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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2선정릉. 용인권역 답사 후기

큰누리 2012. 5. 31. 14:54

45차 답사장소는 선정릉과 용인권역이었다. 평택, 안성도 포함되었지만 초답지가 많아 시간이 늘어지고 날이 빨리 어두워져서 용인에서 마무리를 했다. 겨울이라고 하기엔 날씨가 너무 쾌청하고 포근해서 답사 내내 어릴 적에 소풍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이번 답사 장소도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깨끗했다.

인현왕후의 모친인 풍창부부인 조씨 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본 용인으로 옮긴 단국대학교 캠퍼스는 건물과 부지의 규모가 대단했다. 비싼 한남동 땅 팔아서 한적한 곳에 일찌감치 자리를 잘 잡은 셈이다. 그런데 기존의 길을 끼고 학교가 들어서서 마을로 가려면 캠퍼스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번듯하게 건물을 지어놓고도 꼬박꼬박 1,500원을 통행료로 받았다. 소위 교육기관, 그것도 대학이란 곳이 길을 끊어놓고 주민들에게 조차 통행료를 받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인은 이미 개발이 많이 진행 된 상태지만 아직도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처음에 들른 선정릉은 종종 갔던 곳이지만 답사하러 가서 보니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선릉만 하루에 두번 개방하는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담치기를 해서 3기 모두 자세히 봤다. 하지만 나중에 CCTV를 보고 쫓아온 관리인한테 들켜서 사진을 찍느라 뒤처진 나와 2명이 그 관리인한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나오는 길까지 따라 나와 핏대를 올려가며 우리를 나무랐다.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고 능에 들어갔으니 욕을 먹어도 싸고 직무에 열심인 분이니 원망할 건 없을 것 같다.

 

정릉의 무인석은 코가 심하게 으깨졌는데 아들 낳으려고 코를 깨어 갈아먹은 임부들의 만행이란다. 그렇게까지 해서 낳은 아들에게서 부모는 무슨 낙을 얻었는지... 선정릉은 이래저래 인구에 회자된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한데다 문정왕후의 욕심으로 중종의 정릉은 죽은 후에도 이리저리 천장을 해야 했고 수시로 물에 잠겼던 이곳에 안착(!)했으니 왜 안 그러겠는가?

 

그 외에도 태조 이성계의 장녀인 경신공주와 남편 이애, 한일합방에 반대해서 각국 공관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민영환 선생현재 뮤지컬로 공연 중인 <남한산성>의 주인공 삼학사 오달제 선생의 假墓, 명당으로 손꼽히는 연안부부인(중종의 외조모) 기타 풍창부부인(숙종의 장모) 묘김수환 추기경과 독도수비대장 오순칠 선생이 잠들어있는 천주교 공원묘 등이 오늘의 코스였다. 아참, '동창이 밝았느냐~'의 남구만 선생 묘도 답사했다. 그 신도비 앞에 족제비 한 마리가 죽어 늘어져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천주교 공원묘해주 오씨묘역은 일단 그 규모로 우리를 압도했다. 가수 배호 묘를 보러 지난 여름 장흥에 있는 신세계공원묘에 들렀을 때 그 규모에 놀랐는데 천주교 공원묘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이다. 봉분 사이의 간격도 넓고 주변이 쾌적하게 정비되어 있으며 공원 자체가 엄청나게 컸다. 국립현충원의 몇 배는 될 듯하다.

천주교 공원묘에서 특이한 점은 성직자 묘역에 있는 분이 모두 남자란 점이었다. 혹시나 싶어 눈을 부릅뜨고 찾아봤지만 여성의 묘는 역시 없었다.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특정 종교만 수직관계가 강한 것인지 궁금했다.

 

해주 오씨묘역은 ㄱㄴㄹ님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좋다’라는 말을 몇 차례 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직접 보니 개인 묘역으로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산 사람 집도 없는데 죽은 자들을 위해 그렇게 큰 공간을 할애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일부러 공간을 늘린 것도 아니고 기존의 선영 유택을 정성스럽게 가꾼 것이니 오히려 칭찬할 만 했다. 택지 정리를 하면서 망실될 우려가 있는 묘는 화장해서 한 군데로 모시고 비를 세워놓았다. 용인지구를 개발하면서 땅을 판 이익이 엄청나서 강남에 빌딩이 몇 개라는 이야기를 종손으로부터 들었다. 묘 주위의 땅을 팔아 돈을 좀 만진 후손들이 거들먹거리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아 온 우리 일행으로써는 답사 팀에게 우호적이고 친절했던 그 종손이 기억에 남는다. 조상이 유명해서 묘를 답사하러 오면 좋은 일이고, 게다가 공부하러 가는 사람들인데 묘를 손상시킬 일도 없지 않을까?

 

해주 오씨묘역은 커다랗고 우묵한 원형의 무덤 군이 3개에다 오명항 선생을 비롯한 몇 분은 따로 묘를 썼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화려하고 잘 정비된 그 곳에서 차로 10분 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삼학사 중의 한 분인 오달제 선생 묘는

같은 해주 오씨라도 종손이 아닌 방계여서 그런지 조촐했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삼전도 치욕 후 심양으로 끌려가 살해를 당했으니 시신 수습이 불가능해서 요대(허리 띠)만 묻었다고 한다. 무덤 꼬리가 내가 본 묘 중에서 가장 긴 점이 특이했고, 앞에 나란히 자리 잡은 두 부인 묘가 자매처럼 다정해 보이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 밖에 민영환 선생 묘는 석물은 볼 게 없었지만 묘 뒤를 둥그렇게 높여서 곡장처럼 만든 점이 특이했고 부지가 넓었다. 무덤 앞 동쪽은 오래된 동네의 정겨운 이미지가 남아있고 신도비 앞에서 400포기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김장을 하는

주민을 촬영까지 했지만 그 쪽만 무너지면(?) 조만간에 사방에서 조여 올 고층 아파트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초답지가 많았던 탓에 점심 식사가 늦어졌다. 새벽에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급하게 먹은 아침밥의 성능이 10시 반 쯤 되자 바닥이 났다. 그걸 초콜릿 두 알과 사탕 두어 개로 점심까지 버티자니 힘이 들었다. 매번 답사 때마다 일정에 쫓겨 사흘 쯤 굶은 사람처럼 무섭게 먹어대는 내 모습이 민망하기는 하다.

점심 먹을 곳을 다음 여정지로 가며 찾자니 번화한 곳이 없어서 식당이 눈에 띠질 않았다. 일행이 모두 지칠 즈음 길 가에서 황태국과 들깨 칼국수를 파는 곳을 발견했다. 배가 고파서 맛있기도 했겠지만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황태국은 일품이었다. 삼삼하면서도 맛있는 김치와 깍두기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오후 들어 날이 흐리면서 가뜩이나 짧은 겨울 해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태조 이성계의 장녀인 경신공주와 부군인 이애의 묘를 찾아 나섰다. 가는 길에 옥상의 수조를 리모델링한 개집도 보고 낚시터가 설치된 작지만 예쁜 저수지 덕에 내 디카는 호사를 누렸다. 그 예쁜 저수지를 끼고 올라갔으면 묘를 금방 찾을 것을 왼쪽으로 빠져 시간은 버렸지만 참나무와 은행나무 낙엽 속에서 발이 푹푹 빠지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일행 중 몇 분이 마른 나뭇가지의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사위질빵 씨앗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사위질빵은 나무를 덩굴로 감고 올라가는 얌체 기생식물인데 하얀 씨앗을 꽃으로 안 모양이었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먼저 간 일행이 아니라며 되돌아 나왔다. 입구에서 에버랜드에서 내 건 접근금지 판을 보면서 전주 이씨 종중에서 돈 많은 대기업에 땅을 팔 정도로 궁했나보다고 추측했는데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서 으름덩굴 무더기도 만났다. 으름은 열매가 여성의 생식기를 닮아서 壽下婦人이라고도 불린다. 으름열매가 바나나 맛이라고 하자 봄날의 연못님이 탐을 냈지만 겨울까지 열매가 남아있을 리 없다.

 

이애와 경신공주의 묘는 저수지 바로 위에 있었다. 조선 초기의 묘이니 만큼 특징적인 점이 많았다. 비석은 다른 조선 초기의 것처럼 전체적으로 송이버섯모양이지만 비석의 머리 부분에 굴곡이 몇 번 있는 게 달랐다. 무덤의 바닥도 방형이고 규모도 큰 편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와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 두 부인에게서 8남 3녀를, 이름 모를 후궁 2명에게서 옹주 둘을 두었다. 하지만 자식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신덕왕후 소생 아들 둘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동복 간에도 죽고 죽이고 했으니 나라를 세운 원조는 됐을지언정 한 인간으로서는 그리 복된 인생을 살았다고는 못할 것 같다.

 

오후 들어 흐려지기 시작한 날씨가 저녁이 되자 더 빨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일정을 예정보다 단축하고 서둘러 마지막으로 명당자리라 풍수 하는 분들이 많이 찾는다는 연안부부인 를 찾아 나섰다. 흥국생명 연수원 옆에 있었다. 쌓인 낙엽 때문에 발이 빠지고 미끄러져서 서로 손을 잡아주며 묘에 올라보니 안산이 좋다는데 주변이 어둑한데다 풍수에 무관심한 나로서는 소귀에 경 읽기...

 

어두워진 상황에서 목적지에 맞춰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서울로 향했다. 오늘은 음력 시월 첫 주라 시제가 많은 날이다. 막힐까 우려했던 길은 잘 뚫려서 다행히 7시 반에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 큰딸의 얼굴은 보고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답사에 지친 몸이 천근만근인지라 차 안에서 잠자는,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2호선을 타려고 강남역에 내리니 비까지 추적추적... 부랴부랴 2호선 타고 집에 도착하니 6시 반, 딸애는 느긋하게 부대찌개까지 끓여 먹고 그 애의 생활 터전으로 갔다. 오늘 상황 종료!

 

식물 사진은 선정릉에서 가장 많이 촬영했다. 선정릉은 강남 사람들의 휴식처여서 그런지 잘 가꿔놓았다. 유실수와 감국, 억새 등이 주로 나오는 길의 매표소 오른쪽 길에 있어서 시간에 쫓겨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없었다. 모양새는 그런대로 갖춘 억새밭과 주렁주렁 가지 가득 열린 산수유 열매, 노란 감국, 하얀 구슬을 꿰어놓은 듯한 흰좀작살나무와 계절 파악 못 하고 활짝 피었다 얼어버린 개나리 등이 대한민국의 내노라 하는 도심에서 그 진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흰좀작살나무 무리는 나도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원조 보라색 좀작살나무 열매에는 못 미쳤다. 

그 밖에도 단풍나무와 참나무류, 이끼 낀 소나무 등이 보기 좋았는데 도심 한 복판에 이끼가 낄 정도로 늙은, 그리고 많은 나무들이 있다는 것은 지역주민들에게나 나 같은 방문자에게조차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왠지 내가 그 상황에서 있을 곳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잘 단장되고 관리된 선정릉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불편함의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태강릉 조선왕릉전시관의 남천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