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22.04.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의 유적, 유물들

큰누리 2022. 5. 21. 17:52

<연세 역사의 뜰, 수경원(綬慶園) 터와 광혜원(廣惠院)>

이 지역 일대는 옛날 수경원(綬慶園)이 있던 자리이다. 수경원은 조선왕조 제21대 영조(英祖)의 후궁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원묘였다. 영빈은 1남 6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이 바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1969년에 수경원이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으로 옮기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1974년 연세대학교회(루스채플)를 세웠다.

영빈의 원묘를 옮긴 뒤에 지석(誌石)과 한 벌의 명기(明器) 및 영조 어필인 의열묘(義烈墓) 현판이 발견되어 현재 우리 대학 박물관 민속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수경원의 부속건물인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은 뜰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정자각 옆의 목조 한옥은 광혜원(廣惠院)을 실제 크기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에 개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자 연세학원의 연원이 되는 기관으로서, 연세인의 의술 발전을 꽃피운 산실이 되었다. 광혜원은 처음에 재동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사용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건물의 형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1985년 5월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마침내 1987년 4월 10일에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발상지를 보존하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정자각은 연세기록보존소, 광혜원은 연세사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뜰 안은 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서 석조예술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이곳은 연세의 뿌리를 확인하고 역사를 이어주며 보람찬 미래를 키우는 자랑스러운 연세의 소중한 공간이다.

2003년 10월 30일 연세대학교

--현지 안내문--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 입구>

왕족 묘원의 문이 어땠는지 답사를 다녀온지 너무 오래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문은 모양새나 양쪽 문지방이 움푹 패인 것으로 보아 수경원일 당시의 문인 듯하다. 2013년 4월 20일에 언더우드기념관, 스팀슨관, 아펜젤라관, 언더우드家 기념관 등 연세대 안의 역사적인 건물을 답사하러 왔었다. 당시에 이곳(수경원)도 들렀고, 제중원 내부가 전시장으로 이용되던 중이라 알렌 관련 전시물들을 보았다.

 

그랬는데 까맣게 잊었다가 박물관 2층 창너머로 본 후에야 이곳을 기억했다. 진료 때문에 세브란스병원에 들렀는데 중간에 시간이 비어 100주년 기념관 안의 박물관을 자세히 보다 우연히 창밖으로 이곳을 본 것이다. 2013년 답사 당시에는 현재의 100주년기념관에 백양콘서트홀이란 이름도 더 있었고, 박물관도 지금과 달리 전시물이 별로 없었다.

 

 

2013년 답사 당시에 쓴 글 : https://blog.daum.net/hhl6103/614 신촌역과 연세대학교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 안>

중앙 왼쪽 건물은 수경원 정자각, 오른쪽 건물은 제중원, 그리고 비각과 석탑이다. 정자각 앞 왼쪽에는 석수, 문인석, 주춧돌, 석등하대, 주춧돌, 비석받침대, 천상열차분야지도, 부도, 석등 등이 놓여있고, 뜰안에는 2기의 석탑과 비각이 있으며 사진 오른쪽 구석에는 주춧돌(정초석) 받침대 3기가 있다.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의 석물들 모음과 수경원 정자각>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의 제중원 건물과 비각, 석탑들>

비각은 현재 비어있다.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 문 옆 구석의 주춧돌(정초석) 받침대들>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의 석물들>

앞에서부터 석수, 동자석(?)과 문인석, 주춧돌, 석등하대, 주춧돌, 비석받침대, 천상열차분야지도, 부도, 석등 등이다.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의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조선시대의 천문도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둥근 천문도 안에 적도, 황도, 은하수, 별자리들과 별이 그려져 있다.

 

 

<연세 역사의 뜰(수경원)의 석물들>

부도, 석등, 주춧돌 등이다.

 

 

<연세 역사의 뜰의 수경원 정자각>

 

 

 

<연세 역사의 뜰 수경원 정자각 내부>

정자각 안으로 들어선 후 바라본 북쪽(뒷문) 방향이다. 문 기둥 좌, 우에는 수경원의 묘가 서오릉으로 옮겨질 때 무덤 안에서 출토된 영빈 이씨 明器석함과 영빈 이씨 墓誌석함이 놓여있다. 문밖 뒤뜰에는 유물인 상석 1기가 놓여있다.

 

 

<연세 역사의 뜰 수경원 정자각의 영빈 이씨 명기석함(暎嬪李氏 明器石函)>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11호,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

 

 

<연세 역사의 뜰 수경원 정자각의 영빈 이씨 묘지석함(暎嬪李氏 墓誌石函)>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11호,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

 

 

<정자각 안의 전시 내용 - 영빈과 정조, 연세 역사 속 수경원>

-영빈과 정조-

영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세손인 정조가 자신과 할머니 영빈 이씨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조는 '義'가 담고 있는 차가움에 거부감을 가졌고, 열 살 나이에 직접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은 '大義'라는 명분으로 잊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정조는 정조 12년(1788년) 12월 26일, 할머니 영빈 이씨의 궁호를 선희궁(宣禧宮)으로 바꾸었다.

 

 

<정자각 안의 전시 내용 - 수경원, 영조·영빈 그리고 사도세자>

-수경원 : 조선왕조 제21대 英祖의 후궁인 暎嬪 李氏의 원묘-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사도(思悼)세자이다. 영빈 이씨가 1764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영조는 친히 '의열(義烈)'이라 시호를 내렸고, 묘호는 의열묘가 되었다. 대한제국 광무3년(1899) 사도세자의 4대손인 고종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영빈 이씨의 묘를 수경원(綬慶園)으로 승격하였다.

 

수경원은 1970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겨가고, 1974년 대학교회(루스채플)가 들어섰다. 능 이장 과정에서 능 속에서 3개의 석함과 2개의 지석, 1벌의 명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1호, 본 박물관 소장)가 출토되었다. 왕릉이나 왕자, 후궁들의 무덤인 원(園)에는 제례를 올리는 장소인 정자각(丁字閣)과 비(碑)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는데, 현재 뜰안에 보존되어 있다.

 

 

<영빈과 정조 관련 안내문, 여범 등의 문서>

 

 

<연세 역사 속 수경원 사진들>

바닥에 전시된 것은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11호인 '백자 영빈이씨 명기'와 '백자청화 영빈이씨 묘지'이다.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11호인 백자 영빈이씨 명기(白磁 暎嬪李氏 明器)>

1970년 수경원 이장 후 출토된 유물이다. 명기는 모두 20점으로 보(簠), 작(爵), 향로, 호(壺) 등 제기를 본뜬 소형 부장품이다. 새하얀 태토와 유색이 매우 정갈하고 바닥 또한 고운 모래로 받쳐 구운 후 갈아내어 역시 정갈하다. 특히 보(簠)는 전면에 음각문을 새겨 넣었으며, 작은 三足形(그릇 발이 3개인 형태)이다. 일부가 파손되고 호의 경우 유약에 의해 몸체와 뚜껑이 붙은 것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11호인 백자청화 영빈이씨 묘지(白磁靑華 暎嬪李氏 墓誌)>

1970년 수경원 이장 후 출토된 유물이다. 묘지(墓誌)는 돌아가신 분의 나고 자란 연대, 가족관계, 성품, 활동상을 적어 무덤 속에 함께 묻는 유물로 도자기 또는 돌로 제작한다. 영빈 이씨 묘지는 청화백자로 제작한 2벌이 방형 석함과 함께 출토되었다. 1벌은 5매로 완전하며, 다른 1벌은 4매로 제3매가 없다.

 

제목에 '御製暎嬪李氏墓誌'라 쓰여 있어 묘지문을 영조가 직접 지은 것을 알 수 있고, 글씨는 영조와 영빈 사이의 맏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혼인한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 1725~1790)이 썼다. 묘지문에는 영빈 이씨의 가계와 그가 영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6녀에 관한 내용, 성품, 영조가 애도의 마음을 표한 글이 적혀 있다.

 

 

<의열묘도(義烈墓圖)와 수경원지록(綬慶園誌錄)>

왼쪽의 의열묘도(義烈墓圖)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50% 축소 복제본이다. 영조는 영빈 이씨의 묘를 연희궁 터 안에 조성하라고 하고 의열(義烈)이라는 묘호를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능 조성 후 이를 묘사한 그림으로 1764년으로 추정된다.

 

수경원지록(綬慶園誌錄)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것을 복제한 것으로 고종이 광무3년(1899)에 수경원을 조성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당시 '원(園)'의 격식을 맞추기 위해 정자각, 비각 등의 건축물과 석물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영조·영빈 그리고 사도세자>

영조는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의 탄생이 간절했던 상황에서 42세(영조11년, 1735)에 영빈에게서 원자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나 영조가 심혈을 기울여 시행했던 탕평의 이상이 현실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사도세자와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영조 38년(1762) 임오화변의 참극(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국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에 따르면,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직접 나아가 종사를 평안케 하기 위해 사도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이로 인해 '아들을 버린 어머니'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당시 정치상황에서 왕실의 혈통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뜨거운 윤5월 뒤주 안에서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발인 날 아들의 관을 붙잡고 통곡하던 영빈 이씨는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들을 일찍 앞세운 2년 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영빈 이씨의 바램과 같이 세손은 왕세자로 책봉되어 훗날 정조임금이 되었고 순조와 헌종에 이르기까지 혈통을 이어 나갔으니, 영조가 '大義'라 불렀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닥의 전시물은 영조의 어제표의록(御製表義錄)과 영빈 이씨에게 의열(義烈)이란 시호를 내린 교지(敎旨)이다.

 

 

 

<1764년에 영조가 친필로 쓴 의열묘(義烈墓) 현판(복제품)>

 

 

<정자각에서 바라본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안에 있는 연세대학교 박물관 2층 유리창(사진 중앙)으로 이곳이 보여서 10여년 만에 이곳을 다시 돌아보았다.

 

 

<수경원 정자각 오른쪽 뒷뜰에 있는 조선총독 南次郞의 oooo기념탑>

오른쪽 윗부분은 일부러 갈아냈는지 확실한 판독이 어려웠다. 南次郞(미나미 지로)은 1936년 8월 7대 조선총독을 역임한 자로 일본말 사용, 창씨 개명 등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고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1945년 종전 후 전범으로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받고 복역중, 1954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죽었다. 

--미나미 지로 - Daum 백과에서 발췌--

 

 

<연세 역사의 뜰 마당의 수경원 비각 내부>

비는 없고(능 이장 시 함께 옮겨간 듯), 비각과 비석 받침만 남아 있다. 

 

 

<연세 역사의 뜰, 광혜원 정면 모습>

 

 

<수경원 비각 앞에서 본 연세 역사의 뜰>

 

 

<연세 역사의 뜰, 광혜원의 옆과 뒷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