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22.07.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큰누리 2022. 7. 27. 17:06

≪정림사지박물관≫

2006년 9월 29일 개관한 정림사지박물관은 백제사비시기 불교와 그 중심에 있었던 정림사를 주제로 백제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되었습니다. 박물관의 건물형태는 불교의 상징인 "卍“자 모양으로 중앙홀을 중심으로 진입로, 전시실, 관리실 등이 사방으로 뻗은 날개 모양으로 상호 연계하여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백제시대 중 가장 화려했던 사비시기의 불교유적 등 백제의 꿈과 땀이 담긴 정림사지박물관을 방문하여 직접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http://jeongnimsaji.or.kr/(정림사지박물관)에서 퍼옴-

 

지정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임시 휴관일 : 박물관의 수리 및 관리 등이 필요한 경우

관람료 : 정림사지 입구에서 구입한 입장권으로 정림사지와 오층석탑, 박물관 관람 가능

입장시간 : 정림사지 입장 시간과 동일 :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정림사지박물관 입구 밖과 안>

 

 

 

<정림사지박물관 안내도>

소재지 : 충남 부여군 정림로 38(동남리 401번지)

부지면적 : 59,179㎡

건축면적 : 3,148.68㎡

주요시설 : 제1전시실(정림사지관), 브릿지, 제2전시실(백제불교역사관)과 중층전시실, 안내데스크, 중앙홀, 영상실, 뮤지엄샵, 기획전시실 등

주차장 : 소형 67대, 대형 13대(관람시간 내 무료 주차)

 

 

≪정림사지박물관 전시실≫

**제1전시실(정림사지관)

사비백제 번영의 중심에 서있던 정림사지의 의의와 가치를 첨단 ICT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를 통해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다.

1. 정림사지의 혼

  - 역사를 바꾼 기와 한 장

  - 정림사지 인피니티 룸

2. 백제의 아픔을 품고 태어난 정림사지 / 정림사지의 흔적을 찾아서

  - 정림사지의 발굴조사와 성과

  - 소조상, 연꽃무늬, 와당

3. 백제의 아픔을 품고 태어난 정림사지 / 백제 사탑의 완성작 정림사지오층석탑

  - 백제 사찰 건축의 원형, 정림사지 건축양식

  - 축조 과정 체험과 정림사지오층석탑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 연꽃의 안식처 연지

4. 끝나지 않은 백제, 정림사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 하나의 석탑과 하나의 금당

 

**제2전시실(백제불교역사관)

백제불교의 유래와 전파 : 백제의 찬란했던 불교역사를 실감 디지털콘텐츠로 재조명하고, 주변 국가와의 불교문화 교류를 알아보고 감상할 수 있다.

1. 백제의 정신이자 통치이념

  - 백제불교의 유래와 전파

  - 불교의 나라 백제

2.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꽃피우다

  - 백제불교의 사찰 분포

  - 백제의 가람배치

3. 정림사지의 일생 

  - 사비연화360돔

 

**제2전시실 중층(통일신라 이후의 정림사지)

통일신라시대 이후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토기, 청자 등 다양한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브릿지

디지털 연못과 연꽃 : 극락정토를 형상화한 미디어아트

 

**기타 : 특별전시, 기증전시, 야외전시가 있다.

 

 

≪정림사지 발굴조사 연표≫

▷1915년(고적조사) :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을 실시하였다. 조사대상으로 석불좌상과 정림사지오층석탑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발굴조사) : 정림사지 최초의 발굴조사는 1942년 총독부박물관의 후지사와 가즈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정림사지는 남북으로 중문·석탑·금당·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주위에 회랑을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식 사찰로 밝혀졌다. 

1979~1980년(발굴조사) : 사지 전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금당지의 이층기단, 석탑 기초부의 판축층, 연화문수막새 및 연목와 등이 모두 백제시대라는 근거로 정림사지의 창건 연도를 천도 직후인 6세기로 판단하였다.

▷1983~1984년(발굴조사) : 당시의 지면에서 4m 깊이의 지하에 위치한 연지를 발굴하였다. 유적에 대한 발굴보다 상부에 쌓인 토층을 제거하기 위한 인력이 많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정림사지 연지는 자연적으로 유입된 토사에 의해 매몰되었으며 백제 패망 후 얼마 되지 않아 매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연지 내부에서 탄화된 연꽃의 줄기와 잎 등이 확인되었다. 지금의 연지는 상층부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2008~2010년(발굴조사) : 2008~2009년 조사에서는 백제시대 강당의 크기(40×16m)가 밝혀지고, 회랑지, 강당지 동·서편으로 승방지, 고려시대 금당지, 중문지 등 정림사의 가람배치 전모가 드러났다. 이를 통해 강당지 좌우에 부속 건물지가 강당지와 나란히 위치하고, 뷰속 건물지 남쪽으로 와적기단의 회랑이 배치되는 가람구조인 것이 드러났다. 

2010년에는 현 보호각 북쪽의 동쪽 일대에서 백제 북승방지,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백제 벼루·기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 등이 있다.

 

 

<정림사지박물관 제1전시실(정림사지관)>

 

 

<제1전시실의 역사를 바꾼 기와 한 장, 태평8년무진정림사대장장초 명문기와>

-태평8년무진정림사대장장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 

일제 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장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고 쓰인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현종 19(1028) 당시 정림사로 불리었음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이 절터는 정림사지로, 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 기와에는 '대평(大平)'이라 새겨져 있다. 대평은 요나라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으로 추정되는데, 태평8년을 환산해보면 고려 현종 19(1028)년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진(戊辰)년 역시 1028년과 동일하기에 고려 현종 때 정림사지의 대장전에 쓴 기와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기와가 발견되기 전까지 정림사지오층석탑은 '평제탑'으로 불렸다.

 

 

<제1전시실의 인피니티 룸과 전시물들>

무한(Infinity)으로 펼쳐진 공간 속, 정림사지 출토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복합 라이딩 쇼를 통해 유물들이 들려주고픈 빛의 노래를 경험하며, AR콘텐츠를 통해 유물의 자세한 정보를 살펴보고 컬렉션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중형 소조 '봉보주보살상', 세 번째 사진은 소형 소조상 '농관을 쓴 인물'들이다.

 

 

 

 

<제1전시실 - 백제의 기와, 수막새에 대한 안내>

 

 

<제1전시실 - 정림사지의 흔적을 찾아서,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편들>

상당히 크기가 작은데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피니티 룸에 전시된 유물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제1전시실 - 축조 과정 체험과 정림사지오층석탑, 정림사지 초석>

 

 

<제1전시실 - 연꽃의 안식처 연지, 정림사지 원형 복원도>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정림사지박물관 중국제 청자, 삼족기>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치미·전(벽돌)>

치미는 건물의 용마루 양쪽에 올리는 새꼬리 모양의 장식기와이다. 봉황의 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길상(吉祥)과 벽사(僻邪)의 의미를 상징한다.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는 파편으로 출토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몸통이나 날개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정림사지에서는 속이 비어서 블록처럼 생긴 벽돌이 출토되었다. 앞면에 연꽃무늬와 인동무늬를 나란히 배치하고 그 바깥쪽 테두리에 톱날무늬의 장식을 가미한 형태이다.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인장와(印章瓦)>

정림사의 건물지와 연지 등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평기와는 승문, 격자문, 평행선문, 무문 등 4종류가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암, 수키와의 등면에 기호를 도장으로 새겨 찍은 것을 인장와라고 부른다.

주로 둥글거나 네모진 도장을 이용해 기와 제작과 관련된 간지, 지명, 사명(寺名), 또는 제작소의 기호 등을 나타내었다. 인장와는 기와와 백제사비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연꽃무늬 수막새>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연꽃무늬 와당은 제작연대가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로 추정된다. 이 와당의 출토로 정림사지의 백제시대 사찰이 백제 사비도성 건설과 함께 창건된 사찰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접시·잔·병>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항아리·자배기·시루>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항아리(호, 壺)는 크기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으로 나뉘며 모양에 따라 외반호, 직구호로 나뉜다. 자배기는 액체를 담아놓거나 나르는데 사용되는데 사비시대 일상 생활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그릇 중 하나이다. 시루는 증기로 곡물을 찌는 조리용구로 증기가 곡물에 닿기 쉽도록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다.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그릇받침·연가·벼루·등잔·파상문토기>

그릇받침은 백제토기 가운데 대표적인 공헌용기로서 제의와 같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가는 토관 2~3개를 연결하고 상부에 보주형의 막음장식을 놓아 만든 것으로 굴뚝에 설치하여 연기를 내보내는 시설이다.

 

벼루는 정림사지 외에도 부여 관북리유적, 부소산성,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파상문 토기는 물결모양 무늬가 토기의 구연부나 동체부에 그려진 것인데 다양한 기종에서 두루 발견된다.

 

 

<제1전시실 - 백제시대의 정림사지 유물, 토제품·석제품>

정림사지에서는 토제구슬, 숫돌, 납석제 뚜껑, 가락바퀴 등 다양한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무문토기편은 전형적인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토기의 저부편으로서 연지에서 출토되었다.

 

 

<제1전시실 -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상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랜 세월 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렸다. 이는 1층 탑신부에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전승기공문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비문 때문이다. 제목은 전서체, 본문은 해서체로서 당 현경(顯庚) 5년(660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으며 글은 하수량(賀遂亮)이 짓고, 글씨는 권회소(權懷素)가 썼다. 

비는 1층 탑신 4면에 새겨져 있는데 제1면은 24행, 제2면은 29행, 제3면은 28행, 제4면은 36행 등 총 117행이고 각 행은 16자 또는 18자이며 자경(字徑)은 4.5cm이다.

 

비문에는 당 고종(高宗)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00여명을 중국에 압송하였고 당나라는 백제 멸망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당시 백제 영토에는 24만호, 인구 620만이었다고 적고 있다. 소정방은 660년 8월 15일에 백제를 대표하는 정림사 석탑에 그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긴 것이다.

 

 

 

<제1전시실 - 복원한 정림사를 무대로한 AR체험 프로그램>

 

 

<제1전시실(정림사지관)과 제2전시실(백제불교역사관) 사이의 브릿지(Bridge)>

브릿지(Bridge)는 극락정토를 형상화한 미디어아트로 아름다운 연꽃과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이곳을 누비는 걸음걸이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체험할 수 있다.

 

 

<제2전시실, '사비연화 360' 상영관>

총 15분에 걸쳐 '하늘길로 펼쳐지는 부여 10경', '기억의 저편', '포토타임' 등의 프로그램이다.

 

 

<제2전시실, 사비백제 6대왕의 불교회담>

사비시대 백제 6대왕(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의 업적과 불교에 대한 각 왕의 생각을 대화 형식의 연출 영상으로 감상하는 공간이다. 

무왕은 백제 제 30대 왕으로 법왕의 아들이자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서동요의 주인공이며 미륵신앙과 관련한 거대한 미륵사를 익산에 창건했다.

 

 

<제2전시실, 사비백제의 사찰 분포도>

부여는 오랜 기간 동안 건립된 수많은 절터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백제의 절터는 25곳, 절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1곳으로 확인되었다. 백제의 사비천도 이후 부여는 명실상부한 불교국가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부여지역에서 확인된 많은 절터들은 그 시대의 가람의 특성과 문화자료를 남기고 있다.

 

 

<제2전시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정림사지>

통일신라시대 정림사지는 석탑지와 연지 구간에서 통일신라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주름무늬토기편이 발견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더 이상 구체적인 실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 정림사는 태평8년무진정림사대장장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명 기와의 발견을 통해 고려 현종 19년(1208) '정림사'라는 사찰로서 역사 속에 등장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정림사'명 기와를 비롯하여 토기대접, 청자편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정림사는 백제보다 작은 규모의 강당지 좌우로 북회랑이 연결되고 북회랑은 동·서회랑과 연결되어 남회랑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역 서편에 가마를 조성하였고 가마 내부에서는 다량의 토기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정림사에서 필요한 도기를 직접 제작하여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림사'명 기와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소에 사용되는 기와라는 의미이므로 향후 고려시대 정림사의 사찰운영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백제시대 이후 법등을 이어온 정림사의 위상을 정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제2전시실, 1910~1960년까지의 정림사의 변천사>

 

 

<제2전시실, 1960~1984년까지의 부여의 문화>

 

 

<제2전시실 중층 - 통일신라시대 토기>

정림사지 연지(蓮池) 외부와 내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편이 발견되었다. 그릇의 형태로는 완형(盌形, 주발모양), 합(盒)의 뚜껑, 작은 단지 등이 있다. 

 

문양의 종류에는 동심반원문, 원점문, 수직 뜨는 지그재그식 점건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주름무늬 토기편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나말여초에 걸쳐 주로 확인되는 그릇모양이다. 이러한 주름무늬 토기는 정림사지 외에도 부여 능산리사지, 부여 부소산성, 익산 왕궁리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제2전시실 중층 - 고려시대의 생활용기, 접시, 솥, 시루>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토기류는 기능에 따라 취사용기와 저장용기, 식기로 구분된다. 취사용기는 솥, 시루 등이 있고 저장용기는 자배기나 호, 병 등이 확인된다.

 

식기는 완(대접)이나 보시기, 접시 등이 있으며 확인되는 전체 기종 가운데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완은 비교적 일정한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구경 17cm 내외, 높이 9cm 내외의 크기가 다수이다. 기형이 일그러진 것도 많이 보이는데 이러한 점을 통해 당시 정림사에서 완이 일상용기로서 대량생산 및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2전시실 중층- 고려시대 기와>

백제 사비기에 창건된 정림사지가 고려시대에 중건·재건을 거쳤음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홑꽃잎이나 겹꽃잎 형태를 띠는 많은 꽃잎이 화려하게 장식된 연꽃문 수막새와 연꽃문, 당초문, 도깨비문 등으로 장식된 암막새, 그리고 어골문, 격자문, 만(卍)자 등 특수한 무늬로 장식된 기와도 출토되었다.

 

 

<제2전시실 중층 - 고려시대 '定林寺'명 기와>

기와의 표면에는 생선뼈무늬(魚骨紋)와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데, 무늬는 아래와 위에서 각각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장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명문이 2행에 걸쳐 좌서체로 양각되어 있다. 뒷면에 전체적으로 헝겊자국이 있고 그 위에 겹쳐서 네 방향으로 휘어진 굵은 선이 남아있다.

 

 

<제2전시실 중층 - 고려시대 청자>

정림사지에서는 대접, 접시, 병, 잔과 잔탁, 뚜껑류, 대반 등 다양한 고려시대의 청자가 출토되었다. 순청자를 비롯하여 연판문, 모란문, 초화문 등의 문양을 음각, 양각, 상감 등의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이들 청자는 대체로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였으며 유색이 밝은 上品으로 인접지역인 전북 부안과 관련이 있으며, 전남 강진과 해남지역의 가마터 출토품과도 일부분 유사성이 확인된다.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청자의 공간별 출토 양상을 보면 금당지보다는 강당지와 회랑지 등 승려의 생활과 밀접한 곳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유행했던 승려들의 차(茶)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제2전시실 중층 - 조선시대 분청사기, 백자>

정림사에서는 분청사기와 백자 등의 조선시대 자기편이 출토되었다. 분청사기 기종으로는 접시, 완 등이 주를 이루는데 대부분 印花기법과 상감기법의 분청사기로 국화문, 접문, 초문, 동심원문, 나비문 등이 인화되어 있으며 접지면에서는 내화토받침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백자는 완, 잔, 종지, 접시, 병 등으로 강당지 서편 와적기단 북쪽열 부근 고려시대 구덩이 등에서 주로 수습되었다. 유약은 주로 백청색이며 소성도는 양호하고 태토는 정선된 백토이다.

 

 

<백제의 가람배치>

가람이란,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준말로 승려가 수도하고 생활하는 장소인 사찰(寺刹)을 뜻한다. 가람은 예배공간과 수행공간의 복합체인데, 삼국시대 가람은 일반적으로 탑, 금당, 강당, 중문, 회랑, 종루, 경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비시대 사찰은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며, 강당 및 금당 좌·우측의 폭넓은 동·서 건물(승방)과 그 남쪽에 회랑과 연결된 가람배치가 특징적이다. 그 중에서도 강당 좌·우측의 동·서회랑과 연결된  동·서 건건물(승방)의 배치 형태는 중국,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가람배치는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 배치로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정립한 백제에서 사찰은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정림사지(사진 왼쪽)는 중문, 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싼 1탑 1금당의 배치를 하고 있다.

미륵사지(사진 오른쪽)는 1탑 1금당 3개가 서로 독립되어 나란히 배치된 3탑 3금당을 형성하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인다.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를 완성한 백제는 일본 초기  가람배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부여 정림사 복원 모형도>

위에서 설명한대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놓인 1탑 1금당의 배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