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터키 여행20. 트로이 목마와 유적, 게리볼루항구에서 이스탄불

큰누리 2018. 11. 25. 01:06

<2018. 8/6. 7일째 일정1>

트로이 관람 후 페리호에 승선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느 날보다 이른 4시 기상- 4시 30분 식사- 5시 30분 출발이었다. 트로이 관람- 랍세키에서 페리호로 게리볼루行- 점심식사이스탄불로 이동(5시간)- 이스탄불 VIP헬기 투어이스탄불 탁심광장, 이스티클랄 거리 관광- 이스탄불 야경 투어- 이스탄불 더블 트리힐튼 호텔 투숙. 

 

 <트로이 전쟁과 황금사과, 파리스의 심판>

제우스가 축제를 열면서 불화의 여신 초대를 빠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불화의 여신은 보복으로 황금사과를 던지며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증정한다 하여 여신끼리 불화를 조장했다트로이의 프리아모스왕의 아들은 셋으로 헥토르, 둘째, 파리스였는데, 파리스는 불화의 원인이라는 예지 때문에 버려진 후 목동으로 성장하였다. 최고의 미인을 뽑는 심판관으로 선정된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아프로디테(미의 여신)의 말에 황금사과를 그녀에게 주었다. 사과를 받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파리스는 당시 스파르타 미넬라오스의 왕비이면서 최고의 미녀인 헬레네에게 반해 트로이로 동반 도주했고, 그 결과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 9년에 걸친 전쟁이 발발했다.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전쟁은 그리스 문호 호머(호메로스)가 쓴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통해 전해지게 되었다. 길고 긴 전쟁 중에 많은 영웅들이 탄생하거나 죽고, 그리스의 항복을 가장한 목마 선물 세례에 속아 트로이는 결국 그리스에 패배하고 만다.

패전 후 불화의 장본인인 트로이의 파리스가 살아남아 정착한 곳이 프랑스 파리라고 전한다. 마지막 내용은 믿거나 말거나...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과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호머의 <일리아드>를 읽고 '트로이 유적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 이라 믿고 1870년 트로이를 발굴하기 시작했다주변의 미치광이라는 평에 조급해진 쉴레이만은 트로이의 유적을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발굴하지 않고, 지상으로부터 2층까지 파다가 옆구리로 파 들어갔다9층까지 있던 트로이의 유적은 층별로 내려가며 발굴하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지반이 무너지면서 유적이 섞이고 파괴되어 엉망이 되었다. 1881년 슐리만이 출토된 유물을 독일로 밀반출하여 전시하므로써 트로이 문명이 세상에 알려졌다.

 

 <트로이 목마와 유적지>

트로이의 목마는 폐허 같은 트로이 유적의 썰렁함을 메꾸기 위해 현대에 세운 것이라 유적으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다. 덴마크의 인어공주상, 벨기에의 오줌싸개상과 더불어 터키의 트로이 목마 세계에서 별 볼 일 없는 3관광지로 불릴 정도이다

목마의 긴 다리 길이 만큼 배 가운데에 뚫린 사다리를 따라 목마 안으로 올라가 보니 몸은 2으로 되어 있고, 각층에 네모난 문이 양쪽으로 뚫려있었다다리 부분을 제외하면 2층의 작은 목선 같았고, 관광객들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면 밖에서 일행이 사진을 찍었다층을 연결하는 사다리는 가파른데다 한 개만 있어서 오르내리는 것을 교대로 해야 했다목마 주변에는 깨진 파편을 이어붙인 토기와 돌기둥 등의 석재들이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낮은 언덕에 무너져 내린 큰 벽돌 같은 석재와 네모난 방만 몇 개 있는 트로이 유적이 있었는데 유적지가 아니라 폐허 같았다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까지 되었지만 터키에서 가장 볼거리가 빈약한, 누가 봐도 '왔노라, 보았노라' 식 관광이었다.

 

트로이 유적 관람10:30분에 랍세키에서 게스타스 페리호 탑승 - 30분 마르마라 해협 - 유럽쪽 터키 땅인 게리볼루(Gelibolu, 갈리폴리)에 도착했다. 파도가 잔잔하고 바다는 새파란 쪽빛이었다게리볼루 항구에서 먹은 고등어 구이(케밥) 우리나라의 안동 간고등어처럼 깊은 풍미가 있어 터키 여행 중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다. 식사 후 잠깐 게리볼루항을 구경했는데 세계 2대 지도를 만든 Piri Reis 동상과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동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자그만치 5시간을 달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터키에서 산불이 잘 나지 않는 이유 불에 강한 올리브나무를 요소요소에 심고, 산 중심부를 넓은 길처럼 밀어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트로이의 목마를 보고난 후 산등성이를 돌면 왼쪽(서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차나칼레 해협으로 살라미해전, 그리스 영국군과 해전이 발발한 곳이다. 차나칼레(다르다넬스) 해협은 영화 <300>에 나오는 살라미스 해전의 무대이다차나칼레 이전의 바다는 에게해이다.

 

 

<아이발릭 아시아 파묵 터미널 호텔의 달러화, 유로화, 터키 리라의 환율과 호텔 이용료>

2018. 8/6.월요일의 환율은 1달러 = 4.20 터키 리라, 1유로 = 5.00 터키 리라였다(1달러 = 1,250원). 우리가 머물 당시에 미국의 경제적 압력으로 터키 리라의 환율이 낙동강 오리알처럼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특별한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트로이 유적 매표소에 있는 트로이 유적에 대한 안내>

유명세에 비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정말 빈약하다.  별 볼 일 없는 세계 3대 유적지란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세계 3대 별 볼일 없는 볼거리라는 트로이의 목마>

 양면과 꼬리쪽을 촬영한 것으로 밑에서 본 꼬리가 털이개처럼 독특하다.

 

 

 

 

<트로이의 목마 내부>

 

 

 

<트로이의 목마 주변에 흩어진 유물들>

 부서진 토기를 붙인 것, 지붕이나 기둥으로 보이는 석재 등인데 양이나 질 모두 빈약하다.

 

 

 

<폐허처럼 썰렁한 트로이(Troy)의 유적지>

트로이는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로이 [Troy] (두산백과)에서 퍼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는 게리볼루행 게스타스 페리호> 

트로이- 랍세키(Lapseki) 항구에서 게스타스 페리호 승선- 30분 후 게리볼루(Gelibolu, 갈리폴리) 도착.

 

 

 

<게리볼루(Gelibolu, 갈리폴리) 항구>

랍세키(Lapseki) 항구에서 출발한지 30분만에 유럽쪽 터키 땅인 게리볼루(Gelibolu) 항구에 도착했다.

 

 

 

<게리볼루(Gelibolu) 항구의 고등어 케밥집과 맛있는 고등어 구이(케밥)>

이 식당에서 우리나라 안동 간고등어와 흡사한 고등어구이를 터키 여행 중 가장 맛있게 먹었다.

 

 

 

 

<게리볼루(Gelibolu) 항구 풍경들>

 

 

 

 

<게리볼루(Gelibolu) 항구의 Piri Reis(1470~1553) 동상>

본명은 Ahmet Muhiddin Piri이다. Piri Reis(1470~1553) 오스만 제국의 해군으로 현존하는 2개의 세계지도 중 1개를 1513년에 제작했다. 가젤의 양피지로 만든 지도 중 인도양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른쪽은 없어지고, 대서양을 중심으로 그린 왼쪽 1929년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 

 

 

<게리볼루항의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파샤 터키 초대 대통령 동상>

1차 세계대전 때 이곳에서 연합군과 9개월 동안 전투가 계속되고 양쪽에서 50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아타튀르크 장군이 이곳에서 연합군을 격퇴했다. 

 

 

<게리볼루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길의 차창 밖, 휴게소 풍경>

그 흔한 터키의 해바라기 밭을 유일하게 건진 사진이다. 터키의 해바라기는 우리나라 해바라기와 달리 성인 배꼽 정도의 높이이다. 산 중앙을 가로지르는 바리깡으로 민 것 같은 도로는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터키만의 방화 저지선(!)이다.

 

 

 

<이스탄불 외곽의 보스포러스 해협>

 

 

<오랜 길을 돌아 마침내 도착한 이스탄불>

 이스탄불- 베이파자르- 카파도키아- 안탈리아- 파묵칼레- 에페스- 쉬린제- 트로이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여정은 4,800km였다. 서울-부산 간 거리가 고속도로 기준으로 450km라고 하니 대략 10배가 훨씬 넘는 거리를 8일 동안 이동한 것이다. 거리는 당연히 차로 이동한 거리 계산한 것이다.

 

 

 

 

<이스탄불의 콜로세움을 닮은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