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영주 무섬마을 전통가옥과 외나무다리

큰누리 2025. 10. 26. 20:29

 

영주 무섬마을≫

무섬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처럼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나가 육지 속의 섬처럼 보이는 물돌이 마을이다. 마을 이름인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이며, 원래 '물섬'이라고 불렸다. 중국 섬계 지역의 지형과 비슷하다고 하여 섬계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1666년 박수(朴檖)가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하고 이곳에 은둔하여 만죽제를 짓고 처음 터를 잡았고, 박수의 증손녀와 혼인한 김대(金臺)가 들어와 살면서 반남 박씨 가문과 선성 김씨 가문 사람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선비와 관리를 배출하였고 부자가 많았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도 120여 가구에 500명 이상이 살았을 만큼 번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 큰 홍수로 마을의 절반 정도가 사라졌지만 해방 전까지는 100여 가구가 살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많은 주민이 도시로 떠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0년대에 전통마을로 지정되고 정비가 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 약 40여 개의 전통가옥이 남아있는데 이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 사대부가 가옥이며, 역사가 100여 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자형 전통가옥이 많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있는 해우당(국가민속문화유산), 조선 현종 7(1666)에 박수가 지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죽재(국가민속문화유산) 등이 대표적이다.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던 외나무다리는 마을의 상징물인데 다리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하여 건넜다. 과거에는 장마 때마다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 매년 새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농민이 함께 공부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본거지로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었다. 6.25전쟁 때에는 좌익과 우익이 공존한 마을이었고,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 독립 유공자만 5명에 이른다전통한옥체험은 김욱 가옥, 김천한 가옥, 김태길 가옥, 김한세 가옥, 김한직 가옥, 김한철 가옥, 만죽재고택, 박원서 가옥, 박정우 가옥, 박종우 가옥(오헌 고택), 김갑진 가옥, 김광옥 가옥, 김광호 가옥, 김뢰진 가옥 등에서 가능하다.

 

<영주 무섬마을 수도교>

이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멀리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무섬마을 안내문 옆의 외나무다리 사진>

무섬마을 바깥쪽 위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강폭이 넓어서 재래식 다리치고 길이가 엄청나게 길다. 나무로 만들었고, 높이도 낮은데다 유속이 빠르니 해마다 다리를 보수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영주 무섬마을 아도서숙(亞島書塾)≫

아도서숙은 일제 강점기에 무섬마을 주민들이 계몽 활동과 항일 운동을 벌인 근거지였다. ‘아도’는 아시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를 뜻하며 ‘서숙’은 서당을 의미한다. 1928년 10 이 지역 항일운동 지도자인 김화진의 주도로 무섬마을 청년들이 대중의 모임 장소인 공회당을 세우고 모임·배움·단결을 기치로 아도서숙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신분 계급과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배울 수 있었고, 오전·오후·야간반을 두어 학생들이 가능한 시간에 와서 배우고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교육 내용은 주로 민족교육과 문맹 퇴치, 신문명 교육, 농사 기술 교육 등이었다.

아도서숙에는 김화진, 김종진, 김성규, 김종규, 김계진, 김명진, 김광진, 김희규, 박찬하 등 9명의 운영위원회이 있었다. 영주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인 이들은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수시로 체포되어 투옥과 고문을 당하였다.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격문 의거가 있을 때에는 무섬마을 부녀자들이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9월에 일경 1개 소대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체포하여 압송했고, 온갖 탄압에도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자 1933년 7월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강제로 폐쇄하였다. 아도서숙은 이 지역 항일 운동의 특징적 역사를 잘 알려주는 뜻깊은 장소로 현재 건물은 원래 자리에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영주 무섬마을 아도서숙 전면과 뒷면 중앙>

수도교를 건너면 바로 맞은편에 해우당 고택이 있지만 우리는 먼저 아도서숙부터 들렀다. 그 사이에 무섬식당과 김희교 가옥, 치류정(峙流亭)이 있다. 

 

<영주 무섬마을 치류정(峙流亭), 김희교 가옥>

앞의 초가는 김희교 가옥이고, 뒤의 기와건물은 치류정(峙流亭)이다. 치류정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추측되며 입구는 특이하게 김희교 가옥 오른쪽의 철제 사다리를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영주 무섬마을 치류정(峙流亭)>

길가 쪽의 출입문이 잠겨있어 지나쳤다가 무섬식당을 둘러보는데 아래에 있는 김희교 가옥 오른쪽에 철제 사다리가 있어서 올라가 보았다. 화장실과 2채로 된 가옥인데 특별한 안내문은 없었다. 

 

<영주 무섬마을 치류정(峙流亭) 아래 무섬식당>

딱히 이름은 없지만 이곳도 전통가옥이고, 개조해서 식당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무섬마을에서 내가 본 식당은 이곳이 유일했다. 

 

≪영주 무섬마을 해우당(海愚堂) 고택 및 유물 일괄≫

국가민속문화유산

해우당 고택은 선성 김씨 중 무섬마을에 처음 정착했던 김대(金臺, 1732~1809)의 손자 김영각(金永珏, 1809~1876)이 1800년대 초반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이후 그의 아들인 해우당 김낙풍(金樂灃)이 1877년부터 1879년까지 중수하여 지금까지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김낙풍의 증손자로 이 지역 항일 운동 지도자였던 김화진의 생가이기도 하다.

해우당 고택은 ‘ㅁ’자 모양의 *뜰집으로 조선 중, 후기 상류 주택을 대표하는 유교적 *종법 질서를 표현하고 있고, 경북 북부 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형태이다. 안방에서 태어나 중방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상방, 새사랑, 빈소방으로 옮겨가는 생애주기와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침수가 잦았던 무섬마을의 환경적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독 보관을 위한 장고방을 따로 두었고, 높은 다락을 만들어 수납공간으로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고택과 함께 생활 민속 유물도 잘 남아있는데 흥선대원군의 글씨인 해우당 현판 및 글씨, 대은정 현판 및 글씨, 과거 답안지, 성주단지, 갓함 등 대표 유물 5건 8을 포함해 ‘영주 해우당 고택 및 유물 일괄’ 국가민속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뜰집 : 안채, 사랑채, 부속채 등이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는 주택

* 종법(宗法) 질서 : 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부계사회의 가족 질서 운영제도

* 까치구멍집 : 초가 지붕마루 아래 양쪽 끝에 공기가 잘 통하도록 만든 까치둥지와 비슷한 모양의 구멍

 

<영주 무섬마을 해우당(海愚堂) 고택>

윗단은 출입문(솟을대문이 아니다!)과 대원군이 쓴 해우당(海愚堂) 현판이 걸린 사랑채이고, 아랫단은 문간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작은문과 그 문으로 드나들게 만든 아주 작은 마루가 인상적이었다.

 

<무섬마을 해우당(海愚堂) 고택 안채>

 

<무섬마을 해우당 고택 중문(사랑채 뒤쪽)과 연결 복도>

안채에서 본 출입구(사랑채 뒤쪽)이다. 특이하게 윗사진 왼쪽 끝에 아래 사진처럼 폭이 좁은 마루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로 이어지는 작은문이 있다. 이런 독특한 장치는 한옥에서 처음 보았다.

 

<서쪽에서 본 무섬마을 해우당(海愚堂) 고택>

 

<무섬마을 해우당(海愚堂) 고택 문간채와 출입문>

문간채가 출입문과 떨어져있고, 규모가 꽤 크다.

 

<영주 무섬마을 김뢰진 가옥> 민속자료

왼쪽이 김뢰진 가옥인데 일행들이 이 골목을 패스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패스! 대신 선비촌에 재현한 김뢰진 가옥은 제대로 보았다. 가난한 선비나 서민이 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이다.

 

<무섬마을의 수춘재(김태길가옥)와 일계(逸溪)고택>

왼쪽의 작은 기와집이 수춘재인데 가장 작은 기와이면서 유일하게 무섬마을 거주자(할머니)를 만난 곳이다. 할머니 한 분이 짐을 옮기며 우리 민속박물관 답사 일행에게 무언가 설명을 하고 계셨다. 오른쪽은 일계(逸溪)고택이다.

 

<무섬마을 일계(逸溪)고택>

일계(逸溪)고택은 사랑채가 2칸인 점(만죽재는 3칸)만 빼고 만죽재 고택과 구조가 거의 같다. 바로 옆에 한 가구처럼 섬계(剡溪)고택(김동근 가옥)이 이어져 있는 점이 인상에 남았는데 원래 형제들의 집인 듯했다.

내가 본 중에서 아도서숙(亞島書塾), 해우당(海愚堂) 고택, 수도리 박천립 가옥(사무당), 만죽재 고택을 제외하고 다른 가옥은 따로 설명이 없었다. 그나마 입구에 안내문이라도 있는 곳은 오헌(吾軒)고택(박종우 가옥), 무송헌(撫松軒)종택(김광호 가옥)뿐이었다.

 

<무섬마을 일계(逸溪)고택과 이어진 섬계(剡溪)고택(김동근 가옥)>

KBS TV 프로그램인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촬영사진이 입구에 크게 걸려 있다. 사진 설명 중에 '300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옥, 넓은 툇마루를 갖춘 사랑방'이란 내용이 있어서 표석만 있는 섬계고택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영주 수도리 박천립 가옥(사무당)≫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박천립 가옥은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지었다고 알려진 살림집으로 이 집에 살았던 현 소유주의 고조부인 박승후(朴勝厚)의 호를 따 사무당으로도 불린다. 앞면 3칸, 옆면 2칸, 총 6칸 규모이고 방을 앞뒤 2열로 배치한 겹집이며, 용마루 양쪽에 까치둥지와 비슷한 모양의 구멍을 내어 공기가 잘 통하게 만든 초가지붕의 까치구멍집이다.

집 앞쪽에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 흙으로 된 출입 공간인 봉당, 부엌이 있다. 뒤쪽에는 위쪽에 있는 방인 윗방, 마루, 안주인이 사용하는 안방이 있다. 사랑방의 앞면과 옆면, 윗방 옆면에 밖으로 통하는 문을 설치하여 폐쇄적인 까치구멍집에 개방감을 느끼도록 했다. 다른 까치구멍집에는 마구간이 있는 위치에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박천립 가옥은 6칸으로 지은 까치구멍집이 변화하는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까치구멍집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카페로 이용중인 영주 수도리 박천립 가옥(사무당)>

 

<무섬마을 박천립 가옥(사무당, 오른쪽)과 만죽재 고택> 

 

<영주 만죽재(晩竹齋) 고택 및 유물 일괄>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주 만죽재 고택은 병자호란 이후인 현종 7년(1666)에 출사를 단념하고 이곳에 은둔하여 무섬마을을 개척한 반남 박씨 박수(朴檖, 1641~1729)가 지은 고택이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선조부터 13대에 이르기까지 장손들이 360년 간 집터와 가옥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처음에는 섬계당(剡溪堂)이라고 부르다가 6대손에 이르러 섬계초당(剡溪草堂)이라고 불렀다. 현재 이름인 만죽재는 8대손인 박승훈이 집을 수리하면서 부르기 시작하였다.

경북 북부 지방에서 보편적인 ‘ㅁ’자 모양의 뜰집으로 조선 중·후기 상류주택을 대표하는 유교적 종법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교육과 시문학의 장소로 사용된 고택 뒤 섬계초당은 내성천과 무섬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2008년 새롭게 복원되었다. 고택과 함께 생활 민속 유물도 잘 남아있는데, 대표 유물인 항일의병격문집, 역대 혼서지, 호구 단자, 승경도 4건 10을 포함하여 ‘영주 만죽재 고택 및 유물 일괄’ 국가민속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항일운동격문(抗日運動格文) : 입향조 8대손 박승훈이 필사한 을미사변 후 영남지역 항일 의병 운동 격문

* 혼서지(婚書紙) : 혼인할 때 신랑집에서 신붓집에 보내는 편지

* 호구단자(戶口單子) : 조선시대에 호주가 가족 사항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던 서류

* 승경도(陞卿圖) : 넓은 종이에 옛 벼슬의 이름을 품계와 종별에 따라 써놓고 알을 굴려서 나온 수에 따라 벼슬이 오르고 내림을 겨루는 놀이

 

<선비촌에 재현한 만죽재(좌)와 무섬마을의 실제 만죽재(우)>

선비촌에 재현한 만죽재는 해우당과 똑같은 출입문이 있지만  현지에는 따로 출입문이 없다. 또 선비촌의 재현한 만죽재는 사랑채의 기단이 높고 옆의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계단도 높다.  

 

≪영주 만죽재(晩竹齋) 고택≫

경상북도민속문화유산

만죽재(晩竹齋)는 평면이 ‘ㅁ’자 모양인 기와지붕 집으로 중앙에 안마당, 앞쪽에 ‘一’자 모양의 사랑채, 뒤쪽에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다. ‘ㅁ’자 집은 남녀를 구분하는 유교의 생활 원리를 반영한 구조이고, 개방적 공간인 사랑채는 남성, 폐쇄적 공간인 안채는 여성이 사용하였다. 사랑채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 대청,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마을의 다른 고택과 달리 중문 왼쪽에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인 사랑채를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안채에는 안주인이 사용하는 안방, 대청,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상방이 있다. 안방과 상방 앞에는 부엌, 외양간, 출입문인 문간, 물건을 넣어두는 고방 등이 있다. 12대 주손 박천세가 복원한 본채 뒤에 있는 별채는 후학을 가르치는 서당의 역할을 하였다. 만죽재 고택은 처음 만들었을 때의 평면구조를 잘 유지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후기 경북지역 사대부 가옥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무섬마을 만죽재(晩竹齋) 고택>

 

<무섬마을 오헌(吾軒)고택(박종우 가옥)>

 

<무섬마을 무송헌(撫松軒)종택(김광호 가옥)>

무섬마을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사당을 본 곳이다.

 

<무섬마을 무송헌(撫松軒)종택(김광호 가옥) 사당>

 

<안쪽에서 본 무섬마을 무송헌(撫松軒)종택(김광호 가옥)>

사랑채 안쪽과 아래 사진 중앙의 중문을 제외하고 안채로 출입하는 통로가 없다. 

 

<무섬마을 무송헌(撫松軒)종택 앞 골목>

이 골목을 나서서 왼쪽으로 가면 마을 끝이고, 그 쪽에 김규진 가옥을 비롯한 초가집들이 모여 있지만 일행들이 모두 외나무다리로 가버려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골목을 나서니 멀리 외나무다리가 보였다. 하지만 모래사장과 강폭이 넓어 강쪽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야 다리가 있다.

 

<무섬마을 쪽에서 본 외나무다리>

다리는 직선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이고, 교각(!)은 귀엽다 싶을 정도로 낮으며, 길이는 상당히 길다. 강 입구부터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 강쪽으로 들어가서 다리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모래사장이 누적된 듯하다. 이런 다리가 또 있으랴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동영상>

 

<무섬마을 외나무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