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병인양요, 신미양요 격전지 김포 덕포진

큰누리 2012. 11. 21. 20:15

<김포 덕포진>

소재지 및 지정 : 김포시 대곳면 신안리 산 103-1 외. 사적 제292호.

덕포진은 조선시대의 진영으로 포대 및 파수청이 있던 곳이며 조선 전기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현종 7년(1666)에 광성보, 덕포진 용두돈대와 함께 새롭게 설치되었다고 한다. 덕포진은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1980년 발굴 조사 당시 고종 11년(1894)에 만들어진 중문 4포와 소문 2문이 포대에 거린 채 발굴되었으며, 포탄과 상평통보가 같이 출토되었다. 건물 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덕포진은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어구인 손돌목이란 천연의 요새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조선 숙종 8년(1682) 이후에 주진으로 승격되고, 숙종 20년(1694)에 강화도로부터 통진도호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영조 36년(1760)에는 종3품의 수군 첨사가 수군 316명을 지휘할 정도의 규모였다.

 

 

<덕포진의 포대>

주차장(덕포진전시관)에서부터 가, 나, 다포대 순으로 손돌목 지형을 따라 강안에 총 15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덕포진과 한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강화도 쪽에는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이 있다.

 

 

<덕포진 가 포대>

약물터에 있는 총 7개의 포대로 지붕이 이엉이며 강화 남장포대를 향햐고 있다. 각각의 포대 안에는 한강으로 들어오는 적을 향해 포를 쏘던 작은 네모 구멍이 있다. 윗사진은 가을(10/13)에, 아래 사진은 여름(8/7)에 촬영한 것이다. 

 

 

 

 

 

<나 포대>

원둘터에 있는 총 5개의 포대로 지붕이 이엉이며 강화도 초지진을 향하고 있다.

 

 

 


<다 포대>

굽두리에 있는 총 3개의 포대로 지붕이 기와이며 강화도 초지진을 향하고 있다.

 

 

 

 

<덕포진 파수청 터>

1980년 덕포진 조사 당시 발굴되었으며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서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함과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로 추정되는 곳이다. 건물 터 안에서 주춧돌과 화덕, 상평통보가 발굴되었다. 

 

 

 

<손돌 묘에서 본 파수청 터>

 

 

<덕포진 최상단의 손돌 묘>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고려의 고종이 손돌의 배를 타고 강화도로 천도하던 중 협소하고 물살이 빠른 이곳을 지나자 왕은 손돌을 의심하여 배를 돌리도록 했다. 계속 배를 저어 나아가는 손돌을 죽이라고 왕이 명하자 손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안전하리라고 진언한 후 참수되었다. 바가지를 따라간 결과 고종은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했고 고종은 뒤늦게 후회하면서 후히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지어줬다.

이후 이곳은 손돌목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기일인 10월 20일 경에 부는 바람과 추위를 손돌의 원혼이 일으킨다 하여 '손돌이 바람', '손돌이 추위'로 부른다고 한다.

 

 

<손돌의 묘에서 본 손돌목>

왼쪽 근경은 강화도, 오른쪽 원경은 김포(내륙) 쪽이다.

 

 

<덕포진 입구의 덕포진전시관>

김포의 역사, 덕포진과 신미양요, 병인양요 때 사용한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친절한 자원봉사 해설사가 인상에 남는다.

 

 

<덕포진전시관의 청동동치13년5월 명중포와 대포알>

 

  

<덕포진전시관의 교지와 총>

교지는 조선시대 국왕이 관헌에게 내리는 각종 문서를 말한다. 이 교지는 고종이 1893년 5월에 김상운장군에게 덕포진 수군첨 절제사로 임명한 사령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