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함양 일두고택(정여창 고택)

큰누리 2017. 7. 8. 19:33

내가 일두 (정여창)고택을 항상 눈여겨 본 이유는 젊은  날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제작된 최수지가 주연인 <토지>의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처음 대하소설 <토지>를 접한 직후에 나는 "뿅" 가서 근 열흘을 잠도 안 자고 미친 듯이 토지를 완독했다.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고, 그것을 소설에 표현할 수 있구나, 세익스피어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박경리 선생도 표현하는구나' 등등...

젊은 날의 내게 박경리 선생의 소설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전율을 잊을 수 없고, 그것을 경험했던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동방오현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의 일생≫

 '左안동, 右함양'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 안동(安東)과 서쪽 함양(咸陽)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정여창 선생은 함양을 대표하는 인물로 호인 '일두(一蠹)'는 '한마리 좀벌레'란 뜻이며 호의 뜻처럼 평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정여창 선생의 본관은 경남 하동인데 증조부인 정지 때부터 처가가 있는 함양에서 살기 시작했다. 정여창(1450~1504) 선생은 아버지 정육을,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서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1450년에 태어났다. 18세 때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에 출전했다 전사하자 선생은 한 달간 전쟁터를 돌며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

이후 정여창은 함양군수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송석충, 정광필, 김일손 등과 교유하게 된다.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한 정여창은 세자였던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성격이 맞지 않아 관계가 좋지 않았다. 1498년 친구인 김일손의 사초로 시작된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1504년 병사한다.

 

무오사화는 친구 김일손이 사간원에서 일할 당시 중신인 이극돈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여 그의 분노를 사게 되어 발생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유자광과 가세해 신진사림을 대규모로 숙청했는데 이를 무오사화라 한다. 간언을 하던 신진사림 세력을 불편해 하던 연산군은 *조의제문(弔意帝文)을 써서 자신의 윗대(세조-예종-성종) 및 자신을 모독한 김종직을 역적으로 몰아 부관참시하고, 제자였던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을 참수했으며, 정여창 등은 유배를 보낸다.

 

귀양지인 함경도 종성에서 병사한 정여창의 시신은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두 달만에 수습되어 함양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슭에 안치되었다. 이후 고려의 백이정-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적통으로 숭상받게 된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성균관을 비롯하 여 전국 234개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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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조의제문(弔意帝文) 

초한의 패왕 항우가 희왕(義帝)을 살해해 물에 던진 사건을 김종직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살해한 사건에 빗대며 희왕(義帝)를 조문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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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5현은 우리나라에서 배출된 5명의 현인으로 일두(一蠹) 정여창, 사옹(蓑翁) 김굉필, 정암(靜庵) 조광조, 회재(晦齋) 이언적, 퇴계(退溪) 이황을 말한다. 

일두 정여창(鄭汝昌) : 1450~1504

사옹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정암 조광조(趙光祖) : 1454~1519

회재 이언적(李彦迪) : 1491~1553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

 

 

≪함양 지곡면 개평리 일두고택≫

지정 :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조선 5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현재의 집은 그가 죽은 후 선조 무렵(1570년대)에 건축된 것이다. 10,000㎡ 정도의 넓은 집터에는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어 양반대가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춘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솟을대문에는 5개의 충신, 효자 정려패가 걸려 있어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이 집은 공간구획 배치가 최적화되어 있고,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옛날 모습대로 제자리에 보존되고 있어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

 

 

<일두고택 정문인 솟을대문>

 

 

<일두고택 솟을대문의 정려패>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해 내리는 패로 다섯개가 걸린 집은 전국에서 일두고택이 유일하다. 정려패는 효자 4명과 충신 1명으로 가장 위의 것은 일두 선생의 할아버지 것이며 나머지는 후손의 것이다.

 

 

<일두고택 배치도>

 

 

<일두고택 솟을대문과 문간채>

 

 

<일두고택 사랑채>

 

 

 

<일두고택 사랑채와 누각(탁청재), 석가산>

약간 솟은 화단같은 소나무 주변은 석가산이다. 소나무 뒤로 보이는 건물은 객사(안사랑채)이다. 소나무 주변과 토방 아래의 긴 잎 식물은 늦여름에 연한 분홍색의 꽃을 피우는 상사화인데 제철에 가면 장관이다.

 

상사화는 이름처럼 잎이 먼저 나왔다가 완전히 진 후에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기 때문에 서로 만날 일이 없어 붙은 이름이다. 2011년 처음 개평마을을 방문했을 때, 어디에서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는 고택 마당을 가득 채운 상사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2011년 9월, 개평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개평마을에서 촬영한 상사화>

많은 사람들이 불꽃 같은 색으로 우산처럼 피는 꽃무릇을 상사화로 착각하는데 원래 상사화는 바로 이 식물이다.

 

 

<일두고택 사랑채와 안사랑채(객사)>

 

 

<정면에서 본 일두고택 사랑채와 글귀들>

사랑채 왼쪽 처마 안에 '문헌세가(文獻世家)'라 쓰인 현판이 보인다. 중앙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처마 밑에 쓴 '충효절의(忠孝節義)'란 글귀가 보인다.

 

 

 

<일두고택 일각문>

사진 오른쪽의 사랑채와 왼쪽의 곳간 사이에 있다. 일각문을 넘어가면 중문이 앞에 있고,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간다.

 

 

<일두고택 일각문 앞(사랑채 옆)의 기와편에 심은 식물들>

수키와 조각에 담긴 다육식물과 소담스러운 식물들이 고택과 잘 어울린다.

 

 

 

<일각문을 넘어서 (중문쪽에서) 되돌아 본 일각문과 간이 화장실(?)>

두 번째 사진은 일각문 바로 옆에 있는 남자들이 소변을 보는 간이 화장실이라고 TV의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고택의 간이 화장실이란 존재도 신기하고, 처마를 구성하는 휘어진 나무와 자연스러운 연결도 신기하다. 

 

 

 

<일두고택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문 너머 중앙의 건물은 안곳간, 오른쪽의 건물은 사랑채에 이어진 중문간채이다. 중문간채에서는 집사가 거처하며 안채를 드나드는 손님을 관리했다.

 

 

<중문에서 본 안채>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인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으면 그 정도로 파이는지, 그 정도로 파이면 새 것으로 갈 법도 하건만 그대로 둔 점에서 요즘 세대와 다른 진득함이 느껴진다.

 

 

<일두고택 안채 배치>

굴뚝 뒤의 왼쪽 건물은 안곳간, 중앙은 아래채, 오른쪽 건물은 안채이다. 안채는 일두 정여창 선생 서거 후 약 100년이 지난 뒤에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 350년이 넘었다. 사랑채가 동쪽을 가려주기 때문에 안채의 배치 구조는 다른 건물과 어울려 'ㅁ자형'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대청은 문중의 대,소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기도 하고, 잔치도 열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넓게 만들었는데 남쪽 지방 주택의 특징인 칸살이 넓고 기둥이 낮으며 잘 생긴 휘어진 나무로 대들보를 만들어 권위보다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친근감이 든다.

 

안채의 오른편(사진의 중앙 건물)에 위치한 아래채는 며느리 방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 아래채로 내려가서 거주하였으며 부모 중 한 분이 살아계실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툇마루 난간을 설치한 것은 혹시 발을 잘못 디뎌 낙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일두고택 안채 툇마루>

 

 

<안채와 중문간채 사이의 공간>

왼쪽은 안채, 오른쪽은 사랑채 뒤쪽에 붙은 중문간채이다. 그 사이의 중앙 왼쪽문은 안채 뒤의 장독대로 들어가는 문이다. 중앙 오른쪽의 태극무늬가 있는 문은 사당의 문으로 그 오른쪽 담장 뒤로 사당이 살짝 보인다. 

 

 

<안채 뒤쪽의 장독대>

왼쪽 건물은 안채, 오른쪽 담장 너머의 건물은 사당이다. 

 

 

<일두고택 사당>

일두고택에서 비공개인 곳은 사당과 그 옆에 있는 곡간인 것 같다. 일두고택은 2011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인데 처음엔 문화재나 주택에 대해 잘 모를 때라 보고도 몰랐고, 이번에는 좀 알긴 하지만 일행이 있어서 둘러볼 시간이 부족했다.

사당에는 일두 선생과 사랑채 주인의 4대조를 봉안하고 있으며, 제사 때에는 위패를 사당 밖으로 모셔 제례를 올린다고 한다.

 

 

<일두고택 안채와 중문간채 사이>

왼쪽은 안채, 오른쪽은 중문간채이고 중앙에 객사(안사랑채)로 이어지는 특별한 이름이 없는 쪽문이 있다. 쪽문 뒤로 보이는 중앙의 건물은 객사(안사랑채)이다.

 

 

<객사와 중문간채 사이의 쪽문>

몇 곳에 고풍스런 문과 문고리가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이것만 촬영했다. 이 문 앞 왼쪽에 사랑채가, 오른쪽에 객사(안사랑채)가 있다.

 

 

<일두고택 곡간 문과 문틈으로 본 곡간>

곡간은 사당과 객사 사이에 있는데 고택 안에서는 연결이나 출입이 불가능하다. 일두고택에 곳간, 안곳간, 곡간이 모두 있어서 이 참에 정확히 짚어보았다.

*곳간과 곡간의 차이  : 곳간(庫間)은 물건을 간직하여 두는 곳, 즉 일반적인 창고를 말하고 곡간(穀間)은 곡식을 보관해 두는 곳간, 즉 곡식 보관 창고이다. 따라서 곳간이 더 넓은 개념의 창고이다.

 

 

 

<일두고택 객사(안사랑채)>

명칭으로 보아 평시엔 안사랑채로 사용하고, 손님이 오면 객사로 사용했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밖에 있지만 앞쪽 담이 트여 있어 바로 연결된다.

 

 

<일두고택 객사 토방 위 댓돌의 흰고무신 두 켤레>

 

 

<일두고택 사랑채와 객사(안사랑채)>

 

 

<일두택 솟을대문 앞 노둣돌에 세워진 드라마 촬영지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