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22.05. 당진 솔뫼성지-김대건 신부 기념관

큰누리 2022. 5. 27. 21:24

≪솔뫼 성지(The shrine of Solmoe)≫

-한국 최초의 사제 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 하여 순우리말로 '솔뫼'라 이름 붙여진 곳으로, 한국 최초의 사제인 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자리이다. 솔뫼성지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의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비오(178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성 김재준 이냐시오(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46년 서울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장소로,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나 1836년부터 마카오에서 사제수업을 받았으며, 1845년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 1846년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가톨릭 교회의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PS : 군문효수 조선시대에 대역죄를 지은 국사범들의 목을 잘라 그 목을 올빼미가 매달린 것처럼 군문(軍門)에 높이 매달던 형벌이다. 목을 벤 것(참수)도 모자라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걸었으니(효수) 죽은 자는 재차 능멸 당하고, 보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극형으로 천주교 박해 당시 주로 외국인 신부를 처형할 때 사용되었다. 프랑스인 신부들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김대건 신부 등이 군문효수되었다.

 

 

<솔뫼성지 입구>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성지 입구가 있고 사진의 풍경(!)이 펼쳐진다. 맨 앞에 화려한 그래피티가 있고, 그 뒤에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가 한복을 입은 아동들과 손을 잡은 인물상, 각종 안내문이 있다.

 

 

 

 

<충청남도의 천주교 성지와 '당진 걷기 좋은 길(버그내 순례길)' 안내문>

버그내 순례길은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 솔뫼성지에서 출발하여 다블뤼 주교 은거지였던 신리성지까지 13km의 구간에 조성된 순례길로 ‘버그내’는 삽교천의 옛 지명이며 과거에는 삽교천이 큰 하천에 버금간다고 하여 버그내라 불렸다. 

코스는 원미리성지-신평성당- 솔뫼성지- 합덕성당- 합덕제 중수비- 복자 원시장, 원시보생가 터(우물)- 무명 순교자의 묘- 신리성지(다블리주교 유적지)- 황무실성지이다.

 

 

 

<솔뫼성지로 들어가는 문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발 조형물>

발 조형물은 3개의 문 중 중앙문과 오른쪽 문 사이에 있다.

 

 

 

<솔뫼성지 안내도>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7번 '매듭을 푸시는 성모 경당'을 놓쳤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앞의 성상각>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입구 오른쪽의 김대건 신부 동상>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은 김대건 신부와 외국 신부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탔던 라파엘호를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의 김대건 신부 초상과 그 앞의 길냥이>

당진 여행을 하는 동안 기르는 고양이와 길냥이들을 참 많이 보았는데 눈치를 많이 보는 서울의 길냥이들보다 대체로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끔찍하게 도로에서 로드킬을 당한 길냥이도 두 마리나 보았다. 쏜살같이 앞으로 질주하는 개와 달리 어떤 상황에 갑자기 부닥치면 멈춰서 쭈뼛(두리번)거리는 고양이의 습성 때문이라고 한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의 전시 '조선을 바라보다'>

 

 

<조선의 지리학자>

김대건 신부는 조선의 산천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려냈다.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청한 물품들은 지도 제작을 위해 필요한 도구였을 것이다. 그의 활동과 증언들 속에서 조선의 지리학자 김대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지도 제작을 위해 김대건 신부가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요청한 편지이다. 나침반(컴퍼스), 철필, 세계지도(특히 황해, 중국,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이다.

 

 

<재현한 김대건 신부의 봇짐>

 

 

<김대건 신부가 지도 제작을 위해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요청한 물품들>

나침반(컴퍼스), 철필, 세계지도(특히 황해, 중국,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이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을 때 타고 중국을 오간 라파엘호>

1845년 1월, 김대건은 서울에서 작은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신자를 모아 중국으로 함께 떠났다. 김대건은 성모 마리아 상본과 나침반 하나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항해 끝에 상해에 도착했고, 8월 17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선장 김대건은 망가진 목선 라파엘호를 수리하여 페레올 주교와 라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길에 올랐다. 폭풍우와 역풍을 겪으며 뜻하지 않게 제주도까지 밀려갔던 라파엘호는 1845년 10월 12일 마침내 강경에 도착하였다. 그의 신앙과 지식과 경험이 죽음의 항해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위의 항해 과정을 리브와 신부에게 적어 보낸 서한>

1845년 11월 20일, 험난했던 위의 귀국과정을 스승인 리브와 신부에게 적어 보낸 편지이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의 전시 '세상을 바라보다'>

김대건은 16세에 유학을 떠났다. 사제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중국과 동남아 곳곳을 여행하며, 당시로서는 첨단의 신문물인 서양 과학기술을 직접 체험했다. 또한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한 중국이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19세기 중엽 당시, 김대건은 조선에서 가장 폭넓고 선구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1842년 12월 9일 김대건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김대건이 통역으로 6개월 동안 승선한 에라곤호와 같은 종류로 추정되는 함선>

에라곤호는 1836년에 건조된 3등급 프리깃함으로 40여문의 대포를 장착하였고, 약 400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김대건은 프랑스 해군 세실 함장의 통역으로 발탁되어, 1842년 2월 16일부터 6개월 동안 에라곤호에 승선하였다. 당시 에라곤호는 첨단기술의 상징이자 근대 문명의 집합체였다.

마카오와 필리핀 유학에 이은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조선에서 누구보다도 넓고 선진적인 시야와 지리적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김대건의 조선 국경 탐사와 남경조약 참관>

훈춘기행-조선 국경을 탐사하다.

김대건은 1844년 2월 5일부터 4월까지 중국에서 조선으로 입국하는 길을 탐색하기 위해 만주의 소팔가자에서 두만강 국경에 이르는 왕복 1,600km(4,000리)의 북방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 장춘에서 장책을 넘어 만주를 횡단하고 길림 영고탑, 마롄호, 훈춘으로 가는 여정과 조선의 두만강 국경도시 경원에서 신자들과 만난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조선국경의 지형과 지리, 자연환경, 역사, 사람들의 성향과 풍습, 특산물 등에 대한 정보를 조선 청년의 시선으로 해박하게 표현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의 전시 '내포를 바라보다'>

김대건은 내포 솔뫼에서 태어났다.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들과 강인한 생명력으로 역동하는 바다, 그리고 피로 지킨 신앙이 어우러진 내포는 김대건이 바라본 첫 번째 우주였다. '내포'는 현재 당진,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등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을 말한다.

 

1784년 한국천주교가 창설되고, 예산 여사울 출신 이존창이 내포의 첫 신자가 된 이래로 박해기에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가 충청도 내포에서 나왔다.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의 수도 가장 많아서 '순교자의 온상', '조선의 카타콤바(Catacombs)'로 불렸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선조들의 신앙이 깃든 성지와 사적지가 국내 어느 곳보다도 많다.

 

PS : 카타콤바(Catacombs) - 로마 시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하무덤이자 박해 시의 피난처로 비밀교회를 뜻하기도 한다.  

 

 

 

 

<김대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와 「조선전도」>

선교사들에게 조선 입국과 조선 내 포교활동을 위해 정확한 지리정보가 필요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월 중순에서 4월 7일 사이에 「조선전도」를 제작하여 마카오의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지도에는 관부의 위치,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 변문까지의 도로, 한강 하류를 포함한 서해안 일대의 해로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서울과 독도가 각각 'Seoul', 'Ousan'으로 표기되어 있고, 모든 지명이 한글 발음에 따라 로마자로 표기된 최초의 지도이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의 교회>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무언가를 위한 준비 중인지 내부가 어수선했다. 솔뫼성지에서 가장 먼저 이곳을 둘러본 후 12제자상과 아레나를 보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