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해남 대흥사

큰누리 2023. 11. 13. 04:28

 

 

≪해남 대흥사≫

유네스코세계유산 : 산사, 한국의 승지선원 7대 사찰 중 하나 ( 2018.6. 등재)

지정 : 사적 제508호 / 명승 제6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위치 :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大興寺)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해남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大屯)산,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으나,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과 관련하여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진정국사 천책(天頙1206~?)스님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스님의 의발이 전해지고,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가 배출되면서 선(禪)과 교(敎)를 겸비한 팔도의 종원으로서 자부하였다. 또한 1789년에 정조대왕으로부터 표충사(表忠祠) 편액을 하사받아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게 되었다.

 

사찰 경내는 북원, 남원, 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과 응진당,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등이 있고, 남원에는 천 분의 부처님(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을 모신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48호)과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등이 있으며, 별원에는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그리고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3층석탑(보물 제301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등의 성보문화재가 있다.  (현지 안내문)

 

 

<대흥사 입구의 부도전>

부도(浮屠)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팔각원당형, 종형 등이 있으며, 절 경내에 있는 불탑이 부처님의 사리나 불상· 경전 등을 보관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탑비는 비문 등을 새겨 부도 근처에 세운다. 그래서 흔히 부도전에는 부도와 탑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이곳 부도전에는 부도 56기와 탑비 17기가 모셔져 있는데 생몰년이 확인되는 것은 모두 조선 후기 스님의 부도와 탑비이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역대 종사와 강사들의 부도와 탑비가 봉안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

 

대흥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놀라울 정도로 큰 부도전이 있고 특이하게 문까지 따로 설치되어 있다. 대부분 부도와 탑비가 섞여 있지만 끝부분은 주로 탑비들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문을 보고 누구의 부도인지, 서산대사의 부도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문이 잠겨서 밖의 안내문만 보고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오래전에 송광사에서 큰 부도전을 본 이래 이렇게 큰 부도전은 처음이었다.

 

 

≪해남 대흥사의 특별한 전각들≫

일주문은 입장하는 과정에서 놓쳤다. 해남 대흥사는 유네스코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승지선원' 7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찰들은 나름 특색이 있지만 일단 보물이나 국보 등의 문화유산이 많다. 하지만 대흥사는 상대적으로 사찰 자체에 대형급 문화유산은 적은데 왜 7대 사찰에 포함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일반적인 사찰에 비해 특별한 점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남원과 북원으로 나뉜 것도 그렇고, 사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있는 것도 그렇다. 가장 특별한 점은 사찰 안에 왕의 편액까지 받은 표충사라는 유교적 개념의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안에 봉안된 분들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스님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세운 관음 33 응신전이나 보현전, 문수전도 일반 사찰에서는 흔히 보기 쉬운 전각은 아니다. 

 

 

<해남 대흥사 해탈문>

보통 사찰은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사천왕문)이 있는데 대흥사는 특이하게 해탈문이 있다. 따라서 문 안에는 지국천왕 같은 사천왕상이 아닌 보현동자, 문수동자상이 있다. 보현동자는 코끼리를, 문수동자는 사자를 타고 있다. 

 

 

<해탈문을 들어서서 본 해남 대흥사>

사찰 너머로 아름다운 두륜산 봉우리가 보이는데 이 방향은 주로 남원과 별원이다.

 

 

<대흥사 북원, 남원의 전각들>

강 건너편 아래인 북원에는 대웅보전, 명부전, 청운당과 백설당, 응진당, 삼층석탑 등이 있고, 위쪽 남원에는 범종루, 가허루, 천불전, 관음 33 응신전과 스님들의 생활공간들(용화당, 봉향각,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이 있다. 별원에는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표충사 구역에는 호국문과 예제문, 표충사, 의중당, 보련각, 어서각, 표충비각, 조사전 등이 있다.  

 

 

<해남 대흥사 범종루와 연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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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북원의 전각들≫

강 건너편 아래인 북원에는 대웅보전, 명부전, 청운당과 백설당, 응진당, 삼층석탑 등이 있다.

 

<대흥사 북원 진입로인 침계루와 심진교>

아래를 흐르는 강은 금당천이다.

 

 

<심진교, 침계루에서 본 북원 좌우>

왼쪽은 백설당이고, 오른쪽은 대향각이다.

 

 

<대흥사 북원 진입로 심진교와 침계루>

왼쪽은 심진교와 침계루이고, 오른쪽은 침계루 아래에서 본 대웅보전이다.

 

 

<대흥사 북원 대웅보전과 내부>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불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뒤에 있는 탱화는 1901년(대한제국 광무5년)에 조성한 것이다. 이 건물은 1667년(조선 헌종 8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조선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장식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계단석 소맷돌 양쪽에 조각된 사자머리 한 쌍은 전각 수호의 뜻을 담고 있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걸었다. 하지만 그후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

 

 

<대흥사 대웅보전 아래의 석등과 대웅보전에서 본 북원 출입문(침계루)>

 

 

<대흥사 대웅보전을 좌우에서 본 모습>

왼쪽은 대웅보전과 동쪽의 대향각, 오른쪽은 대웅보전과 서쪽의 백설당이다.

 

 

<대흥사 명부전과 내부>

명부전은 지장보살상을 주불로 봉안하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시왕(十王)상과 시봉을 드는 10동자, 판관과 녹사 각각 2구, 문 입구에 장군 2구를 봉안한다.

 

 

<대흥사 응진당과 산신각>

특이하게 응진당과 산신당이 같은 건물에 붙어있다.

 

 

<대흥사 응진당과 내부>

응진당은 나한전(羅漢殿), 영산전(靈山殿)이라고도 하며, 삼존불(석가모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과 16나한상, 16나한도가 봉안되어 있다.

 

 

<대흥사 산신각과 내부의 산신, 독성>

산신각은 우리나라 토착 민간신앙인 산신을 불교에서 수용하여 봉안한 전각으로 호랑이와 산신을 봉안한다. 포괄적인 전각인 삼성각에는 산신 외에 칠성과 독성을 함께 모신다. 칠성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이고, 독성은 스승없이 홀로 도를 깨달은 나반존자이다.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1월에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12cm 높이의 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양식이 이 지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층석탑(동쪽)에서 본 대흥사 북원의 전각들>

왼쪽부터 대향각, 대웅보전, 응진당과 산신각, 삼층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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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남원의 전각들≫

대흥사 남원에는 범종루, 가허루, 천불전, 관음 33 응신전 등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전각은 많지 않다. 대신 스님들의 생활공간들(용화당, 봉향각,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이 천불전과 관음 33 응신전 주변에 많이 있다. 

 

<대흥사 남원의 가허루와 천불전>

가허루 문지방은 특이하게 곡선이다. 오른쪽은 가허루에서 본 천불각이다.

 

 

<대흥사 남원의 천불전과 분합문 꽃창살>

천불전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이 계시다, 혹은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 사상을 나타내는 천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1811년(순조 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다포계 팔작지붕인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건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대웅보전과 함께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 3칸의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로 꾸며져 있다.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는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은 경주 불석산의 옥돌로 조성한 것으로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로 표류했다가 다음 해인 1818년에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된 것이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에는 '日'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4년에 한 번씩 천불의 가사를 바꾸는데, 부처님의 그 가사를 개인이 소장하면 마음 속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대흥사 남원의 천불전 내부>

불상들도 대단하지만 지붕도 아름답다!

 

 

<대흥사 천불전 좌, 우의 건물들>

천불전을 앞에서 보았을 때 왼쪽에 봉향각(사진 右)이, 오른쪽에 용화당(左)이 있다. 봉향각은 단층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5칸이며 스님들의 요사체로 사용되고 있다. 용화당은 1813년(순조 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대사가 교육을 위한 강당 겸 선방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 9개의 기둥 가운데 왼쪽 여섯 번째 기둥만 네모이고 나머지는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을 두었다.

 

 

<대흥사 천불전 옆 건물들>

왼쪽 사진은 용화당과 관음 33 응신전이고, 오른쪽 사진은 문으로 들여다 본 정진당, 적묵당, 세심당이다. 뒤쪽의 일로향실은 제대로 안 보이는 듯...

 

 

<대흥사 관음 33 응신전>

 

 

<대흥사 호국대전(특별전 전시장), 사리탑>

 

 

<대흥사 보현전, 호국대전(특별전 전시장), 문수전>

어느 절이나 기타 한옥에서도 궁궐을 제외하면 건물 1개가 이렇게 큰 경우는 흔치 않은데 엄청나다. 현판도 따로 없고 어딘가에 중앙의 대형 건물이 호국대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부에서 무슨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일반적인 전각을 둘러보는 것도 시간이 빠듯해서 포기했다. 왼쪽은 보현전, 오른쪽은 문수전 현판이 걸려있지만 개방구역은 아닌  듯했다.

 

 

<대흥사 표충사 구역>

이 부근 어딘가에 관음전이나 대적광전이 있었을 법한데 놓쳤다. 주차장의 버스로 집결하는 시간에 쫓겨 표충사에서도 표충사와 표충비각만 뛰다시피 하며 훑어보고, 100m 달리기를 하듯 주차장으로 뛰어야 했다.

 

 

<대흥사 표충사 호국문>

유교식으로 치면 사당이나 서원, 향교 등의 외삼문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대흥사 표충사 호국문 안쪽 구역>

사진 왼쪽 앞의 의중당은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인근 6개 군의 수령들이 봄, 가을에 표충사에서 제향을 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이다. 오른쪽 건물은 보련각이다. 안쪽 담 중앙에 내삼문에 해당하는 예제(禮齊)문 일부와 표충사, 표충비각이 보인다. 

 

 

<대흥사 표충사 예제(禮齊)문>

유교 사당이나 서원, 향교의 대성전 출입문인 내삼문 같은 용도이다. 

 

 

≪대흥사 표충사≫

왼쪽부터 조사전, 표충사와 어서각, 표충비각과 2개의 비석이다. 표충사(表忠祠)는 1788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이 직접 쓴 表忠祠 편액이 하사되었다. 표총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1520~1604)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전란에서 공적을 세운 사명당 유정스님과 뇌묵당 처영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조선후기에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은 이곳 표충사와 1794년(정조 18년)에 편액이 하사된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酬忠祠)가 있고,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1743년(영조 19년)에 편액이 하사된 밀양 표충사가 있다. 

 

 

<대흥사 표충사(어서각) 내부>

내부에 뇌묵당 처영, 서산대사, 사명당 유정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대흥사 표충사(어서각)와 조사전>

코앞에 조사전을 두고도 독촉 전화에 쫓겨 포기하고 버스로 달려갔다, 아깝다! 현지 안내문에 의하면 조사전은... 표충사 왼쪽에 있으며 3단 기단 위에 세워진 전각이다. 한글로 된 '조사전' 편액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514년에 대흥사를 중건한 아도조사를 비롯하여 대흥사의 역대 조사 16명을 그린 3폭(6명 1폭+5명 2폭)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표충비각과 내부의 비석>

서유린(1738~1802)이 1791년(정조 15년)에 지은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명(西山大師表忠祠紀跡碑銘」과 연담유일(1720~1799)스님이 1792년(정조 16년)에 지은 「건사사적비명(建祠事跡 碑銘」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이다. 그 볼 것 많은 사찰, 그것도 쉽게 가기 힘든 곳을 모처럼 들렀는데 시간에 쫓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