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산청 남사예담촌

큰누리 2026. 2. 26. 06:08

≪산청의 볼거리들≫

남사예담촌 현지 안내문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 '삶의 지헤가 소통하는 마을' 로 표현하고 있다. 가끔 이용하는 여행사에서 올라온 1박 2일 산청 답사를 보고 신청은 했지만 이유는 순전히 날짜가 맞은 게 가장 컸고, 동의보감촌 외에는 알거나 들은 바가 없는 곳들이었다. 산청 예담촌, 수선사와 정취암, 성철스님 생가(겁외사), 동의보감촌, 심지어 숙소로 사용한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선비생활관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산청이라면 그냥 깊은 산골 정도로만 알았는데 훌륭한 볼거리가 많은 것이 놀라웠고, 엑스포 때문에 만든 동의보감촌이나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의 규모도 놀라웠다. 이렇게 외진 곳에 과연 사람들이 보거나 숙박을 하러 올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위에 언급한 볼거리는 무엇 하나 놓칠 게 없었는데 특히 남사예담촌의 경우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인데 다양한 전통한옥들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더 인상에 남았다. 몇 년 전에 다녀온 충청남도 아산의 외암마을 돌담이 인상에 남았는데 남사예담촌은 적어도 외암마을보다 자연적인 돌담이 탁월했다. 결론적으로 산청여행은 모두 훌륭한 볼거리였고, 심지어 음식도 경상도 하면 떠올리는 '맛없다'는 인식과 달리 맛있었다(쌀밥은 별로...). 

 

PS : 2024. 9.21~22일에 이곳을 다녀오고 2025. 3. 31에 국립민속박물관 1차 국내 답사지로 산청이 선정되었다. 마침 중국 서안답사와 겹쳐 나는 신청을 포기했는데 불행히도 2025년 3월 25일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 때문에 국 산청 답사는 취소되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겠지만 당시의 화재 피해가 너무 커서 아직도 많은 곳에 여파가 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산청 남사예담촌≫

지리산의 정기가 동으로 뻗은 곳에 예(禮)를 상징하는 니구산(尼丘山)과 사수(泗水)가 닿아 만든 반달 모양의 남사예담촌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숫룡의 머리를 한 마을 앞 당산과 암룡의 머리를 한 니구산이 서로의 마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雙龍交媾)를 이루는 곳에, 연꽃 모양의 산이 둘러싸고 있어 맑고 어진 기운이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신의와 청렴을 지키는 선비의 고장답게 단아한 기품과 예절을 품고 있는 전통 한옥과 옛 토담, 효심으로 심은 수령 700년이 넘는 나무와 수많은 역사문화자원들이 한폭의 동양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세풍광이다. 옛것을 통해 겸손과 겸양의 지혜를 배워 감사의 마음을 알게 하는 남사예담촌은,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한국인의 멋과 맛을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

 

<가장 먼저 들린 남사리 기산국악당 전체 외관>

사진에서도 폭우가 느껴진다. 우리가 도착한 첫날(24.9.21)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기산국악당을 먼저 둘러보고 마침 공연중이라 관람한 후 강 건너편의 남사예담촌으로 갔다. 강한 비 때문에 참가자와 주최측이 협의를 한 결과 이틀째 코스 중 대원사계곡길과 대원사를 남사예담촌을 제대로 다시 보는 것으로 바꾸었다. 덕분에 첫날 비 때문에 제대로 못본 전통가옥과 마을을 꼼꼼히 둘러 볼 수 있었다. 

 

≪기산 박헌봉선생 생가 기산국악당≫

기산국악당은 국악 교육의 선각자 박헌봉 선생(1906~1977)의 생가이다. 선생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6세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를 거쳐 중동중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진주 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풍류와 민속학을 연구하고, 2년 후 다시 상경하여 정악전습소, 조선 성악연구회, 조선 가무연구회에서 정악, 아악풍류, 경서도 가무 등 국악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 조선악부에서 민족음악 진흥을 꾀하다가 광복이 되자 국악 건설본부를 창설하는 등 생애 전반기에는 국악의 부흥과 계몽에 힘썼다. 

1960년 민속학 교육을 위한 최초의 사립국악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이후 국립극장 운영위원, 한국 국악협회 이사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 등 중·후반기에는 국악의 이론가 및 교육가로 국악진흥에 헌신하였다. 저서 <창악대강>을 통해 국악에 대한 열정과 혼을 후세에 남겼으며, 평생을 국악진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다.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산관, 교육관, 전시관을 건립하여 기산국악당이라 이름 지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인데 왜 나는 한번도 이름을 들은 적이 없을까? 그만큼 음악, 혹은 전통음악에 무지했다는 증거려니...

 

<기산 박헌봉선생 생가 기산국악당>

관람 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는 ~오후 5시)

관람료 : 무료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명절

주의사항 : 음주, 흡연, 고성방가, 위험물 소지 금지

 

<산청 남사리 기산국악당>

 

<산청 남사리 기산국악당의 토요상설공연>

운이 좋게 시간이 맞아 훌륭한 전통공연을 볼 수 있었다. 동영상도 촬영했지만 최근에 티스토리에서 모든 동영상을 삭제한다고 해서 생략했다. 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바뀌더니 이번엔 동영상 삭제이다. 이러다 다음의 블로그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닌지...

 

<기산국악당 뒷뜰에서 본 송원정(松園亭)> 

 

<뒤의 대밭에서 본 산청 기산국악당>

전반적으로 산에 둘러싸인 평지의 남사리의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사진 왼쪽에 泗水가 있고, 그 건너편에 남사예담촌이 있다.

 

<산청 기산국악당 뒷뜰의 배롱나무와 대로 만든 풍경>

 

<산청 기산국악당 뒷뜰의 대밭극장>

날이 좋으면 이곳에서 야외공연을 하는 듯하다.

 

<기산국악당 송원정(松園亭)>

송원정(松園亭)은 기산국악당의 오각형 정자인데 각 기둥마다 국악음계 '宮-商-角-緻-羽'가 새겨져 있고, 벽에는 현판이 걸려있다.

 

<기산국악당 송원정(松園亭)에 걸린 시와 글들>

김흥신의 시 '대바람 소리'와 홍윤식의 '기문', 박목월의 축시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과 산청 아리랑 등을 새긴 글이 걸려있다.  

 

<산청 남사예담촌 안내도>

고가들이 즐비한 대단한 마을이다! 각종 비와 고목들도 많은데 공간 부족으로 주로 전통가옥과 재실, 정자 위주로 표기했다.

 

<남사리 기산국악당쪽에서 본 남사예담촌 사효재> 

 

<폭우가 쏟아지는 남사리의 강>

사수(泗水)인 듯...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여행 중에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쨌거나 이 폭우 덕분에 다음날의 대원사와 계곡 탐방에서 남사예담촌 전통가옥으로 바뀌어 남사마을을 제대로 둘러 볼 수 있었다. 

 

<남사예담촌에서 본 기산국악당>

 

<남사예담촌의 이정표>

 

<남사예담촌의 돌담길>

이 방향은 좀 밋밋하지만 마을 안쪽의 기와를 인 흙담이 정말 아름답다! 덩굴식물로 뒤덮인 흙담은 전통가옥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남사예담촌의 옛 담장은 주로 담쟁이덩굴, 사위질빵, 푼지나무 등의 덩굴식물로 덮여있다.

 

<산청 남사예담촌 사효재(思孝齋)>

사효재(思孝齋)는 1706년(숙종 32) 피접 중인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마당의 수령 520년 향나무는 사효재를 짓기 전에 있었으며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옆에서 본 남사예담촌 사효재(思孝齋)와 향나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점은 왜 이 사효재 바닥(마당)을 하필이면 모두 시뻘겋게 칠을 했는지 몹시 거슬렸다. 이어 들린 이씨고가 마당이 물바다 같아서 운동화가 모두 젖을 정도였는데 이곳도 그래서 방수차원에서 칠을 한 것일까? 

 

<산청 남사예담촌 사효재(思孝齋)의 당호들>

전면의 방 뿐아니라 문에도 당호들이 붙어있다.

 

<사효재(思孝齋)에서 현지 해설사의 해설을 듣는 일행들>

두 번째 사진 속 마당의 나무가 수령 520년의 향나무이다.

 

<남사예담촌 사효재(思孝齋) 뒤의 사당 '경무공 이제부조묘'>

사효재의 주인공인 영모당 이윤현을 기리는 사당은 안내도를 보니 사효재 앞에 있는 영모재였다. 사효재 뒤에 있는 사진 속의 사당은 안내도에 '경무공 이제부조묘'라고 되어 있다. 개국공신 이제는 알겠는데 '부조묘'는 무슨 뜻인지 처음 듣는 말... 

 

<남사예담촌의 이제 개국공신 교서비(李濟 開國功臣 敎書碑)>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이제에게 태조가 1392년 10월에 개국공신 일등에 봉하며 내린 개국공신 교서를 비석에 새긴 것이다. 교서( 敎書)는 국왕이 발표하는 문서로 조서(詔書)라고도 한다. 수량은 1축으로 가로 94.5cm, 세로 32.5cm이며 실물이 유일하게 남아 전하는 조선개국공신교서이다. 1999년 6월 19일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6월 27일 국보로 승격되었으며, 국립진주박물관에 원본을 보관중이다.

 

<남사예담촌의 이제 개국공신 교서비 앞의 여사정(餘沙亭)>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에서 본 입구의 부부 회화나무>

수종 회화나무, 수령 320년.

선비나무(學者樹)로 불리는 회화나무 두 그루가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리며 자랐고, 부부가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부부나무로 불린다. 중국 周나라 때 회화나무 아래 삼공이 모여 정사를 논의한 것에서 유래되어 '학자나무'라고도 불린다.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는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에 세운 전통적인 남부지방 사대부 가옥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사랑채, 외양간,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 모양이다. 안채는 앞면 7칸, 옆면 3칸 규모이며, 남부지방에서 가장 흔한 일(一)자 모양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나, 이씨고가의 사랑채는 안채처럼 주거 용도로 쓰였다.

사랑채의 내부는 안채의 내부와 비슷한데 지붕 아래에 방을 두 줄로 배열하여 앞쪽으로는 생활하는 공간을 두고, 뒤쪽으로는 생활용품이나 가제도구를 보관하는 공간을 둔 겹집으로 꾸몄다. 사당은 담장을 둘러 독립적으로 배치하였다. 사당은 안채와 부엌에서 멀리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고가에서는 특이하게 가깝게 두었다.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사랑채>

아래 오른쪽 사진은 사랑채와 이어진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것인지, 아니면 마당의 배수에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당에 이 정도로 비가 고이면 문제가 심각하다. 사랑채와 안채 마당에 네모난 넓은 돌받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빗물에 마당이 자주 잠기는 듯하다.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안채와 곳간>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사랑채 옆면에서 본 외양간과 문>

 

<안에서 본 산청 남사예담촌 이씨고가 대문>

 

<산청 남사예담촌 도로 밖의 정려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