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22.07. 부여 정림사지와 오층석탑, 석조여래좌상

큰누리 2022. 7. 25. 17:33

≪부여 정림사지(扶余 定林寺址)≫

지정별 : 사적 제301호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동남리 254.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지 안내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余 定林寺址 五層石塔)

국보 제9호.

이 석탑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옮긴 이후에 세운 것으로, 백제 석탑의 시원 양식을 잘 보여준다. 탑 모서리에 세운 민흘림기둥이나 탑신석과 넓은 지붕돌을 따로 가공해서 조립한 것은 이 탑이 목조건축물을 모방했음을 알려준다. 균형 잡힌 형태와 비례,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한다. 1층 탑신석 4면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자신의 공적을 과시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다.

 

 

<정림사 매표소의 관람 안내문>

* 입장료 : 성인 1,500원, 청소년 및 군경 900원, 어린이 700원.

* 관람시간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정림사 매표소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관람 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지구(의 유적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지구에 속한 유적들은 부여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부여 왕릉원이다. 공주는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익산은 익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이다.

 

 

<매표소를 지나 처음 본 정림사지와 오층석탑, 연지>

 

 

 

<정림사지 연지>

잎 모양으로 보아 연꽃이 아닌 수련일 듯. 이곳에서 가까운 궁남지에는 연꽃이나 수련이 피었지만 이곳은 아직 잎만 무성하다. 정림사지 동쪽에 위치한 정림사박물관의 복원 모형도에는 수련이 아닌 분홍색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이다.

 

 

 

<정림사지 조감도와 가람 배치도>

정문에 해당하는 중문을 지나 남북으로 1렬로 배치되어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은 정림사박물관에 있는 컴퓨터로 복원한 정림사 모형이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썰렁한(!) 정림사지와 오층석탑보다 바로 동쪽에 붙어있는 정림사박물관에 들러보면 좋다.

 

기초석을 근거로 복원한 모형도는 물론, 몇 차례 정림사지를 발굴하면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정림사를 비롯한 백제의 다른 사찰 관련 정보도 모두 있고, 유물들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갯수도 많다. 유물이 많은 이유는 고려시대에 정림사지를 재활용했기 때문인 듯하고, 그 여파(!)는 보호각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기타 새로운 방식으로 유물을 접할 수 있는 인피니티 룸, 컴퓨터를 활용한 다양한 백제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정보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중문지(中門址)와 남회랑터>

정림사지 중문지는 석탑 기단에서 남쪽으로 14m 거리에 있다. 초석을 받치던 적심석(積心石) 8개가 동서 2열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정면 길이는 11.3m, 측면 너비는 5.3m이다. 고려시대 중문지의 기단은 바깥 부분을 깬돌로 쌓아 마감한 석축기단이다.

 

유적보호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붉은색 나무 계단과 받침대가 있는 곳이 중문이고, 좌우로 회랑터(남회랑)가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중문터 중앙에서 본 동쪽의 남회랑터이고, 원경의 건물은 정림사지박물관이다.

 

 

 

<사방에서 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가로로 촬영)>

첫번째 사진은 남쪽면, 두 번째 사진은 북쪽면, 세 번째 사진은 서쪽면이다. 4장의 세로로 긴 돌로 구성된 1층 탑신의 4면에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상처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다.

 

 

 

 

<사방에서 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세로로 촬영)>

첫번째 사진은 남쪽면, 두 번째 사진은 동쪽면, 세 번째 사진은 북쪽면, 네 번째 사진은 서쪽면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랜 세월 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렸다. 이는 1층 탑신부에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전승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비문 때문이다. 제목은 전서체, 본문은 해서체로서 당 현경(顯庚) 5년(660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으며 글은 하수량(賀遂亮)이 짓고, 글씨는 권회소(權懷素)가 썼다. 비는 1층 탑신 4면에 새겨져 있는데 제1면은 24행, 제2면은 29행, 제3면은 28행, 제4면은 36행 등 총 117행이고 각 행은 16자 또는 18자이며 자경(字徑)은 4.5cm이다.

 

비문에는 당 고종(高宗)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00여명을 중국에 압송하였고 당나라는 백제 멸망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당시 백제 영토에는 24만호, 인구 620만이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에 항복하였으며 그 해 9월 3일에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인을 포로로 잡아 당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소정방은 660년 8월 15일에 백제를 대표하는 정림사 석탑에 그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남, 서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북, 동면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부여 정림사지 금당지(金堂址, Main Hall Site)와 강당지(講堂址)≫

금당은 부처를 모시던 전각으로 석탑 기단에서 북쪽으로 약 15m 거리에 있다.

고려시대의 기단은 백제 때의 기단을 재활용하였다. 금당지의 하층 기단에는 동쪽 7곳, 서쪽 4곳, 남쪽 6곳, 북쪽에 7곳의 적심석이 남아 있었고, 기단 내부는 한 곳에서 적심석이 확인되었다. 적심석 배치로 보아 금당은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18.75m, 측면 13.80m 크기이다.

 

강당은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던 전각으로 정면 39.1m, 측면 16.3m의 긴 사각형 평면 건물이다.

백제시대의 건물을 재활용한 고려시대의 강당지는 정면 31.8m, 측면 17.9m로 백제 때보다 작아졌다. 백제 강당지의 기단은 여러 장의 기와를 비스듬히 맞대어 쌓아 만든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평하게 쌓은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강당지에는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부여 정림사지 금당지(金堂址, Main Hall Site)와 강당지(講堂址, Lecture Hall Site)>

바닥에 잔디가 덮인 언덕처럼 보이는 부분이 정림사 금당터이다. 강당지는 금당지 바로 뒤에 있었고 강당을 둘러싸고 동, 서, 북쪽에 승려들이 거주했을 동, 서, 북승방이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 건물은 현대에 강당지에 지은 것으로 현재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보호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림사지 서편 건물지(서승방)>

서편 건물지(서승방)는 강당지로부터 약 1m 서쪽에 있다. 강당지 동쪽에는 이 건물지와 대칭을 이루는 동편 건물지(동승방)가 남아 있는데, 남북 39m, 동서 12.1m 크기였다. 조사 당시 백제나 고려시대의 퇴적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였지만 부분적으로 기와열이 확인되었다.

북편 건물지(북승방)은 강당터 북쪽으로 7m거리에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동서 길이) 69.8m, 측면(남북 길이) 12.3m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의 남, 동쪽면은 평적식 와적기단이며 북쪽면은 소형 석재를 세워 박은 형태로 되어 있다.

 

북에서 남쪽으로 보면 정림사의 가람 배치는 아래와 같고 동, 서쪽과 중문 좌우에 회랑으로 둘러싸인 네모형 구조였다.

북승방

서승방 ←  강당  →동승방

금당

서회랑←  오층석탑  →동회랑

남회랑←  중문지  →남회랑

연지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지정 : 보물 제108호.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화재로 인해 심하게 마모되어 형체만 남아 있고,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좁은 어깨와 가슴에 올린 두 손의 표현(지권인)으로 미루어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고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정림사를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한다.

--현지  안내문--

 

 

 

<석조여래좌상 보호각에서 본 정림사지 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진 좌우 끝으로 동, 서 회랑터가 보이고 두 번째 사진에서는 동, 서 건물터까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