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함양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학사루, 느티나무

큰누리 2017. 7. 26. 21:18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漢南君 墓域)>

지정 : 경상남도 기념물 제165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산755-11.

한남군((漢南君 ) 이어(1429~1459)는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혜빈 양씨(惠嬪 楊씨) 소생이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1456년(세조 2)에 이곳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한남군은 휴천계곡의 새우섬에서 유배생활 4년 만에 생을 마치게 된다. 이후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이 무덤은 1557년(명종 12)에 조성되었으며, 1713년(숙종 39)에 후손의 요청으로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되었다고 한다. 신도비(神道碑)와 상석(床石)을 비롯한 여러 묘석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 조선시대 분묘의 조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묘이다. 한남군이 유배되었던 새우섬의 면적은 대략 1,800㎡ 정도로, 지금은 섬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다. 이곳 사람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그 마을을 한남마을로 부르고 있다. 새우섬에는 1867년에 유생들이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 이름하여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으나, 1936년의 홍수로 쓸려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

 

충청북도 충주시 용관동에는 1750년(영조 26) 경에 세워졌다가 1920년에 중건한 한남군 사우(祠宇)가 있다. 어머니 혜빈 양씨와 군부인 안동 권씨의 신위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漢南君 墓域)>

예전에 함양 상림에 들렀을 때 바로 주변에 있는 산에 한남군 묘가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왜 왕자묘가 이곳에 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들르지는 못했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함양 휴천면으로 귀양왔다가 4년 만에 죽어서 이곳에서 안장된 것이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왕자는 6명이라고 한다.

 

 

 

<한남군 묘역의 석물들>

신도비와 장명등, 망주석은 최근에 손을 보았는지 깨끗하다. 동자석과 무인석은 숙종대에 만들어진 듯 한데 현재로선 크게 망가진 부분이 없어서 보아줄 만은 하다.

 

 

 

<한남군 묘역의 문인석과 망주석, 그리고...>

문인석과 망주석 사이의 석물은 어떤 용도인지 모르겠다. 내  기억으론 처음보는 석물이다.

 

 

 

 

 

 

<뒤에서 내려오며 본 한남군 묘역>

오른쪽 위 중경에 보이는 일자로 된 숲은 함양 상림이다.

 

 

 

<함양초등학교>

함양초등학교 교정에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가 있고, 맞은편에 '함양 학사루'가 있다. 두 번째 사진은 함양초등학교 교문쪽의 조형물이다.

 

 

 

<함양 학사루(學士樓) 느티나무>

지정 :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 407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27-1번지.

이 느티나무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현감으로 지낼 당시 학사루 앞에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에 함양태수를 지냈던 최치원이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692년(숙종 18)에 중건하고 1979년에 함양군청 앞으로 옮겨졌다.

 

함양현감을 지내던 김종직은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었는데 그 아들의 아호가 목아(木兒)였다. 아들의 짧은 생을 달래려는 마음을 담아 심은 느티나무는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며 높이 22m, 가슴높이 나무둘레7.25m에 이르는 거목이 되었다. 학사루 느티나무는 함양군민과 이곳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고 함양과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이다.   --현지 안내문--

 

 

<함양 학사루(咸陽 學士樓)>

지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90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이 누각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지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관청의 객사(客舍) 자리인 현 함양초등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이전 당시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92년(숙종 18)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원래 학사루는 객사의 부속 건물로 함양 읍성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학사루를 제외하고 객사를 비롯한 다른 중요 건물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렇게 화려한 건물은 아니지만 누의 아래와 위, 지붕의 비례가 대단히 조화롭고 안정되어 조선시대 관청에서 지은 누각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 쓴 시를 철거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

 

 

<함양 학사루를 정면(함양 우체국 앞)에서 본 모습>

 

 

 

<함양 학사루를 측면에서 본 모습>

 

 

<함양 학사루를 정면에서 접근하여 본 모습>

 

 

<함양 학사루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함양 학사루 누각 위의 모습>

마루를 제외한 부분은 단청을 새로 했는지 농월정처럼 색상이 선명하고 깔끔하다.

 

 

 

 

<함양 학사루 누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