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 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번지.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미륵불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모습도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로 제작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이다. 이 미륵불은 높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높은 보개는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를 통해서 이 불상이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는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두 귀는 볼에 밀착되어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고, 굵은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法衣)은 오른쪽 어깨를 드리우는 우견편단으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 모양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수법과 부조화,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등은 충남 논산의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과 비슷하여 고려 초기 석불양식을 잘 보여준다.
**미륵부처 : 미륵보살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3번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상의 도솔천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현지의 안내문--
≪매산리 석불입상에 대한 현지의 또 다른 안내문≫
안성은 과거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미륵이 많아 '미륵의 고장'이라고도 불렸다. 안성 전역에 약 16구의 미륵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륵이 있는 도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미륵은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는 중앙관리들의 출장 시 숙소를 제공하던 역원(驛院)인 태평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이 미륵을 보호하고 있던 용화전 지붕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관할하는 원찰에서나 올릴 수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던 청기와가 두 장 올려져 있었는데 1930년 경 누군가가 훔쳐갔고 최근에 한 장의 청기와가 다시 올려졌다고 한다.
태평미륵의 수인은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태평미륵을 찾고 있다. 또한, 미륵불의 돌을 갈아 먹거나 돌을 떼어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미륵불 허리 뒤에 돌을 떼어낸 흔적이 남아 있어 기자(祈子)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매산리 미륵당>
누각 안에 매산리 석불입상이 모셔져 있다. 고려 초기의 불상임에도 보존상태가 좋은 점과 아무렇게나 툭툭 친 듯 거칠게 다듬은 누각을 받친 돌기둥들이 인상적이었다.
<매산리 석불입상과 앞의 미륵당 오층석탑>
매산리 미륵당 5층석탑 : 향토유적 제20호.
미륵당 내의 석불입상 앞에 세워져 있는 화강암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이 석탑에서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993년이고, 석탑 전체 높이는 1.9m이다.
<매산리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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