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강화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

큰누리 2020. 9. 25. 13:42

<강화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

지정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7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인 장사각(藏史閣)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璿源譜閣)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옮겼다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 1년(1660) 이곳으로 옮기고, 오른쪽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을 함께 지었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이 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학교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 후 옛 현판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을 다시 달았다.

 

 

<문이 굳게 잠긴 강화 정족산사고 정문>

현판이 따로 없어서 '정문'이라고 임의로 표현했지만 맞는지는 모르겠다. 복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주사고지에 비해 규모도 작고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강화 정족산사고 정문의 문고리>

 

 

<강화 정족산사고 정문(오른쪽)과 전등사 소속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

전등사 요사채 용도로 쓰이는 건물일 것으로 추측한다. 정문 앞, 요사채(옆)이 '전망이 좋은 곳'으로, 멀리까지 강화도 조망이 가능하다. 요사채 앞에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규모로 많이, 그리고 흰눈이 내린 것처럼 촘촘하게 으아리꽃이 피어있었다.

 

 

<정족산사고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

장사각(藏史閣)정족산사고 정문을 기준으로 앞에서 왼쪽(서쪽)에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이다. 두 번째 사진 선원보각(璿源譜閣)은 오른쪽(동쪽)에 있으며 왕실 족보를 보관한 곳이다.

 

 

 

<담 너머로 본 정족산사고 장사각(藏史閣)>

 

 

 

<담 너머로 본 선원보각(璿源譜閣) 출입문(으로 추정)>

 

 

<정족산사고 선원보각(璿源譜閣) 쪽(동쪽) 담장>

전등사 입구의 삼랑성(정족산성) 남문인 종해루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 돌면 이곳 정족산사고 동쪽 담장이 나온다. 둘레길은 이곳으로 연결되고, 사고 앞에서 전등사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언덕에 잔디만 남은 정족산성 진지 가 있다.

 

정족산성은 <고려사>에 의하면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지었기 때문에 삼랑성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자국 신부들의 순교를 이유로 병인양요를 일으키고 외규장각의 의궤 등을 약탈하자 양헌수는 정족산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프랑스의 올리비에 대령이 이끈 프랑스 함대와 싸워 이긴 곳이다. 양헌수 기념비는 정족산성 입구 안쪽에 있다.  

그 때 약탈 당한 의궤는 '그림이 예뻐서(그림책인 줄 알고)' 무식한 프랑스인들의 손에서 불태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프랑스에 귀중하게(!) 보관되었다가 몇 년 전에 장기 대여 형식으로 긴 노력 끝에 불완전하게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정족산사고 뒤쪽과 북서쪽 담장 모서리의 소나무>

첫 번째 사진의 건물은 사고 서쪽에 위치한 장사각(藏史閣) 뒤쪽이다.

 

 

 

<사고 정문 서쪽 담과 장사각(藏史閣) 옆면>

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은 첫 번째 사진에서 정문(앞)쪽으로 나아가면서 본 모습이다.

 

 

 

 

<정문 왼쪽(서쪽)에서 본 조선왕조실록 보관 창고인 장사각(藏史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