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김포의 장릉 원찰 금정사, 대포서원

큰누리 2012. 11. 20. 21:21

<김포 금정사>

금정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의 명칭은 고상사(高上寺)였다고 전한다. 조선 인조는 즉위 5년(1627)에 자신의 부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한 후 묘를 양주에서 김포로 이장하고 장릉이라 하였다. 능 부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 위치로 옮겨 재건하면서 원찰로 지정하고 봉릉사로 개칭했다.

1930에 당시의 주지 영송화상이 중수했고, 1938년에 일제가 김포 현청을 헐어낸 자재를 주지 성화대사가 구입하여 다시 크게 중수했다. 6.25 이후 쓰러져가던 사찰을 1974년 주지 정념스님과 고근스님이 다시 대웅전, 범종각을 짓고 뒷산인 금정산과 법당 앞의 물맛 좋은 샘물을 염두에 두고 금정사로 개칭했다.   -이상 금정사 연혁에서 요약 발췌-

 

김포에는 신기할 만큼 절이 없다. 그런데 금정사라는 절이 있고 바로 장릉의 원찰이다. 금정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것은 꽤 됐다. 서울 강서구, 양천구쪽 사람들에게 행주산성과 장릉은 예전에는 아주 좋은 소풍지(!)였다. 그래서 종종 들르면서 금정사가 장릉의 원찰이란 걸 알게 되었고 한번은 찾아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결국 20년을 넘겨 버렸다.

절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절이 아니라 기품있는 고관대작의 집 같았는데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단청을 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가장 눈에 띄는 건물 본원지의 누마루는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헐어낸 김포 현청의 건물을 절측에서 구입한 흔적이 아닐까 한다. 

 

처음 들어섰을 때 토방에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보고도 시큰둥하던 누렁이를 제외하곤 인기척이 없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유일하게 단청을 한 대웅전으로 향할 때 갑자기 비구니 스님 한분이 요사채에서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절을 꼼꼼히 보는 걸 접어버렸다. 그 비구니 스님은 우리 일행을 따라다니며 감시(?) 하느라 일도 못하셨다. 특히 불전의 사진에 대해 예민했는데 그동안 둘러본 수많은 답사지 중 최고였다. 개인적으로는 봉안된 불상보다 양반집 같은 건물이 더 인상적이었는데...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방문을 불편해 하는데 우린들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결국 차분하고 좋은 건물의 이미지만 안고 금정사를 나와버렸다. 나오는 길에 입구 건물의 토방을 보니 가장 사찰의 이미지와 가까운 차분한 누렁이가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김포 금정사 전경>

왼쪽은 대웅전, 오른쪽은 본원지이다. 앞쪽으로 나무 냄새도 날아가지 않은 큰 신축건물이 있는데 대웅전과 요사채라는 본원지, 부용당이 원래 남아 있는 건물인 듯 하다.

 

 

<누마루가 인상적인 본원지와 부용당>

두 건물 모두 요사채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단청도 하지 않고 누마루까지 있어 사찰이 아니라 품격있는 양반고택 같은 느낌은 준다. 

 

 

 

 

<대웅전>

  

 

<대웅전을 지나서 본 본원지와 7층석탑>

양반고택 같은 본원지, 부용당을 제외하고 원찰이라는 사실 외에는 크게 볼만 한 것은 없는 절이다.

 

 

<최근에 증축한것으로 보이는 건물과 흙더미, 요사채> 

 

 

 

<금정사 입구의 약수>

 

 

<금정사 토방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개>

 

 

<금정사 안에서 본 입구>

 

 

<금정사 앞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승가대학교>

 

 

<김포 대포서원 앞의 구절초와 곱게 물든 자리공잎, 미국쑥부쟁이(백공작)>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의 대포서원>

대포서원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인인 양성지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3년에 사림에서 세운 祠宇이다. 문이 닫혀 내부는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