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용인 심곡서원

큰누리 2016. 12. 11. 23:40

<심곡서원(深谷書院>

사적 제530호.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203-2번지.

 

<현지 안내문1>

심곡서원은 중종 때의 문신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서원이다. 조광조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효종 원년(1650)에 서원이 건립되어 그 해에 심곡서원이라는 사액(賜額 :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조광조 선생은 연산군 때의 폭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중종에 의해 등용된 인물로, 향약 보급운동, 반정공신위훈 삭제, 현량과 실시 등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던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반격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사화로 선생은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심곡서원 전면에는 홍살문이 있고 경사지에 외삼문(外三門), 일소당(日昭堂), 내삼문(內三門), 사우(祠宇), 장서각(藏書閣)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우는 지붕 좌우에 방풍판을 달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일소당(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서원에서는 매년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이다. 선생의 묘소는 심곡서원 맞은편 좌측 야산에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에서 2015년 국가 사적 제530호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2>

심곡서원은 조선 전기 중종 때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선생은 중종(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였으며, 효종은 '沈谷'이라는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여 심곡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사당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심곡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사당)가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강당 안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담긴 현판과 서원의 규약 등이 걸려 있다.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문신, 조광조를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하였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심곡서원은 최초 사당을 중심으로 제향기능을 강조하여 지어졌으며, 이후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편에 재사를 두는 전당후재의 모습을 보였고, 심곡서원도가 그려진 시기에 앞서서 전재후당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음을 옛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조광조 선생의 묘소는 심곡서원 맞은편 좌측 앞산에 있으며, 심곡서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에서 2015년 국가 사적 제530호로 지정되었다.

*기묘사화 : 1519년에 조광조와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사건.

 

 

심곡서원에 있는 2개의 안내문을 종합하면 심곡서원의 건립, 건물 구조, 조광조 선생의 정치적 성향과 기묘사화 등에 대한 윤곽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개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유적답사를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으로 현지 안내문이 관람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 되어 있고, 대동소이한 내용인 경우에는 1개로 통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시적 국사책에서 배운 조광조 선생에 대한 기억은 개혁정책의 방향은 옳지만 급진적이다, 반대파의 공격으로 무참하게 깨졌다는 식이었다. 많은 TV 사극에도 조광조 선생에 대한 내용이 등장했는데 전인화, 도지원 등이 주인공이었던 <문정왕후>에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을 쓰고 글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갉아 먹도록 하여 조광조를 역모로 몰아 죽였던 장면이 생각난다.

--'走肖'는 조광조 선생의 성인 '趙를 분해한 것'으로 조씨가 왕이 되려고 한다, 즉 역모를 꾀한다는 뜻-- 

  

율곡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의 개혁 실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재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일선 정치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를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정치적 개혁)가 실패한 원인이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정치 이념과 실현 방법,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 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당시의 정치체제임을 갈파한 것이다. 후에 조광조는 곧 신원이 되고 정치적 이상과 학덕을 인정 받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심곡서원 전경>

서원의 삼면이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고, 공간이 트인 서원과 앞쪽의 무덤 사이에도 현재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심곡서원 배치도>

 

 

<정면에서 본 홍살문과 심곡서원>

 

 

<심곡서원 외삼문>

담장 안의 좌, 우 건물은 서재(유의재)와 동재(거인재).

 

 

 

<심곡서원 외삼문 안 중앙 건물인 강당(일소당)>

 

 

<심곡서원 동재(거인재 : 居仁齋)>

 

 

 

<심곡서원 서재(유의재 : 遊義齋)>

 

 

 

<심곡서원 강당 동쪽에서 본 장서각과 내삼문, 사우(사당)>

왼쪽 앞의 건물은 강당이다. 중앙은 내삼문, 심곡서원 편액이 걸린 사우(사당), 오른쪽 건물은 장서각이다. 

 

 

<심곡서원 장서각>

 

 

<심곡서원 내삼문>

 

 

<내삼문 틈으로 본 심곡서원 사우(사당)>

 

 

<동쪽 담 너머로 본 심곡서원 사우(사당)>

 

 

<사우 뒤편에서 본 심곡서원>

윗 사진 원경의 맨 왼쪽 야산 끝에 조광조 선생 묘가 있다. 

 

 

 

 

<심곡서원 사우와 뒤쪽의 보호수(느티나무)>

 

 

 

<심곡서원 뒤편과 보호수(느티나무)>

 

 

 

<동쪽에서 본 심곡서원>

왼쪽부터 장서각, 내삼문, 사우(사당)이다.

 

 

<동쪽에서 본 심곡서원 측경>

왼쪽부터 차례로 동.서재, 강당, 장서각, 사우(사당)이다.

 

 

<심곡서원 동쪽문인 일각문>

 

 

<심곡서원 동남쪽에서 본 모습>

동재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연지이다.

 

 

<심곡서원 홍살문 동쪽에서 본 조광조 선생 묘>

선생의 묘는 심곡서원 맞은편 야산 왼쪽(맨 왼쪽 기중기 뒤편)에 있다.

기중기 뒤로 희끗한 문인석 일부와 봉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