창고지 주변에는 당시 세운 성벽이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

 

적재량 800석인 배 15척에 운반인이 720명이면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셈이다. 제주도민속사박물관과 국립박물관에서 공물로 바친 귤이나, 말, 해산물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현대 이전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곡식이나 특산품이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수탈을 당했는지 끔찍할 정도였다.

소출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그 시대에 나라에 바치는 것만도 벅찬데 중간의 관리들까지 수탈에 가세했으니 힘 없고 빽 없는 일반 백성들은 세금을 견디기 어려워 도망을 가거나 도적이 되고, 심지어 먹고 살기 위해 자식까지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

이곳 공세리는 水路의 교통 요지로,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저장하였던 공진창(貢進倉)이 있던 곳이다. 위의 내용과 중복되어 중략...

여기에 있는 6개의 비는 해운판관들의 덕행과 선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가장 오랜 것은 1649년(인조 27)의 것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1708년(숙종 34)의 것이다. 본래 창고지 앞과 도로변에 돌을 쌓아올린 석축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현지 안내문-

 

내가 본 비석은 이수(螭首)가 있는 5개와 이수가 없는 비석 4개 등 모두 9개였는데 안내문에는 판관비가 6개라고 되어 있다. 이수가 있는 것 5개 모두에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이란 글이 새겨진 것으로 미루어 이수가 없는 4개는 다른 종류의 비석인 듯 하다. 

 

 

<공세곶창(貢稅串倉)과 그 앞의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 뒷쪽의 석축은 공세곶창-조창(漕倉)인 공진창(貢進倉) 터, 혹은 창고 석벽이다.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를 확대한 모습>

이수가 있는 것 5개에는 모두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아산 공세리 성당 앞 풍경>

당시에 코로나 19로 일반인은 성당 출입이 금지된 상태여서 그런지 우리가 성당과 마을에 있는 1시간여 동안 마을 사람은 단 1명도 못 보았고, 성당에서 관광객 몇 명만 보였다. 그러서인지 마을 풍경이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낮은 슬레이트 지붕집과 주변의 텃밭, 좁은 골목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시골의 전형적인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공세(2)리가 다른 마을과 다른 점이라면 벽에 그려진 벽화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산 공세2리의 벽화들>

조세 창고가 있던 이곳에 대포와 대포에 화약을 장전하는 벽화가 있는 점이 독특하다.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 앞 골목 풍경>

 

 

<이명래 고약 발원지 공세리의 이명래 고약 벽화>

이명래 고약은 요즘 젊은이게는 무언가 싶겠지만 우리 어릴 때에는 붙이는 종기 만병통치약이었다. 지금이야 항생제가 발달해서 약국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병원이나 약국이 거의 없던 당시에는 온 몸에 종기가 많이 났고, 그러면 이 끈적끈적한 이명래 고약을 사다가 종기난 부위에 붙이면 얼마 후 고름이 생기고 그것을 짜내면 나았다. 나도 몇 번은 붙인 기억이 있는데 끈적끈적하고 시커먼 고약이 여기저기에 묻는 것이 무척 싫었던 기억이 난다.

 

이 고약은 현재의 공세리 성당을 이곳에 자리 잡게한 프랑스 외방선교회 에밀 드비즈 신부님이 개발한 것이다. 신부님은 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주다가 그를 돕던 이명래(요한)에게 그 비법을 전수하였고, 그후 고약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벽화(!)에는 '공감마을 공세리 이야기, 최초의 신약이 만들어진 공세리'라는 패가 붙어있다.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은 공세리 칼국수집 '명가'>

칼국수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에서 먹은 칼국수는 맛이 괜찮았다. 쭈꾸미였던가? 무언가 독특한 재료가 칼국수에 들어갔었는데 기억이 안 나고 불행하게(!) 사진촬영도 놓쳤다! 먼저 시킨 도토리전은 도토리 가루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식감이 아주 부드럽고 맛있었다. 도토리가 많이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도토리의 떫은 맛도 커진다. 

 

 

 

 

<공세리 야경>

저녁을 먹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고 파밭 넘어 마을 위로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공세리 '성당길 커피향'>

공세리 성당 입구에 있는 카페로 커피 맛은 무난했다.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없어서 커피숍에도 손님이라곤 우리 밖에 없었다. 아기자기하고 카톨릭 신자 분위기가 물씬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였는데 카페 분위기처럼 주인(!)도 그랬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커피만 마시고 바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