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경희궁 담장길 따라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2

큰누리 2013. 4. 16. 15:47

<2차 답사 코스>

송월동 '월암동 바위글씨'에서 바로 위쪽 맞은편의 홍파동 홍난파가옥으로→ 베델 가옥 터→ 구세군 영천교회('성동인우애지산학' 바위글씨와 문성묘 터)→ 딜쿠샤(테일러 가옥)→ 권율장군 집 터→ 다시 경희궁 서북담장으로...

 

 

<서울기상관측소 아래 공원에서 본 풍경>

홍파동이나 행촌동은 고지대라 같은 행정동(교남동)이면서 아래에 위치한 송월동, 천연동이 아주 잘 조망된다. 사진 중앙 왼쪽의 푸른 지붕 건물은 천연정 터인 금화초등학교이다. 금화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사진 왼쪽은 감리교신학대학, 경기대학교, 충정로, 서울역으로 이어지고 사진 오른쪽은 금화터널, 서대문독립공원, 한성과학고등학교, 안산 등으로 이어진다.

 

 

<송월동 풍경>

길 건너 끝에 있는 붉은 벽돌에 삼각 지붕건물이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고 길 이쪽은 송월동이다. 길 아래 쪽의 송월동은 재개발 때문에 이미 비었거나 서울에도 이런 집들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낡은 집들이 많다. 사진 왼쪽 뒤 바로 아래에 '월암동'바위글자가 있어서 재개발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등록문화재 제90호 홍난파 가옥(베델 가옥 터)>

월암근린공원 끄트머리에 있으며 집 앞쪽으로 최근에 복원한 서울성곽(서울특별시교육청 서쪽)이 보인다. 난파 홍영후가 1934년 재혼한 후 세상을 뜰 때까지 7년 동안 산 집으로 2004년 헐릴 뻔한 것을 서울시에서 구입했다. 홍난파 가옥을 거쳐간 이들 흥미로운데 이 가옥은 1930년 쯤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며 기록에서 최초의 토지 소유자로 등장하는 최선복은 <불놀이>의 작가 주요한의 부인1932년 소유주인 홍어길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카 사위 추정된다고 한다(이상은 안내자인 이순우선생님의 자료에 의함). 홍난파(영후)는 1936년 이후의 소유자이다.

 

홍난파 가옥을 포함해서 이 일대는 베델 가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한데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미국인 어네스트 베델(한국 이름- 배설)은 1904년 3월에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와서 일본에 우호적인 신문사 편집 방향에 반대하다 해임된 후 항일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창설하고 일제에 맞서다 1909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홍난파 가옥 내부>

2010. 3월에 개인적으로 서울성곽 서대문 구간을 (찾지 못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우연히 문단속을 하고 나오던 홍난파 선생의 손주분을 만나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고 그 때 촬영한 것이다. 출입구에서 1층(도로에서 보면 2층)으로 들어서면 홍난파의 일생, 작품에 대한 자료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선생이 쓰던 피아노와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작은 음악회(연주회)를 할 때 이곳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지금이야 카페<나홀로 테마여행>을 통해서 서울성곽을 완주했기 때문에 성곽에 대해 비교적 잘 알지만 당시에는 주워들은 것만 가지고 무조건 성곽을 찾아나서서 무려 3번만에 성공했다. 서대문쪽 성곽을 먼저, 그것도 3번씩이나 실패하면서 찾은 이유는 이 부근에 서양 선교사집들이 많다고 들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딜쿠샤'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 어렵게 찾은 딜쿠샤와 서울성곽 서대문 코스를 잊지 못한다.

 

 

 

<홍난파 가옥 앞의 동네 골목길 관광 제7코스 / 교남동 안내판>

이런 동네 골목길 관광 코스 안내판은 경희궁 주변과 경복궁 주변에서 많이 보았는데 일관성 있는 디자인에 헤매기 쉬운 골목길에서 목적지를 찾아가기에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관광지 바로 앞에 세워서 그 관광지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하고 한 켠에 주변의 관광지를 안내해 놓았다.

 

 

<구세군 영천교회(문성묘 터, '성동인우애지산학' 바위글씨 소재지)>

구세군 영천교회는 율곡 이이의 거처였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1959년에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석담리에 있던 문성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 1971년 대법원 판결로 철거되었다. 율곡선생의 친필로 알려진 바위글자 '성동인우애지산학'은 원형은 1980년대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영천영문교육관 앞 벽 앞에 별도로 재현해 놓은 글자는 탁본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아래 아래 사진은 당시의 문성묘이다.

 

 

 

<율곡 선생의 친필이라는 '성동인우애지산학(性同鱗羽愛止山壑)'>

'타고난 성품이 물고기나 새와 같아서 산골짜기에 머물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출전은 종측이라는 은사가 남제의 예장왕이 내린 벼슬을 거절하는 편지에 쓴 구절이라고 한다.

 

 

<행촌동 딜쿠샤(테일러 가옥)와 권율장군 집터의 은행나무>

행촌동이라는 지명은 권율장군 집터의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에서 유래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낡은 벽돌 건물이 바로 딜쿠샤인데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딜쿠샤는 1923년에 미국인 알버트 테일러가 지었다. 그는 1896년에 광산기술자로 한국에 들어온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따라 이듬해에 한국에 들어왔다. 알버트 테일러도 아버지처럼 광산기술자로 광산 운영 등에 관련된 일을 하다가 1917년에 인도에서 결혼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19년에 AP통신사로부터 고종의 인산과 관련된 취재를 의뢰를 받고 활동하면서 3.1운동과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을 해외에 알리는데 공헌했다.  

 

1923년에 현재의 위치에 딜쿠샤를 짓고 살다가 건강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1926년 7월에 딜쿠사에 벼락이 떨어져 전소되었다. 알버트 테일러부부는 1929년에 재입국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딜쿠샤를 재건했으며 1941년에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일본에 의해 추방 당할 때까지 딜쿠샤에 살았다. 알버트 테일러는 해방 후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와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알버트 테일러와 부인인 메리 테일러, 아버지 조지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다. 

 

 

 

<딜쿠샤(테일러 가옥)>

온전히 보존되었더라면 아주 근사했을 딜쿠샤는 이제는 폐가처럼 누추한 모습으로 전락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2005년 당시에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살고 있었고 창틀, 바닥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왼쪽의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 아래(장독대 뒤) 벽에 'DILKUSHA 1923'과 'PSALM CXXVII-I'의 머릿돌이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딜쿠샤는 전기한 대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을 뜻하며, 시편 127편 1절은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들의 노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들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라는 내용이다. 한 때 딜쿠샤는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오인되어 언론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사용될 뻔 하기도 했다.

 

 

<딜쿠샤(테일러 가옥) 장독대 옆의 기초석>

2010년 3월 26일에 딸과 둘이 서울성곽과 딜쿠샤를 찾아헤맬 때 촬영한 것이다. 앞에 장독들이 놓여있는데 딱히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마땅치 않아서 여러 번 망서리다 결국 살짝 들추고 찍었다.

 

 

 

<권율장군 집터 - 은행나무 앞의 동네 골목길 관광 제7코스 안내판>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 딜쿠샤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권율장군 집터 앞의 도시가스 배관>

고만고만한 건물에 참으로 많은 가구들이 산다. 사는 사람은 많이 불편하겠지만 획일적이지 않은 건물과 골목,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런 풍경 때문에 오히려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