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돈의문역사관과 아지오(AGIO) 레스토랑

큰누리 2022. 8. 16. 13:23

박물관마을을 둘러보다 건물 2층에서 경희궁이 들여다보이던 기억이 살아나 돈의문역사관이란 곳을 들어갔다. 그랬더니 정말 예전의 레스토랑 '아지오'였다! 입구 왼쪽에 옛날 간판이 없었다면 물론 연관을 짓지 못했을 것이다. 1층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2층은 비교적 그대로 모습이 남아있거나 보수해서 기억이 새로웠다.

전체적으로 과거 돈의문(서대문)과 주변에 관한 내용들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 중이었는데 작지만 특색이 있어서 좋았다.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돈의문박물관마을'이나 '군산의 근대문화역사의 거리'처럼 그 지역의 특징을 살려서 리모델링한 점이 그랬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의 '돈의문역사관' 구역>

왼쪽의 빨간 표식(40번)이 있는 마을안내소쪽으로 입장해서 한바퀴 둘러보면 된다. 왼쪽 위의 새로 지은 기와집들은 주로 체험관이고, 나머지는 기존의 건물들을 리모델링해서 작은 박물관처럼 꾸몄다. 

보라색 연필로 표시한 중앙 윗부분 건물 5동이 돈의문역사관 구역인데 이중 13번이 주요 박물관이자 과거의 아지오였다. 12번은 유적전시실(실제 경희궁 궁장 발굴 유적), 14번은 과거의 한정, 16번은 교육관이다.

 

 

<돈의문역사관 입구(과거의 아지오) 안팎> 

윗사진은 밖에서 본 모습, 두번째 사진은 마당 안에서 본 모습으로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아지오 AGIO'란 글귀가 남아있다. 내 기억으로 지금과는 다른 대문을 들어서면 문밖에 큰 우유통과 요리사 모자를 쓴 인형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것을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파트라슈가 끄는 우유 배달통' 같다고 했었다. 세번째 사진은 현재의 아지오(돈의문역사관)와 그 앞 건물 한정의 배치도이다.

 

 

 

 

<돈의문역사관 1층 전시실>

1층은 '돈의문 일대의 역사'가 주제이고, 2층은 '두 동네(교남동과 새문안 동네)의 기록과 기억'이다.

 

 

<돈의문 안팎>

돈의문은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 안으로는 여경방, 인달방, 적선방이 밖으로는 반송방, 반석방이 편제되었다. 이중 반송방은 일대에 반송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주변의 물이 맑고 경치가 수려하여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였다.

 

 

<돈의문역사관 1층 전시실, 반송방사람들>

반송방은 주거 여건이 좋고 도성과 가까웠으며 의주나 마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일찍부터 민가가 많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월암(月巖) 바위 주변은 지대가 높아서 반송정, 서지 등 돈의문 밖에 있는 한양의 명소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조망이 좋았다.

사진 아래의 책 중 왼쪽은 김좌명이 쓴 「귀계유고」, 오른쪽은 남종현이 쓴 「월암문고」로 주변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특히 김좌명의 「귀계유고」에는 그가 반송방에 살았을 때 자신의 집과 주변에 있던 22명의 집에 대한 기록이다. 그중에는 권율장군, 일본 통신사로 다녀온 황윤길 등 여러 명사의 집도 포함되어 있다. 

 

 

≪경희궁의 역사≫

임진왜란 중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자 광해군은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복구했다. 인경궁과 정원군 집터에 경덕궁(現 경희궁)도 지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나서 경덕궁은 현종대까지 창덕궁 수리 기간 동안 임시로 머무는 궁으로 사용되었다. 경덕궁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덕궁을 적극 활용하였고, 영조는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고치고 19년이나 거주했다.

그러나 고종대에 이르러 전각을 헐어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쓰면서 궁의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잠업 육성을 위해 빈터에 뽕나무를 심어 뽕나무 궁궐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지으면서 아예 궁의 이름조차 사라졌다.

 

 

<돈의문역사관 1층 전시실,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서궐 경희궁>

오른쪽 위의 '어제창덕궁경희궁'은 영조가 당시 실질적인 법궁 기능을 하던 창덕궁과 상응하는 위상을 경희궁에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오른쪽 아래 그림 '경현당어제어필화재첩'으로 영조가 경희궁 경현당에서 왕세자를 데리고 승정원과 홍문관 관헌들에게 술을 내리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송규태 작가의 서궐도(西闕도)>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인 서궐도안을 기본으로 동궐도의 채색 특징을 참고하여 근래에 그린 그림이다. 경희궁 전각과 문은 약 190여개이다.

 

 

<개항 이후 돈의문 일대의 변화, 전차 등장>

인천으로 들어온 서양인들은 육로로 한강에 와서 배를 탄 후 양화진을 거쳐 돈의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장 빨랐다. 이에 따라 경운궁(덕수궁) 인근 정동에 각국 공사관들이 들어서고 1899년에는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개통되었다.

1901년에는 돈의문에서 마포까지 전차가 연장되었고, 돈의문 바깥에 경인철도 서대문정거장이 설치되었다. 돈의문이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교통로의 기점이자 종점이 됨에 따라 주변에 외국 공관과 교회, 외국인들의 주거, 교육, 의료 시설들이 들어섰다.

 

 

<1880년대 한국을 소개한 외국서적>

1880년대 이후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기행문이나 견문기를 많이 썼다. 잘못된 선입견을 가진 이들도 있었으나 아직 세계에 덜 알려진 조선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버튼 홈즈의 서울 가는 길>

엘리어스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 1870-1958)는 여행기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가이다. 그는 1901년 부산에서 인천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고, 서울 곳곳을 여행하면서 귀중한 사진과 기록을 많이 남겼다. 사진은 1번~5번까지는 인천에서 서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 6번부터는 서울에서 본 모습들이다.

 

1. 제물포 항구→ 2. 미국제 기차→ 3. 서울의 기차역→ 4. 서울에 도착하여→ 5. 스테이션 호텔6. 미국인 측량기사→ 7.최근의 패션→ 8. 돈의문과 전차→ 9. 시내전차→ 10. 경희궁

 

 

≪일제에 의해 사라진 한양도성 성벽과 성문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된 후 일제는 한양도성을 철거하기 위해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했다. 도성 안팎을 왕래하는 교통이 빈번해진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일본 태자의 방한을 앞두고 경비, 위생상의 안전도모가 그 목적이었다. 성벽처리위원회는 1908년 9월까지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소의문 주변 성벽을 철거한 뒤 남은 업무는 타 부서에 넘기고 해산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용산 일대를 경성부에 포함시키면서 도시의 경계를 표시하는 성벽과 성문의 기능이 사실상 사라졌다. 이어 1914년에 소의문(서소문), 1915년에 돈의문(서대문)을 헐고 목재는 단돈 205원(쌀 17가마)에 경매로 팔아버렸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보존하면서 돈의문만 철거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들이 두 문으로 들어온 것과 러일전쟁 후 의주로로 연결되는 문밖 교통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돈의문이 사라진 이후의 주변 건물들>

 

 

<경희궁 궁장(담장)>

경희궁은 고종대 경복궁 중건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과 궁장들이 파괴되었다. 경희궁 궁장의 전체 길이는 약 1.8km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있는 구간은 북서쪽 지역으로 종로구 내수동에 있다. 사진은 아지오(돈의문 역사관) 1층과 연결되어 있는 경희궁 남쪽 구역으로 최근에 처음 발견되었다.

 

 

<돈의문역사관 주변 역사문화 유적들>

 

 

≪아지오 AGIO의 기억≫

아지오 AGIO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새문안 동네 명소 중의 한 곳이었다. '앤티크 인테리어' 전문가 부부가 만들어 운영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어서 오래된 가구와 소품들로 꾸민 실내는 시간의 층들이 쌓인 새문안 동네 골목과 장 어우러져 차분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중략--

아지오 AGIO는 신문로 2가 7-33번지와 34-2번지 이웃한 두 필지의 집들을 연결해 하나로 사용했던 음식점이었다. 한옥골목의 끝집인 7-33번지에는 1932년에 지어진 한옥이 있었다. 이 한옥은 1967년 지금의 벽돌로 쌓은 벽체에 평슬라브를 얹은 2층집을 새로 지으면서 철거되어 없어졌다.

7-33번지와 바로 이웃한 34-2번지의 현재의 건물은 1955년에 지어졌다. 34번지 전체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미국인 존 카바노프가 소유했었고, 1955년 국유지로 몰수되기 전까지 일본인 나카야마 키와오의 소유였다. 1955년 불하되면서 여러 필지로 분할될 때 현재의 집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략--

 

 

<돈의문역사관 2층의 '아지오'의 유물들>

창너머로 경희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여름이라 나무에 가려 잘 안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과거 '아지오' 레스토랑의 흔적을 찾기 힘든데 이곳과 발코니 부분은 잘 남아있다. 특히 벽의 나무 선반에 있는 석유램프 4개와 책상 위의 간판을 짚은 요리사는 옛날 그대로이다! 요리사 조형물은 당시에는 문밖에 우유통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돈의문역사관 2층 전시실>

 

 

<돈의문역사관 2층의 사라진 교남동과 11채 한옥 흔적들>

교남동이 재개발이 확정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골목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쓰레기들이 쌓였다. 이와 달리 기존 집을 철거하고 근린공원을 계획했던 새문안 동네는 골목과 집들을 살려 재생하는 방향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교남동의 온전한 부재를 골라 새문안 동네에 옮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중하게 11채의 한옥이 정해졌지만 새문안 동네 계획이 바뀌면서 결국 11채의 한옥들도 철거되었다. 전시장은 유물들은 교남동의 집 부재와 유물들이다. 

 

 

 

<2013년 9월 25일의 교남동>

홍남파가옥과 딜쿠샤 답사를 갔다가 촬영한 교남동 재개발을 위해 철거할 당시의 모습들이다. 월암바위도 교남동 재개발구역에 있었는데 살아남았으려나?   

https://blog.daum.net/hhl6103/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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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역사관 2층 발코니 창밖으로 본 남쪽과 새문안 동네 지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본 돈의문역사관 2층 발코니> 

 

 

<새문안 동네와 교남동 일대 지도와 개발되기 전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

두번째와 세번째 사진의 미니어처는 중앙의 빨간 지붕으로 된 5각형 안에 있던 개발전 모습들이다. 현재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아래로 언덕없이 매끈한 내리막으로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지도 오른쪽은 새문안 동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