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2(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큰누리 2025. 1. 23. 18:05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 기간 : 2024.11.30(토) ~ 2025.3.3(월)

전시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부제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실레까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내가 왜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답은 그림 그 자체에 있다"

1886~1980. 빈 응용예술대학교에서 수학하다 1910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표현주의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 전후에는 6년 가량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을 돌며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나치의 압박으로 1938년 런던으로 망명하여 작품활동을 했다.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전람회'(1908)에서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집에 수록된 오스카 코코슈카의 인물 스케치≫

<파울 세어바르트 작품집 '사람의 얼굴'>

 

<헤르바르트 발덴 작품집 '사람의 얼굴'>

 

<아돌프 로스 작품집 '사람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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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얼굴(오스카 코코슈카)>

 

<촛불 아래 두 사람(오스카 코코슈카)>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오스카 코코슈카)>

왼쪽은 '양쪽에서 본 자화상', 오른쪽은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이다. 완성도는 비슷하지만 왼쪽 그림은 오른쪽 그림을 위한 에스키스이거나 좋아서 오른쪽 그림에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오스카 코코슈카)>

 

<'피에타'-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오스카 코코슈카)>

 

<목화솜 따는 소녀(왼쪽, 오스카 코코슈카)>

1908년의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로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에 발표한 루돌프 칼바흐의 포스터(오른쪽,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에 전시)와 비교해 보았다.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오스카 코코슈카)>

 

<헤르만 슈바르트발츠 2(오스카 코코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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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오스트리아의 화가로 도나우강변 툴른에서 출생. 철도청 고급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15살 때 매독을 앓던 아버지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죽자 무덤덤한 어머니를 보고 평생 어머니를 혐오했다. 16살에 빈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하였고, 평생 스승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다. 학교 중퇴후 1911년 4월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이 좋지 않았고, 1902년에는 미성년 소녀를 그린 죄로 체포되었다. 1915년 유디트 하름스와 결혼했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 징집되었다. 1918년 봄에 연 전시회에서 작품이 큰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아내가 죽은 지 3일만에 실레도 2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다. 

 

<긴 머리를 한 자화상(에곤 실레)>

17세 때(1907년)에 그린 자화상.

 

<에곤 실레 사진들(1914년경, 안톤 요제프 트르치카)>

 

<1917년경 에곤 실레 자화상(프리츠 보트루바 재작업)>

에곤 실레가 자기의 얼굴을 조각한 독특하고 유일한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1965년에 프리츠 보트루바가 주조한 7점의 청동 작품 중 하나이다.

 

<소녀의 초상(에곤 실레)>

1906년(16세 때)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으로 제작.

 

<국화(에곤 실레)>

비엔나 분리파의 장식 미술과 일본 목판화의 특징이 엿보이는 1910년 작품.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에곤 실레)> 1908년.

 

<스스로를 보는 이 2-죽음과 인간(에곤 실레)> 1911년.

 

<시인(에곤 실레)> 1911년.

 

<계시(에곤 실레)> 1911년.

 

<어머니와 아이(에곤 실레)> 1912년.

 

<어머니와 두 아이 2(에곤 실레)> 1915년.

 

<애도하는 여성(에곤 실레)> 1912년.

 

≪상실과 고립을 그린 에곤 실레의 검은 풍경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의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겨울나무(에곤 실레)> 1912년.

 

<골고다 언덕(에곤 실레)> 1912년.

 

<도나우강의 슈타인 마을 2(에곤 실레)> 1913년.

 

<블타바 강가의 크루 마우-작은 마을4(에곤 실레)> 1914년.

에곤 실레의 어머니 마리 실레의 고향인 남부 보헤미아의 크루마우, 현재의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지역을 그린 작품으로 실레는 이 지역 풍경화를 많이 남겼다.

 

<작은 마을 3(에곤 실레)> 1913년.

어머니 마리 실레의 고향인 남부 보헤미아의 크루마우 블타바강 가의 마을 풍경을 자신의 기억과 조합하여 표현.

 

<판자 지붕집(에곤 실레)> 1914.

오래된 집 2를 위한 습작, 크루마우(체스키 크룸로프) 지역의 오래된 집을 주변의 건물들을 없애고 가상의 풍경으로 표현.

 

<에곤 실레의 누드 드로잉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의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에곤 실레의 그림에 항상 붙어다니는 수식어 중 하나인 '야한 포즈의 누드' 때문에 전시장에서 촬영한 작품의 상당수를 게재하지 않았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야하거나 난잡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포즈가 상당히 특별'해서 난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기준으로 자체로 걸러낸 정도가 아래에 게재한 것들이다. 

 

 

<프란츠 하우어의 초상(에곤 실레)> 1914년. 드라이포인트 에칭

 

<에리히 레더러, 폴디의 초상(에곤 실레)>

모델의 자세와 모습이 비슷하여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왼쪽은 1915년에 그린 '손을 얼굴에 대고 있는 에리히 레더러의 초상'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수집가인 세레나 레데러의 딸이다. 에리히 레데러는 실레의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오른쪽은 에곤 실레의 모델이었던 폴디라는 여성을 1914년에 그린 것이다. 

 

<팔에 기대어 엎드린 누드(에곤 실레)> 1913년.

 

<속옷, 재킷, 모자를 걸친 젊은 여인(에곤 실레)> 1914년.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에곤 실레)> 1910년.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에곤 실레)> 1912년.

1911년부터 에곤 실레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을 수채화로 그린 것이다. 실레가 1915년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결심하면서 헤어졌다.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에곤 실레)> 19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