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묵은 큐슈여행3 - 구마모토(熊本)성

큰누리 2013. 1. 18. 12:09

구마모토성은 1601년 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시 북쪽에 완공한 평산성으로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으로 불리며 일본 제일의 성으로 평가 받는다. 가토 기요마사는 기존의 치바성, 구마모토성을 정비하여 새롭게 구마모토성을 완공했다. 성 주변에 농성전을 대비해 가토 기요마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가 많아 긴난(銀杏)성으로도 불린다. 견고하고 급경사를 이루며 휘어진 석벽이 특징이다. 성벽 위에는 가장 높은 대천수각, 소천수각을 비롯하여 성루 등을 세웠다.

 

성주가 가토 가문에서 호소카와 가문으로 바뀐 후에도 성이 잘 유지되었지만 메이지시대에 군대가 주둔하면서 성이 많이 변형되었고, 1877년 세이난 전쟁 때 천수각을 비롯한 주요 건물이 많이 소실되었다. 망루와 견고한 석벽만 남아있었는데 1960년부터 대,소천수각과 일부 망루를 비롯한 복원공사를 했고 축성 400년이 되는 2007년부터 원형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과 함께 우리에게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에 앞장 선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가토 기요마사는 1562년 나카무라에서 출생했으며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친척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들어가 많은 전공을 세웠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큐슈의 다이묘(大名)으로 임명되었고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출병하여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은 후 권력을 놓고 벌어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기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을 들어 승리한 후 구마모토성의 세습성주가 되었고 1611년에 사망했다.

 

 

<구마모토성>

 아래 사진은 1960년대에 복원한 천수각이다.

 

 

<구마모토(熊本)성에 대한 한글 안내문>

안내문에 의하면, 일본 3대 명성의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수많은 실전의 경험을 살려, 1601년부터 7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위 5.3km에 이르는 장엄웅대한 모습으로, 120여개의 우물을 팠고, 최성기에는 성루 49개, 성루문 18개, 성문 29개였다.

 

1877년 세이난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됐지만 사쓰마군의 맹공격을 견뎌내 명성의 진가를 발휘했다. 구마모토성의 성벽은 흔히 말하는 세이쇼코(淸正公)석벽으로, 특이한 경사와 견고함으로 알려져 무사가에시의 석벽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현재의 천수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다.

 

 

<구마모토성 조감도>

둥글게 휘면서 가파르게 올라간 견고한 성벽이 구마모토성을 일본 제1의 성으로 만들었다. 이 부분은 혼마루 어전 대광문 부분이다. 

 

 

<구마모토성 대천수각>

 

 

 

 

<구마모토성 석벽 내부>

 

 

<구마모토성 내부의 전시실> 

 

 

 

<전시실의 복원한 구마모토(隈本)성>

이 구마모토성은 현재의 구마모토(熊本)성이 완공되기 이전에 있었던 구마모토(隈本)성이다.

 

 

<일본의 성들>

 

 

 

 

<대천수각 전망대에서 본 구마모토성>

대천수각 안 꼭대기층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안에서 본 성의 구조도 흥미로웠지만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지붕도 흥미로웠다. 곡선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기와와 달리 반듯하고 처마가 짧으며 새순처럼 삐죽 올라간 밋밋한 치미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지붕 위에서 본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기와끼리 매끄럽게 포개지며 연결되는 점은 예술이었다.

지금 가서 본다면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올 텐데 유적에 대한 지식이 특별히 없고 일반적인 역사만 조금 안 당시로서는 여기까지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