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함양군 서상면 논개 묘

큰누리 2017. 6. 26. 22:11

<논개 묘>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

논개(論介)의 성씨는 주씨이며, 전라북도 장수에서 출생했다. 논개 묘 소재지인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은 전북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며 의암 논개 생가 터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장수군의 의암사적보존회와 경남 문화재 전문위원 및 향토사학자들이 십수 년에 걸친 현장 답사와 고증을 거쳐 1976년에 이 묘를 발견했다고 한다.

 

1593년 6월, 진주성 함락 후 이곳이 논개 묘라고 구전된 이유는 의병 몇 명이 논개의 남편인 경상우병사 최경회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평장해두었고, 진주사람들이 배를 타고 논개의 시신을 수습해 평장을 했다. 그 뒤 호남 의병들이 관을 두 개 만들고 두 사람의 시신을 고향인 장수로 운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더운 여름에 시신 보존이 어려워서 장수로 가는 길목이자 논개의 부모가 일시 거주하고 신안 주씨들이 유지인 방지마을에 안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논개 무덤은 친정 후손들에 의해 감춰져 오다가 전북 장수군 의암사성역화 추진위원회에 의해 아래쪽이 논개 무덤, 위쪽이 최경회 절도사의 무덤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한편 논개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향토사학자도 있다. 내용은 논개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장수군에 있는 비석에는 논개는 최경회(1532~1593)의 소실이며 최경회가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갔을 때 동행해서 진주성 함락일인 1593년 6월 29일까지 함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경상우병사는 조대곤이다. 

장수군의 최경회 현감 불망비에는 1577년에 장수현감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논개 투신 당시 나이가 19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3살 때 소실이 됐다. 따라서 논개는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의 논개 사당 의암사(義巖祠)>

사당과 묘지는 성역화 사업으로 잘 단장되었으나 현장에 안내문이나 안내서가 없어서 아쉬웠다.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의 논개 부부 묘> 

 

 

 <논개 부부 묘에서 내려다 본 논개 사당 의암사(義巖祠)>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의 논개 부부 묘>

앞이 논개의 묘, 뒤가 남편인 최경회장군의 묘이다. 1980년대 후반 함양군에서 성역화 사업으로 봉분을 다시 만들고 비석을 세웠는데 논개 묘의 규모는 높이 1.2m, 직경 5.4m, 길이 5.3m에 남향이다.

 

논개 묘에는 가로로 '의암신안주씨지묘(義巖新安朱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떼를 새로 입힌 최경회장군 묘에는 '충의공증좌찬성행경상우병사해주최공경회지묘(忠毅公贈左贊成行慶尙右兵使海州崔公慶會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뒤에서 본 최경회장군, 주논개 부부 묘>

 

 

 

<논개 묘 동쪽 아래의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

논개와 최경회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운구해 온 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9년 12월 함양군에서 세운 추모비이다.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 입구>

입구에 매실나무와 으름덩굴이 많다.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 입구의 으름덩굴 꽃>

꽃 속이 자주색 작은 바나나처럼 처럼 생긴 것은 암꽃, 둥근 연분홍 공처럼 생긴 것은 수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