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함양 남계서원(濫溪書院)

큰누리 2017. 7. 7. 01:02

<함양 남계서원(濫溪書院)>

지정 : 사적 제499호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 강익(介菴 姜翼)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 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을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헐리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지 안내문--

 

 

<함양 남계서원 홍살문>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표식이다. 사진의 홍살문 앞 왼쪽 밖에 검정 비석 형태의 하마비가 있다.

 

 

<함양 남계서원의 전체적인 모습>

서원 정문(외삼문)인 누각형태의 풍영루 때문에 전면에서는 서원의 전체적인 구조 파악이 어렵다. 약간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보면 가장 위쪽의 사당까지 잘 보인다.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사진 중앙의 신축건물까지는 남계서원 관리소이고, 왼쪽 끝에 조그맣게 보이는 건물 군락이 청계서원이다.

 

 

<함양 남계서원 배치도>

다른 서원과 구조가 비슷하지만 서재 앞에 묘정비(각)가 있고, 입구 좌우에 연지가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함양 남계서원 외삼문인 풍영루 누하(출입구)>

몇 개의 석주와 목재로 탄탄하게 잘 짜맞춘 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함양 남계서원 안에서 본 출입문(외삼문) 풍영루>

 

 

<함양 남계서원 동,서재 앞에서 돌아본 풍영루쪽>

오른쪽 중간의 건물은 묘정비각이다.

 

 

<함양 남계서원 東蓮池>

 

 

<함양 남계서원 西연지>

 

 

<함양 남계서원 묘정비>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인 김종후가 지었다.

 

 

 

<함양 남계서원 강학공간 배치도>

 

 

<함양 남계서원 강학공간>

중앙은 강당(명성당, 明誠堂), 사진 오른쪽은 동재(양정재, 養正齋), 왼쪽 앞은 묘정비(廟庭碑), 묘정비 뒤에 비계가 있는 곳은 서재(보인재, 輔仁齋)이다. 남계서원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現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이 건립되고 9년 뒤인 1552년에 개암 강익과 함양 유림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우선 향내의 유생들이 쌀과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을 위한 여론을 환기하였고, 당시 함양군수 서구연이 강당 건립을 위한 물자와 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강당을 조성하던 중 서군수가 부친상을 당하여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559년 부임한 군수 윤확의 지원으로 공사를 재개한지 7년 만인 1559년에 완성하였다. 1561년 모든 시설을 갖추고 일두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39세였던 강익이 초대원장이 되었다.

 

 

<함양 남계서원 동재(양정재, 養正齋)와 애련헌(愛蓮軒)>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재'라고 한다. 동재는 양정재(養正齋)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경에 나오는 '교육으로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누마루인 애련헌(愛蓮軒)이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의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누 이름을 애련헌과 영매헌이라고 지었다.

 

 

<함양 남계서원 서재(보인재, 輔仁齋)와 영매헌(詠梅軒)>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라고 한다. 서재는 보인재(輔仁齋)라고도 하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서 벗을 사귀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누마루 형식의 영매헌(詠梅軒)이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 만하다'라는 뜻이다.

 

 

<함양 남계서원 강학공간 명성당(明誠堂)>

강당은 敬과 論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明誠堂)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는 뜻이다. 강학의 영역을 구성하는 중심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동쪽) 방은 거경재(居敬齋)라 하며 敬에 居하여 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고, 오른쪽(서쪽) 방은 집의재(集義齋)라고 하며 '호연지기는 道와 짝이 되는 義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함양 남계서원 경판고(장판각)>

경판고는 '장판각'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육한 어정오경(御定五經) 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관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체는 나무로 구성한 판벽으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가운데 판벽이 있다.

 

 

<함양 남계서원의 아름다운 담장>

담장 옆에 슬쩍 자리 잡은 오동나무의 운명이 궁금해진다.

 

 

<함양 남계서원 사당>

 

 

<사당쪽에서 본 함양 남계서원>

평지에서 본 것과 달리 서원이 아니라 아담하고 소박한 민가처럼 보인다. 왼쪽의 경판고만 확실히 보인다.

 

 

<함양 남계서원 사당문(내삼문)>

 

 

<사당문(내삼문)을 통해 본 남계서원>

 

 

<남계서원 사당문(내삼문)을 옆에서 본 모습>

 

 

<함양 남계서원 제향영역(사당) 배치도>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당과 전사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잡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원 건축 배치 형식이다. 사당은 실질적인 서원 향사를 거행하는 곳으로, 이곳에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이곳은 어느 공간보다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어서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성현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곳이다.

 

사당 오른쪽 담장 밖에 별사가 있었는데, 서원 건립 후 뇌계 유호인(擂溪 兪好仁)선생과 송탄 정홍서(松灘 鄭弘緖) 선생을 모셨으나 서원 철폐령 때 헐렸다.

 

 

<함양 남계서원 제향영역의 사당>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숙종 1)에 동계 정온 선생을, 동쪽은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강익 선생은 정온 선생의 외삼촌이다. 

 

 

<함양 남계서원 제향영역의 사당과 전사청>

 

 

<함양 남계서원 제향영역의 전사청>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전사청은 제향영역 내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제향영역 밖 독립된 영역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전사청이 건립되지 않은 사당은 고직사에서 제향을 준비하거나 외부에서 준비하기도 한다.

 

 

<정면 서쪽에서 본 함양 남계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