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열하일기 코스

열하일기 따라가기23 - 북경 국자감과 공묘

큰누리 2016. 10. 5. 00:19

<열하일기 따라가기 9일차 일정1>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덕승문, 동직문 찾아 헤매다 버스 딱지만 끊음-국자감, 공묘-옹화궁-본가 망경점에서 점심- 북경국제공항으로 이동-1시간 40분 기다려 16:50. 아시아나 에어 탑승- 한국 시각 19:50. 인천공항 도착.

 

 

동직문은 연암 일행이 북경에서 열하로 나간 문, 덕승문은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올 때 들어온 문이다. 대련 번호판을 단 우리 버스는 아침 7시 이후에 외부차량은 북경 출입을 금지하는 현지 규정 때문에 새벽에 호텔에서 도시락이라고 랩에 어설프게 싸준 샌드위치 한 조각과 삶은 계란, 생수 한 병을 받아들고 버스에 올랐다. 수 없이 古관상대 주변만 빙빙 돌다가 결국  단속에 걸려 버스는 위반 딱지를 떼었고, 그러고도 못찾아 결국 두 문은 포기했다.

 

버스에서 내려 국자감을 찾는데도 헤맸다. 지기님의 경우 여러 차례 북경답사를 진행했는데도 코스를 벗어났기 때문에 골목길을 잘못 들어가 헤맨 것이다. 기왕 헤매는 김에 우리나라와 달리 아침을 길거리에서 해결하는 현지인들도 보고, 옹화궁 바깥의 골목을 따라 늘어선 어수선한 살림집들도 보면서 따라갔다. 친지 방문이나 배낭여행이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든 골목길 풍경을 요양에서 관제묘를 찾을 때도 헤매다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국자감, 공묘가 있는 성현가 패방 아래로 들어서니 허연 회화나무 꽃이 봄날의 꽃가루처럼 아래에 주차한 차량과 길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회화나무는 학자수라 하여 궁궐이나 학문기관 마당 등에 많이 심는데 울창한 회화나무에서 그 많은 꽃이 떨어지니 거의 공해였다. 

 

공묘, 국자감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통합 입장권을 산다. 이른 시각에 도착하여 공묘 주변을 서성이며 우리나라 하마비보다 단조로운 하마비도 보고, 공묘 앞의 빨간 영벽도 보았다. 기껏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국자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국자감 정문(집현문)으로 가니 단체복을 입은 초등학생 쯤 되는 학생들이 줄을 지어 국자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국자감, 공묘를 관람하는 동안 학생 단체 입장객을 여기저기에서 만났는데 교육적인 효과를 노려 국자감, 공묘로 견학을 많이 오는 것 같았다.

 

 

<국자감>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오랑캐족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왕조 내내 한족 식자들로부터 끊임 없이 저항을 받았고, 그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문자옥을 일으켜 반항하는 한족을 무력으로 눌렀다. 하지만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자 나름 노력했고, 그들의 정치적, 정신적 기반이었던 유교를 수용하고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그 중심에 공자를 모신 사당인 공묘와 유교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있다.

 

북경의 국자감은 명나라 때 북평부학으로 격하된 상태였다가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국자감의 지위를 되찾았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상당 부분은 건륭 49년(1784)에 확장하고 정비한 것이다. 국자감, 공묘는 각각 우리나라 성균관의 명륜당, 대성전과 같은 곳으로 연행단 식자들의 필수 탐방 코스였다. 

 

국자감은 남에서 북으로 집현문-태학문-유리패방-벽옹-이륜당-경일정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동, 서 양쪽에 회랑 형태의 동무, 서무가 있다. 동, 서무는 사청육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무에는 박사청, 전적청, 수도당, 정의당, 광업당 등이 있었으나 가장 북쪽의 박사청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은 예술전시장(임시전시장)으로 사용 중이다. 서무에는 승건청, 전부당, 율성당, 성심당, 숭지당이 있었으나 가장 북쪽의 승건청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전시실로 사용 중이다. 동무는 닫혀있고, 서무의 전시실에는 청나라의 과거제도, 관복, 한나라의 국자감 모형, 국자감 조직도, 강학 장면을 재현한 모형 등이 전시 중이었다. 서무 북쪽 끝에 있는 승건청은 분위기가 사당처럼 으시시했는데 국자감 사무실 기능을 한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교무실 같은 곳이다.

 

국자감의 중심 건물인 벽옹(辟雍)은 황제 전용 강의실로 원형의 연못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다리를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로 주변에 연못을 파고 그 안에 벽옹을 지은 것이다. 벽옹 내부의 어좌는 상당히 화려하고 벽에는 커다란 편액들이 걸려 있다.

 

벽옹 북쪽 다리를 건너면 공자상과 일구(해시계)가 있고, 넓은 대 위에 이륜당이 있다. 이륜당은 장서고(도서실) 겸 강의실로 원나라 때에는 숭문각으로 불리다 명나라 영락제가 중건하면서 이륜당으로 고쳐 불렀다. 북쪽 끝의 경일당과 함께 드물게 남아있는 명나라 때의 건물이다.

 

가장 북쪽의 경일정은 명나라 가경제 때 세운 건물로 국자감 최고 유학자(책임자)였던 제주가 거주한 곳이다. 현재는 명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일곱 황제의 유훈을 새긴 비석이 보관되어 있다.

 

 

<국자감 찾아 헤맨 옹화궁 뒷길>

국자감과 공묘는 붙어 있고, 옹화궁도 지척에 있다. 우리 현지 가이드는 북경 전문 가이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막다른 길로 잘못 들어서서 헤매었고, 덕분에 북경 번화가에서 볼 수 없는 이런 모습들을 만났다. 어떤 이들은 출근하느라 바쁘고, 어떤 이들은 거리에서 아침을 사먹고 있었다.

 

 

<국자감, 공묘가 있는 성현가(成賢街) 패방>

패루를 뒤덮고 있는 나무는 학자수로 불리는 회화나무이다. 아카시꽃 비슷하게 생겼지만 여름이 개화기라 도로는 온통 마른 허연 회화나무꽃으로 뒤덮여 있고, 그늘이 깊어 사진이 제대로 안 나왔다.

 

 

<공묘 선사문 앞의 영벽(影壁)>

 

 

<국자감 패방과 하마비>

오른쪽의 비석이 하마비이다.

공묘 정문(선사문) 좌우에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 하나만 보았다.

 

 

<공묘 하마비>

앞뒤에 한자,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위그르어로 관원인등지차하마(官員人等至此下馬)라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하마비와 모양도 다르고 문구도 약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하마비에는 대체로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겨져 있다. 궁궐, 종묘, 성균관, 경기전, 동묘 등은 '신성한 곳이니 모두 말에서 내려 걷는 예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국자감 정문 집현문(集賢門)>

20분 넘게 공묘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국자감으로 가서 입장하라고 해서 이곳으로 왔다. 관리자들은 음식을 먹거나 빈둥거리면서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우리에게 국자감쪽으로 입장해야 한다는 말을 안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의 부실한 서비스 개념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무엇한 곳은 관광객이나 고객에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하고, 그저 그런 곳은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이다. 그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고객에 대한 기본적인 서비스 개념이 전혀 없다.

 

 

<국자감 태학문>

태학문 뒤로 화려한 유리패방이 보인다.

 

 

<국자감 유리패방>

밖에 새겨진 '원교교택(圜橋敎澤)', 안에 새겨진 '학해절관(學海節觀)'은 건륭제의 친필이다. 정사에 바쁘고, 변방의 오랑캐들 원정도 하고, 여색을 탐하기에 바빴을 분이 팔순까지 장수하고, 여기저기 많은 친필 휘호를 남겼다.

 

 

<국자감 비정>

동, 서비정이 있는데 사진은 서비정이다.

 

 

<국자감 주건물인 벽옹 남쪽>

황제의 전용 강의실이다. 국립대학 안에다 황제 혼자 강의 듣겠다고 이런 호화로운 건물을 지었다. 물론 자신이 들은 강의를 다시 신하들을 불러 재탕은 했다고 한다. 건축학적으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건물이라고 한다.

 

 

<국자감 주건물인 벽옹 서쪽>

 

 

<국자감 주건물인 벽옹 내부와 어좌>

 

 

<국자감 승건청 내부>

안내문이 간자라 정확히 해석은 못했지만 대략 공식적인 일을 보고 학생들이 잘못했을 때 벌을 준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국자감 벽옹과 이륜당 사이의 공자상>

 

 

<공자상 뒷 모습과 벽옹>

 

 

<국자감 이륜당>

책을 보관하고 강의를 하던 곳이다.

 

 

<국자감 서무(서쪽 행랑)>

현재 국자감 관련 전시실로 사용 중이다.

 

 

<국자감 전시실 내부>

청나라의 과거제도, 관복, 한나라의 국자감 모형, 국자감 조직도, 강학 장면을 재현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국자감 전시실의 강의 장면 모형도>

시험을 보는 것 같다. 

 

 

<국자감 동무(임시전시실, 예술전시실)>

 

 

<국자감 서비정의 비>

이수와 비신 옆 장식이 화려하다.

 

 

<국자감 鼓亭>

 

 

<국자감 井亭>

우물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다.

 

 

<국자감, 공묘 사이의 건륭석경>

국자감 서벽과 공묘 동벽 사이에 있는 통로 같은 긴 공간에 최소한 170개 이상의 비가 진열되어 있다. 건륭석경이란 건륭제 때 유교 13경전의 문구를 비에 새긴 것이다. 상당히 큰 비석들을 일련번호를 매겨 세워 놓았는데 내가 파악한 것은 151번까지이고, 그 뒤로도 몇 십개가 더 있었다. 

중간 중간에 공자 제자들의 석상도 있고, 가장 안쪽에는 가로로 새긴 건륭제의 친필도 있다.

 

 

<공묘와 내부 시설들>

공묘는 원, 명, 청대에 각 황실에서 공자의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북경 공묘는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공묘 다음으로 큰 공자 사당이다. 원나라 때 처음 북경에 건립되었다가 황폐화되었고, 명나라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 중수되었다. 청나라 건륭제 때 재정비되고 중수되었다. 국자감이 비교적 잘 보존된데 비해 문화혁명 때 비판의 대상이었던 공자의 사상 때문에 직격탄을 맞은 공묘, 특히 비석은 부서진 것이 많다.

 

선사문 - 좌우 진사제명비 - 동비정2개, 서비정1개 - 공자상 - 좌우 진사제명비群 - 대성문 - 동비정5개, 서비정6개 - 대성전 - 숭성문 - 동, 서배전 - 숭성사가 남에서 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공묘나 동악묘 등의 사당에는 비석들이 원래 많지만 북경 공묘는 유난히 비가 많아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사문과 대성문 사이의 공간에 있는 진사제명비들은 진사의 이름을 적은 비인데 우리나라 진사처럼 지방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정도가 아니다. 지방에서부터 황제 앞까지 5번의 시험을 통과한 우리나라의 장원급제 수준의 수재들이다. 진사제명비는 명대와 청대로 나뉘어 있는데, 청나라 비 이수는 밋밋하고 간단한데 비해 명나라 비는 아름다운 이수 장식이 있어서 쉽게 구분이 된다.

 

대성문과 대성전 사이 마당의 동쪽 5개, 서쪽 6개의 비정 안에 있는 어비는 황제가 공묘를 찾아 참배하거나 중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대성전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청나라 말 광서제 때 증축한 것이다. 대성전 현판 아래에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도흡대동(道洽大同)을 비롯한 황제들의 친필이 걸려있고, 화려한 수를 놓은 감실 안에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외에 공자의 제자인 안위, 증자, 자사, 맹자 등의 5성과 이하 제자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전 뒤의 숭성사는 공자의 선조를 모시는 공간이다. 마침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이 붓글씨를 쓰거나 유생복을 입어보는 체험을 하느라 북새통이어서 관람을 포기하고 나왔다.

 

 

<공묘 선사문과 현판>

선사묘(先師廟) 현판은 원나라 때의 것이라고 한다.

 

 

 

<공묘 대성문과 공자상>

 

 

<공자상 뒤의 공묘 대성문 밖 답도>

대성문 안팎으로 답도가 있는데 대성전의 답도와 함께 조각된 용 조각이 수려하다.

 

 

<공묘 대성문>

 

 

<공묘 동쪽 비정>

 

 

<공묘 비정의 어제신건태학비(御制新建太學碑)>

 

 

<공묘 청나라 진사제명비>

 

 

<공묘 명나라 진사제명비>

 

 

<공묘 대성전과 답도>

 

 

<대성전에서 숭성사로 이어지는 문>

 

 

<공묘 숭성사 앞뜰에서 유생 체험을 하는 중국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