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봄비 내리는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큰누리 2013. 4. 22. 23:17

30년쯤 됐을까? 정말 오랜만에 이대 캠퍼스에 들렀다. 이대박물관 안의 국보 107호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보물 237호 청자'순화4년'명 항아리, 보물 416호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 보물 644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보물 645호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와 등록문화재 14호인 이대 본관 파이퍼홀 보기 위해서였다. 유감스럽게 이대박물관 안의 도자기들은 다른 전시 때문에 수장고에 들어가서 하나도 못 보았다.

 

4월 20일,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파이퍼홀 앞의 분홍 옥매밭과 만개한 벚꽃, 높이 솟은 나무에서 떨어지던 하얀 목련꽃잎은 우중충한 날씨를 잊게 했다. 정문 왼쪽 벽에 새긴 배꽃 벽화는 여자대학교라는 확실한 이미지와 이화여대의 상징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양쪽으로 상가처럼 들어선 이대캠퍼스 복합단지는 현대적인 대학 건물의 특징을 내게 충격적으로 각인시켰다.

 

♣ 국보 107호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조선 중기(17세기말~18세기)의 전형적인 백자로 항아리가 보여주는 조형미와 사실적이면서 여백미를 살린 포도덩굴, 농담과 강약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회화성 때문에 조선시대 철화백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다.

♣ 보물 237호 청자'순화4년'명 항아리고려 태조의 태묘 제1실의 향을 피우던 항아리로 순화 4년(성종12, 993)에 최길회가 만들었다. 태묘는 개풍군 용흥리에 터가 있지만 항아리의 정확한 출토지는 모른다. 항아리 굽 밑에 '순화 4년...으로 시작되는 18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담록색을 띠는 회색으로 고려 청자가 만들어지는 초기 상황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다.

♣ 보물 416호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경기도 개성에서 출토된 높이 48cm~50cm, 몸통 지름 34cm~38cm의 고려청자로 모두 4점이다. 13세기의 작품으로 몸통에 활모양을 세로로 어긋나게 엮어 투각을 했으며 이 중 2개에는 맨 윗면인 천부에 연꽃무늬를 음각했다.

♣ 보물 644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조선 전기(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목은 짧고 어깨가 올라간 형태의 청화백자 항아리이다. 그릇 전제에 소나무 1그루와 대나무 몇 그루를 그리고 소나무 밑에 거문고를 든 동자를 거느린 선비가 그려져 있는 조선 전기의 걸작이다.

♣ 보물 645호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는 17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철회 백자 항아리로 회백색과 특이한 그릇모양, 기법 등으로 미루어 경기도 광주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항아리에 그려진 구름, 용으로 보아 궁중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상은 문화재청 자료에 의함--

 

 

<이화여대 정문>

정말 많이 변했다! 하긴 벌써 30년도 더 된 대학 시절에 캠퍼스 안에 몇번 들어가 보고 그 뒤로는 이대 앞에 들른 기억조차 거의 없다. 특히 정문과 정문에서 파이퍼홀까지 구간은 완전히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서 잠시 헤맸다.

 

 

<이대 정문 쪽 벽의 배꽃>

사방이 훤하던 곳이었는데, 배꽃 부조로 장식하니 보기에는 좋지만 벽이 높아 답답하다.

 

 

 <이대캠퍼스 복합단지>

정확한 명칭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대학 구내에 왠 상가인가 싶어 의아했는데 층마다 '수업 중이니 조용히 하라'는 안내문이 유리 너머로 보였다. 접근성이나 면적 활용면에서 건축에 문외한인 내 보기에도 최고 수준인데 캠퍼스라는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달라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정문 정비를 하면서 최근에 신축한 듯 하다.

 

 

<이대박물관의 김활란像과 김활란 기념 박물관>

박물관 입구에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김활란像 아래에는 <김활란 기념 박물관>이라 쓰여있다. 우월 김활란은 1899년에 태어나 1970년에 타계했으며 해방 후 총 23년 동안 최장수 이대총장이었다. 김활란은 학생회관의 초상화, 대학 본관 앞의 동상 등 이화여대에서 현재에도 살아있는 이름이다.

그녀는 일제 때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며 강제징용을 독려했고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됐다"고 역설했다. 김활란이 없었다면 이대도 없었다는 입장과 그저 친일파 여성일 뿐이라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현재 이대박물관에서는 <사계.조선의 춘하추동>, 지하의 담인복식미술관에서는 <조선의 단장>이라는 이름으로 전통 복식을 전시 중인데 겨울에 들렀던 고려대학교박물관의 복식들이 오래된 진품들인데 비해 대부분 근대 이후의 것들이고 숫적으로도 빈약해서 실망스러웠다.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대학 본관 <파이퍼홀>이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이르는 길의 옥매화단>

정문의 배꽃 부조와 더불어 여자대학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느낀 곳이다.

 

 

<이대 본관 부근의 김활란 像>

 

 

<이화여대 본관 / 파이퍼홀>

등록문화재 14호이다. 이화여대는 1910년에 이화여고와 함께 이화학당 대학과로 정동에서 문을 열었다. 1930년대 초 교사가 부족해지자 신촌에 캠퍼스를 신설하면서 최초로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3층, 총 1295평의 석조 콘크리트조 고딕양식 건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고등교육기관의 대표적인 건물이라는 점에서 2002년 5월 31일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파이퍼는 뉴욕에서 자수성가한 독실한 기독교도 사업가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20년 아펜젤러가 필라델피아를 방문해 한국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학건물 기부를 요청하자 12만 5천달러를 기부했다. 건물 이름은 이들 부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파이퍼홀의 문>

검은색 아치 목재문이 중후하면서도 아름답다.

 

 

<흐드러진 목련>

키가 엄청나게 큰 목련들이 줄 지어 만개했다.

 

 

<이화여대 설립자 메리 F.스크랜톤像>

1832~1909. 미국 메사추세스 출생.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과 결혼하여 아들(윌리엄)을 하나 두었다. 1872년 남편과 사별 후 52세의 나이(1885)에 한국 파견 첫 여선교사 자격으로 들어왔다. 1886년 5월 이화학당 설립 당시 단 1명이던 학생이 꾸준히 늘어 오늘날 이화여대의 기초가 되었다. 스크랜톤은 이화학당을 선교의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근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라는 점에서 그 업적을 인정할 만 하다.

 

 

<이화여대총장 공관>

현판에 어영당(?) 비슷한 이름이 걸려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안에 우리가 보려던 傳)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 현기탑이 있는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하여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약한 사람이 있었는지 물으니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경대사 현기탑은 이대총장의 전유물?

 

 

<주태경여사 기념비>

정문에서 한참 들어간 지점에 있는 동상이다. 1873~?, 경남 진주 출생. 남편이 죽은 후 원산에서 벽돌공장을 운영했다. 1940년 미국감리교 선교부에서 원조가 중지되어 재정난에 허덕이는 이화여전에 거액을 희사했다. 1943년에는 전 재산 10만원을 기부하여 경영난을 해소시켰고 재단이사에 임명되었지만 해방 후 행방불명이 된 분이다.

 

 

<이대 건물>

총장 공관 부근에 있던 건물이다. 

 

 

<이대캠퍼스 복합단지와 이대 앞 전경>

 

 

<이대 앞 풍경들>

예나 지금이나 옷, 장신구 등 여성들의 쇼핑 명소이다. 자식이 대학생이 된 이 나이에도 젊은이들과 함께 걷는 이 거리가 생기가 넘쳐 즐거웠다. 하지만 한국의 명문 여자대학교 앞이 '화려한 쇼핑의 명소'로 자리매김한 점이 못내 아쉽다. 

 

 

 

<패션감각이 돋보이는 중국인 부부>

내가 이대를 답사하러 들어갈 때부터 함께(?) 했는데 옥매단지 앞에서 열심히 사진촬영을 했다. 중국인인데 부부와 아이, 모두 밝은 갈색과 호피무늬로 통일해서 패션이 단연 돋보였다. 나오는 길에 또 내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