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백운동천과 창의문 옛길

큰누리 2013. 5. 20. 20:24

지난 4월 27일, cafe 나홀로 테마 여행에서 사학자 이순우선생님의 안내로 진행된 답사 명칭은 <백운동천 물길따라 웃대의 풍경을 걷다>였다. 경복궁 바로 인근에 위치한 지역에다 서울 제일의 경관이라는 백운동천 주변을 돌자니 볼 게 워낙 많아 글을 몇개로 쪼개었다.

'웃대'는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개벽」제48호(1924.6)에 실렸다는 서울에 대한 조선시대의 지명과 거주상황(아랫글)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아직도 기와집이 많이 남아있어 관광명소로 자리잡은 북촌을 제외하면 서촌은 옛 모습이 조금 남아있는 곳으로, 남촌은 벼슬길에 진출하지 못한 딸깍발이 샌님들이 살았던 곳으로 어렴풋이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머지 동촌과 중촌, 웃대, 아랫대는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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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각 족속의 분포상황을 약기하면, 북산 밑은 북촌(北村), 남산 밑을 남촌(南村), 낙산 근처를 동촌(東村), 서소문 내외를 서촌(西村), 장교와 수표교 어름을 중촌(中村), 광통교 이상을 웃대, 효교 이하를 아랫대, 강변을 오강(五江), 성 밖 사면 10리 내외를 자내(字內)라 하여, 동서남북의 네 촌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았으며, 또 같은 문반의 양반이로되, 서촌에는 서인이 살았으며, 그 후 서인이 다시 노론, 소론으로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 또 대북, 소북으로 나뉨에 미쳐는서촌은 소론, 북촌은 노론, 남촌은 남인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소론까지 잡거하되 주로 무반이 살았으며...   -답사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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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의 주요 답사 코스 아래와 같다. 창의문(청계천 발원지)- 창의문 옛길- 백운동천 글씨(백운장)- 궁내부 농상소(경기상고/경복고)- 청운장 터(이시영 부통령 관저)- 우당(이회영)기념관- 백세청풍 바위글씨 - 청운산장 바위글씨 - 선희궁(서울농학교) - 동아청년단결 바위글씨(인왕산) - 자수궁 터(옥인동 군인아파트) - 송석원 터 - 이완용 집터(옥인동) - 자수궁다리 - 쌍홍문 터 표석 - 금청교 - 종침교 - 사역원 터 - 양정 창학 터 - 송기교(송교) - 황토현 신교

 

 

 <창의문 앞의 최규식경무관상>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의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정부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세검정고개를 통과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정체가 탄로나자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해 많은 시민이 살상 당했다. 그날 현장에서 지휘하던 이가 최규식 총경으로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했다.

 

 

<창의문(자하문) 앞의 청계천 발원지 표석>

 

 

<창의문 옛길 그림 사진>

설명하는 분은 재야 사학자 이순우선생님이시다. 인왕산 아래에 도로를 만들면서 완성 후의 모습을 예측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요즘처럼 창의문 바로 아래에서 세검정으로 뚫린 직선도로가 아니었다. 세검정 쪽(창의문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탕춘대성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도성을 들어오려면 창의문으로 들어온 후 사진 속의 자동차가 지나는 위의 길로 내려와 청운벽산빌리지 사이를 통과하여 자하문터널 쯤까지 내려온 뒤 도성으로 향하는 식이었다. 경복궁에서 사직터널까지 뚫린 도로도 당시에는 없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만든 것이다.

 

 

<현재의 길에서 본 창의문 옛길과 청운벽산빌리지>

붉은기와 지붕의 집들이 청운벽산빌리지이다. 창의문을 통과하여 윗사진의 대로 아래에 있는 청운벽산빌리지 사이로 길이 있어 도성을 드나들 때 이용되었다. 

 

 

<청운벽산빌리지의 복숭아꽃>

 

 

<창의문 옛길(청운동) 풍경들>

서울성곽돌기를 할 때 인왕산 아래로 보이는 이 부근 주택들이 인상에 남아있다. 주변의 인왕산, 북악산과 어우러진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자하문터널 입구>

전에 부암동답사를 하러 가면서 이곳을 통과하는 버스를 타서 다시 버스를 타고 나와 창의문으로 간 적이 있다. 자하문터널 바로 위에 백운동천 바위글씨(백운장 터)가 있다. 인왕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곳인데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게 풍치가 빼어났다. 지금은 개발로 옛 모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들이 도성의 명소로 이곳을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하문터널 위의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사진 왼쪽의 철책이 일직선으로 끝나는 지점에 백운동천이 있다. 이 지점 쯤만 되어도 정부종합청사 쪽이 시원스럽게 조망이 된다. 그래서 막판에는 요정으로 변한 백운장이 이곳에 자리 잡은 듯하다.

 

 

<백운동천의 애기똥풀, 뱀딸기>

인적이 드물고 기름진 백운동천 바위글씨 앞 야산에는 애기똥풀, 뱀딸기 같은 야생화들이 여느 화단의 꽃 못지 않게 빛을 발하고 있다.

 

 

 

<백운동천과 바위글씨>

조선시대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말하기를 한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 으뜸은 삼청동, 다음은 인왕동, 그 다음은 쌍계동과 백운동, 청학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슨무슨 洞天은 경치가 빼어난 곳을 말한다.

 

 

 

<백운동천 바위글씨>

'백운동천' 왼편의 '광무 7년 계묘, 중추 동농' 각자로 보아 1903년 동농 김가진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백운동천과 백운장 사진, 백운장 터>

대정 4년(1915)에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청향원이라는 음식점을 이곳에 지었다가 소화 4년(1929)에 백운장으로 개칭했다. 윗 사진은 백운장의 일부로 추측하며, 아래 사진은 그 터이다. 백운장은 해방 이후에 폐결핵요양소, 캬바레, 요정 등으로 이용되었고 화남장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백운동천 풍경>

부도를 닮은 이 돌탑의 정체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주변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