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구이양(貴陽)

중국 구이양(貴陽)13 - 구이양 청암고진(靑岩古鎭)

큰누리 2019. 8. 21. 01:05

<2/18. 일. 중국 귀주여행 4일차>

06:00 - 07:00 - 08:00

安順시 원승호텔 - 직금동 - 귀양시 금령(퀴안링)산 공원- 귀양시 청암고진 - 2/19. 0:25 귀양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출발.

 

구이양(貴陽) 청암고진(靑岩古鎭)명나라 홍무(洪武)11년(1378년)에 건설되었고 현재 중국 역사문화명승지이다. 청암고진은 역사적으로 교통통로일 뿐만 아니라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처음의 성은 흙을 다져 만든 토성이었지만 수백이 흐르면서 여러 차례 복구를 거쳐 골목이 얽힌 돌 성루로 바뀌었다. 구불구불 성벽 안에 배치된 골목들은 얼기설기 교차되었고, 도로에는 청석판 깔았다. 성안은 정교하게 설계되었으며 明나라와 淸나라의 건축물이 겹쳐져 세워졌다.

청암고진은 특산물은 청암두부, 장미사탕, 절인 족발, 쌍화초, 쌀두부 등이다또한  청암고을은 문화적인 특색이 강하다. 불교, 도교, 천주교, 기독교 등의 4종교가 공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항일시기 주은래 부친, 등영초 모친, 이극농 가족 이곳에서 살았으며, 항일시기에  세워진 홍군지휘부, 절강대학 유적지, 소보청교학유적지 등 인문 유적지도 남아있다. 청암고진에는 사찰 9개, 불당 8개, 누각 5개, 사당 2개, 궁전 2개, 다락 1개, 석 패방, 성벽 등 고대 건축물이 줄지어 있다.

 

 

<청암고진 밖의 '周王씨 며느리 劉씨 절효방'>

버스에서 내리면 주차장 바로 앞에 명청 시대의 건물과 같은 고건물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데 청암고진 안이 아니라 밖이다. 그곳에 주왕씨 며느리인 劉씨의 절개와 효를 칭송하는 패방이 서 있다.

 

 

<청암고진 밖 상가>

성밖이긴 하나 성안처럼 도로에 청석판을 깔았고 건물도 성안의 것들과 똑같다. 중앙 원경의 성벽 오른쪽이 청암고진이다.

 

 

<청암고진의 특산물인 절인 돼지 족발>

 

 

<청암고진 밖에서 본 청암고진 외성 담장>

낮은 산을 따라 이어진 외성 담장과 중앙에 정문인 정광문(定廣門)이 있다. 성벽 밖의 호수는 정광호인데 해자 기능을 위해 판 인공호수로 보인다. 정광문(定廣門)명나라 천가년에 세운 청암고진의 군사적 상징물이다. 청나라 순치17년(1660년), 반린귀(班麟貴, 번인귀) 아들인 반응수자(班應壽子)가 부친의 뒤를 이어 정광문을 증설하였다. 청나라 가경3년(1789년) 무인 원대붕(袁大鵬)이 복원하였다.

성루는 문 칸에 처마가 중첩된 나무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청회색 기와이고 진흙으로 마루를 만들었다. 정광문의 성루 벽면에는 성가퀴, 보루가 설치되어 있다. 먼 곳에서 성벽을 바라보면 자태가 웅장하고 넓어 보이는 고대 구이양(貴陽) 남쪽의 가장 중요한 군사방어선으로 '남문을 지키는 집'이라 불리고 있다.

 

 

<청암고진 정문인 정광문과 성안의 패방>

성문 바로 안쪽의 패방은 의례적인 것으로 따로 이름이 있으나 놓쳤다. 패방의 기둥 4개에 각각 앞뒤로 해치를 닮은 귀수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자세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역동적이면서 독특하다. 

 

 

 

 

   <청암고진 안내도>

한글로 설명을 집어 넣었으나 깨진 내용이 있다(고진 내 담장). 크게 보면 원형이지만 남북으로 약간 길게 배치되어 있다. 성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건축들이 있고 보존상태가 좋아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마을 쯤 되겠다.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의 전통복 가게>

명나라 사람들이 만든 성이지만 머리에 큰 관을 쓴 것으로 보아 귀주지역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는 묘족 전통복장일 가능성이 크다. 두번째 사진의 전통복과 정광호 앞에 서 있던 아가씨의 전통복 모두 색깔만 다르지 복식은 같았다.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의 특산품, 쌀두부와 중국식 소세지와 육포>

갈색빛이 도는 왼쪽의 네모난 물건은 쌀두부로 우리가 아는 두부와 많이 다르다. 오른쪽 아래의 둥근 먹거리도 쌀두부와 늘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이곳은 특히 말린 고기(육포)가 발달한 듯 한데 비주얼이 영...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와 원경의 기독교당>

바닥에는 모두 청석판이 깔려있다. 중앙 원경의 빨간 깃대가 꽂혀있는 뒷 건물이 기독교당이다.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의 청암기독교당>

기독교가 청암에 나타난 시기는 민국13년(1924년)으로 가장 늦게 청암에 나타난 종교이다. 비교적 늦게 도입된 탓에 계속 고정된 장소가 없었다. 이를 알고 1987년, 인민정부에서 자금을 투자하여 현재의 기독교 교회당을 세웠다.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 고진 내 성벽(古鎭內城墻)>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의 악기점>

 

 

   <청암고진 남가(南街)의 노점상>

기념품은 허접스러우나 검정 우산에 화려하게 배치한 독특한 발상이 돋보인다.

 

 

   <청암고진 남가(南街)>

 

 

   <청암고진 남가(南街)의 부채가게와 은공방>

청암고진에서 은공예도 유명한지 가게가 여럿 있었고, 가게 밖에서 장인들이 망치로 은을 두드려 은 세공품을 만들고 있었다.

 

 

 

   <청암고진 중앙에 위치한 재신묘(財神廟)>

도광년간에 세워졌고 남가와 뒷골목의 교차로에 있었으나 2013년 원래 위치에 복원하였다. 청암 민간에서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재물신 조공명을 모시고 있다. 1칸 짜리 사당 안에 금박을 입힌 부리부리한 인상의 조공면 신상이 있었다. 

 

 

   <청암고진 북가(北街)의 개인 사당>

중국에서 유명인사의 사당은 더러 보았어도 개인 사당은 처음 보았다. 부부로 보이는 노인 영정사진 밑에 김옥만(金玉滿)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청암고진 북가(北街)의 떡집과 말린 과일가게>

북가(北街)에는 말린 고기와 떡을 파는 곳이 많았다.

 

 

 

   <청암고진 남가(南街)의 趙公專祠(조공전사, 조국주 사당)>

조공의 사당은 귀주 단무(团務)총리 趙國澍(일명 조위삼)를 추모하는 곳으로 청나라  동치년간(1863~1865년), 산 정상에  세운 나무와 벽돌구조의 이진원으로 북쪽을 향해 세워졌고 면적은 923㎡이다. 전체 가옥은 문패방, 현관, 동서 뜰채, 대전, 곁채, 후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용, 봉황, 백수자 등도안이 새겨져 있다.

조국주(趙國澍) 함풍11년(1861년), 귀주 단무총리 재임 시 귀주제독 전흥서의 지지 아래 청암교안을 발동하여 천주교도 진창품 등 4명을 살해하고 천주교당을 불살랐다. 청암교안 발생 후, 淸은 프랑스의 압력에 못이겨 전흥서와 조국주의 죄를 추궁하여 전흥서는 신강으로 유배시키고 조국주는 전쟁터로 내보냈다. 조국주가 전사하자 청나라 정부는 그를 태상사경으로 임명하고 사당을 짓도록 하였으며, 국사관에 명하여 조국주 전기를 만들게 하였다.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의 고풍스러운(!) 화장품 가게>

  

 

  <청암고진 남명청거리(南明淸街)의 귀주본토 쪽염색과 도자기 가게>

 

 

  <청암고진 안에서 본 성 정문인 정광문(定廣門)과 바깥쪽>

 

 

 

   <청암고진 성밖과 정광湖>

 

 

   <청암고진 성밖 정광湖에서 전통복을 입고 있는 여성>

 

 

   <구이양(歸陽) 백화점의 韓식당 메뉴>

 

 

<구이양(歸陽)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에 차창으로 스치며 본 甲水樓(갑수루)>

 

 

<구이양(歸陽) 국제공항>

베이징국제공항은 별 볼일도 없으면서 검색이 까탈스럽기론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듯 하다. 더 별 볼일 없고 규모도 작은 귀양국제공항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동안 드나든 어느 공항보다 불친절하고 마구잡이로 우리를 대했다.

당시에 귀양-인천 간 직항노선을 바로 없앴다가 다시 재개한다고 들었고, 귀양을 다녀온지 정확히 6개월이 지났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뉴스에서는 싸가지 아베의 행동이 불쾌하여 일본 대신 중국으로 관광을 가려 해도 중국에서 항공편을 증설하지 않고 억지를 부린다던데...

  

 

   <귀양 - 인천간 항공 노선도>

귀양을 여행할 당시에 귀양이 속한 귀주성이 삼국시대에 촉한이었다는게 긴가민가 했는데 사진을 보니 맞다. 위쪽은 위나라, 내륙쪽은 촉한, 아래는 오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