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여주 고달사址

큰누리 2016. 5. 12. 23:33

<고달사>

사적 382호 고달사지.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보물 제6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8호 고달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 282호 쌍사자석등(1959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여주 혜목산 기슭의 고달사(高達寺)는 통일신라 경덕왕 23년(764)에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이 절은 고려 시대 초기에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중의 하나로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던 중요한 사찰이었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까지는 번창했으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 폐사된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998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는 2012년 현재 6차까지 완료하였으며 향후 7~9차 발굴 조사를 진행한 후 정비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

--2012. 0407 현재 현지의 안내문--  

 

 

고달사지에 처음 들른 것은 문화재나 답사에 대해 문외한이던 2000년경이었다. 당시엔 주변의 민가와 부서지거나 자리를 잃은 석재들이 어수선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사찰 규모가 어떤지 가늠이 어려웠다. 2012년에 들렀을 때 주변의 민가는 모두 철거되고 흩어져있던 석재들과 절터를 정비하니 비로소 절의 규모가 짐작이 되었다. 건물이 전혀 없고 주춧돌만 남아있는데도 터가 얼마나 넓은지 그 정도로 큰 절터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폐허가 되었음에도 현지에 덩그라니 몇개 남은 유적과 터만으로도 감탄을 불러일으킨 절이었다.

 

답사를 다녀온 직후 사진 정리를 미루거나 답사기를 쓰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내용을 답사해도 기억에서 곧 사라진다. 2012년 볕이 좋은 봄날에 우리는 여주, 이천, 충주지역의 유적들을 두루 답사했는데 볼거리가 아주 많았다. 내용도 모두 좋아서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에 선연히 남아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정리가 미루어지곤 했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면서 미루다가 결국 4년을 넘겼는데 이상하게 이 지역의 유적들에 대해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큰 마음 먹고 외장 하드로 넘어간 사진자료를 들춰 지금이라도 정리를 하니 빚을 갚은 느낌이다. 4년이나 지나 지금은 여주, 이천, 충주지역의 문화재들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번 더 가서 4년 전처럼 두루 그 지역을 다시 답사하고 싶지만 그게 마음 먹은대로 쉽지가 않다.   

 

 

<고달사지 입구의 보호수 느티나무>

수종 400년, 높이 18m, 나무둘레 4.2m의 경기.여주.70이라는 일련번호가 붙은 보호수이다.

 

 

<고달사지 안내도>

2008년에 세운 안내도라 당시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내용을 편집해 넣었다. 지금은 제대로 된 안내문이 세워지지 않았을까? 안내문 맨 아래에 있는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지의 석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2012. 7/8에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서 촬영한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전면에서 본 고달사지>

중앙 원경 지면 끝의 두드러진 물체(!)는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 석조대좌이다.

 

 

<관람 동선을 세로로 따라가며 왼쪽의 쌍사자석등지와 나란한 위치쯤에서 본 고달사지>

 

 

<관람 동선을 가로로 따라가며 본 고달사지>

 

 

<여주 고달사지 석조 2기>

 

 

아래의 석조는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긴변 321m, 짧은면 149cm, 높이 98m이다. 석조는 돌 1개를 파서 만들었으며 각면의 모서리 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부분에서 둥그렇게 굴렸으며 바닥 중앙부에 원형 배수구멍이 뚫려있다. 바깥 모서리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만들었으며 위에 약 2cm  정도의 귀접이를 해주어 장식적인 기교가 돋보인다. 전체적인 치석(돌 다듬는 법)수법과 고달사지 연혁으로 보아 이른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에서 서쪽 관람 동선을 가로, 세로로 따라가며 본 고달사지>

거의 폐허나 다름 없는데도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 동안 답사한 국내의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큰 것 같다.

 

 

 

<고달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8호.

불상은 없어지고 대좌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빼어난 4각대좌로 장방형의 석재를 상,중,하대 등 3중으로 겹쳐놓았다. 상대는 앙련(仰蓮)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대는 4면에 하나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조각했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을 조각했다.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석불 받침도 이 정도로 훌륭한데 그 위에 놓였던 불상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6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비는 무너져 신석(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겼고, 이곳 고달선원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사사하였다.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3세에 입당하여 서주 동성현 적주사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 5년(921)에 환국하여 봉림사에 거주하였다. 그후 광주 천왕사에서 고려 광종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하자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다.

 

귀부는 거대한 한개의 돌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는 운문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 위에, 윗면 둘레에는 복련문이 조각되어 있다. 네 다리와 발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는 흔히 볼 수 있는 용 모양이다. 이수는 구름과 용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현지에 있는 안내글을 (조금 손보고) 옮기면서 욕이 입속에서 맴돈다. 한자어를 쓸 수 밖에 없는 점은 이해되고 뜻은 정확히 이해했지만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면 일반인은 어려워서 어떻게 이해를 하나? 유홍준 교수님이 그랬던가? 기존의 문화재 안내문을 보고 한심해 하면서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면서 쉽게 풀어 썼던 글을...

 

 

 

 

 

 

<고달사의 또 다른 탑비 귀부>

크나 큰 절에 자리했다면 이 탑비도 나름 의미가 있고, 주인도 잘 나갔던(!) 분이었을 텐데 안내문조차 없고 보존상태도 원종대사 혜진탑비와 비교된다.

 

 

 

<고달사 후경>

 

 

<고달사 뒤편에 있는 안내석과 고달사 후경>

4월초에 들렀을 때 구례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산수유로 유명한 이천과 더불어 여주도 산수유꽃이 흐드러졌다.

 

 

 

<고달사지 부도>

국보 제4호.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 부도 가운데 손꼽히는 거작으로 상륜부만 없을 뿐 각부가 그대로 남아있다. 기단 중대석의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과 구름오양을 조각한 솜씨가 힘차고 능숙하며 대담하다. 팔각 탑신의 각면에는 문비형과 사천왕상이 조각되고, 비교적 두꺼운 지붕에는 각 전각마다 높직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신라 부도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서 고려 시대 양식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각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원종대사의 혜진탑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높이는 3.4m이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7호.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광종 때까지 활약한 원종대사(元宗大師, 869~958)의 부도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 2.5m이다.

 

이 부도는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지대석과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이 있는데 몸통 사이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 새겨 넣었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도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윗쪽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의 각면에는 자물쇠 문양(門扉)과 사천왕상이 교대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끝에는 꽃무늬가 크게 조각되어 있고 상륜뷰에는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 위에 보개와 보주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