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제천 배론성지

큰누리 2023. 11. 29. 20:00

 

 

제천 배론성지(舟論聖地)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

소재지 :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舟論)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이곳은 초기 한국천주교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가 쓰여진 토굴이 있는 곳이다. 1801년 2월 황사영(알렉시오)은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서 토굴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토굴 속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세계교회에 전하고, 박해로 무너진 천주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간곡한 서신을 비단에 써서(帛書 13,384자) 북경에 있는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보내지기 전에 압수되고 그 또한 체포되어 그 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 선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둘째,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現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가 있었던 곳이다. 1855년 초 聖人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집에서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에서는 프랑스인 푸르티에(Pourthie), 프티니콜라(Petitnicolas)신부의 지도 아래 김 사도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 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라틴어, 철학, 신학 등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신학생들이 사제양성의 열매를 맺을 무렵인 1866년(丙寅年) 초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 결과 두 신부와 장주기가 각각 서울 새남터와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신부의 묘가 있는 곳이다. 그는 1836년 12월 중국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고, 184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2년 동안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혼을 구하려는 불같은 열정, 그리고 훌륭한 판단력 등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과로로 1861년 8월 문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성 요셉 신학교 뒷산 언덕에 묻혀 사제의 길을 걸으려는 후학들의 길을 밝혔다. 이와 같이 배론성지는 종교적인 면에서 교회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역사의 땅이요 교육의 땅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지 안내문)

 

 

여행사를 통한 여행의 장단점

이번의 제천 여행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결과는 아주 좋았다. 여행사 프로그램은 당일 코스의 경우 일반적으로 3~4곳을 들리고, 비용은 대중교통비 정도 밖에 안 되는 가성비 최고의 여행 방법이다.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경우 가격은 더 낮아지고, 대신 그 지방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시장이나 특산품 판매장 방문이 포함된다. 이날 제천에서 의림지와 의림지역사박물관, 배론성지, 제천 중앙시장, 국립 제천 치유의 숲 등 4곳을 들렀다. 

 

단점은 주어진 시간 안에 주어진 코스를 돌아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관심이나 취향과 무관하게 여행사가 정한 시간에 맞춰야 한다. 따라서 안내인의 성향이나 회사의 진행 방식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넘어가는 코스가 있고,  반대로 내키지 않지만 오래 머물러야 하는 곳도 있다. 지자체 지원의 경우 딱히 물건 구매를 강요하지 않고, 대신 특정 장소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거나 식사 후 영수증 제출을 요청하는 수준이다.   

 

 

<제천 배론성지(舟論聖地) 안내도와 이정표>

버스 주차장에서 내리면 그 어느 곳보다 부지가 넓어서 어디를 가야할지 어디부터 들러야 할지 엄두가 안 나지만 성지에 안내를 해주는 분들이 있어서 도움을 받으면 큰 도움이 된다. 서울이나 근교의 어지간한 천주교 성지는 오래 전부터 계획해서 대부분 들렀는데도 이곳은 처음 들어서 여행사에서 올라온 상품을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묻어서 갔다. 

 

나는 내 방식대로 혼자 돌아다녔는데 보고 싶은 곳은 대부분 모두 보았다. 대신 시간 때문에 최양업신부의 묘와 성직자의 묘는 들리지 못했다. 그래서 동행이 유일한 카페인 허브사랑에서 사준 매실차도 밖의 벤치에서 겨우 마셨다.

 

 

 

<배론성지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학교>

배론성지 안에 깔멜수도원처럼 출입을 통제하는 구역이 있는지 '성 도미니코 봉쇄 수녀원, 두메꽃 피정의 집'이란 곳이 소성당 뒤편에 있었다. 이 건물은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있는데 중후하고 규모가 가장 커 보였지만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이곳이 봉쇄구역인 줄 알았다.

 

 

<배론성지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와 시내>

이 도로에 들어서면서 왜 배론성지가 단풍 명소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철이 약간 지난 시기라 은행잎 단풍이 모두 졌음에도 불구하고 냇가 건너편에 남아있는 빨갛고 노란 단풍들이 대단했다. 배론성지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갔다가 성지 공부도 하고 올 들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단풍도 보았다. 냇가에 놓인 다리 이름은 양업교이다.  

 

 

<배론성지 성 요셉 성당과 연못(마음을 내려놓는 자리)>

왼쪽 사진의 정면 건물은 성 요셉 성당, 오른쪽은 성지 방문자들에게 사진 스팟으로 가장 인기있는 연못(마음을 내려놓는 자리) 위의 다리, 아래는 다리를 옆에서 본 모습이다. 다리 옆에서 무명 순교자의 묘 앞에 있는 예수 성심상을 배경으로 촬영하면 아주 멋진 사진이 찍힌다. 때마침 주변의 단풍까지 최고 시기라 대단히 화려했다!

 

 

 

<예수 성심상과 무명순교자 묘 주변의 화려한 단풍>

내가 들렀을 당시에 단풍이 가장 화려한 곳은 '예수 성심상 무명 순교자 묘' 주변의 광장(!)과 바로 옆에 있는 '진복문, 경당' 주변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현란할 정도로 빨간 단풍이 아름다운 사진 스팟이었고, 관광객들은 저마다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예수 성심상과 무명 순교자 묘>

 

 

<배론성지 진복문과 경당>

바로 앞의 '예수 성심상과 무명 순교자 묘'와 함께 배론성지의 사진 스팟이다. 담장 안팎의 새빨간 단풍이 무척 화려하다!

 

 

 

 

<배론성지 경당 뒤편의 도자기 가마터>

가마터 오른쪽 옆(경당 뒤)에 황사영 백서 토굴이 있다.  

 

 

<배론성지의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과 백서 내용>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은 1801년 2월 말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살던 신자인 김귀동의 집으로 왔다. 그는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 속에서 8개월간 은신해 있으면서 9월 22일 백서(帛書)를 완성했다. 백서는 모두 122행으로 구성된 13,384자의 글자를 비단에 쓴 것으로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백서(帛書)의 내용은 인사말(1~5행), 신유박해의 발단과 그 진행과정(6~32행), 주문모(중국인, 야고보, 1752~1801)신부와 총회장 최창현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열전(32~90행),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9행), 관면 요청과 맺음말(119~122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황사영은 9월 29일 의금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되었으며,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황사영은 같은 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처형되었다. 백서는 1925년 79위 시복식 때 교황 요한 바오로 11세에게 증정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토굴은 1987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의 고증에 의거 복원된 것이다.

 

 

<서대문 약현성당 서소문 순교 성지전시관의 황사영의 백서 모사본>

2013년 5월 11일 답사 차 서대문 약현성당에 들렀을 때 촬영한 것이다.

 

 

<성 요셉 신학교와 설립자들>

왼쪽의 건물들은 경당과 재현한 성 요셉 신학교이고, 인물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에서 가르친 프랑스 신부 푸르티에(Pourthie), 프티니콜라(Petitnicolas)이다. 오른쪽 동상은 성 요셉 신학교 터를 기증하고 초기 한국천주교회 발전에 기여한 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장주기(張周基, 요셉)이다.  

 

<聖人 장주기 (張周基, 요셉)의 일생>

* 한국천주교회 103위 성인 중 한 명

* 1803년 경기도 화성시 양강면 요당리 출생

* 1826년 천주교에 입교한 후 배론으로 이주

* 1855년 자신의 집을 신학교(성 요셉 신학당)로 기증

* 1866년 3월 10일 충남 보령시 갈매못에서 순교

*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오름

*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에 오름 

 

 

<최초의 성 요셉 신학당 터>

재현한 신학교에서 약간 옆쪽인 장주기 성인 동상 앞에 있다.

 

 

<재현한 성 요셉 신학교>

부엌, 방 2칸 구조이고, 뒤쪽에는 황사영 백서 토굴이 있고, 오른쪽에는 프랑스 신부 2명과 장주기 성인상이 있다. 방 앞에는 '파견하시는 예수님' 그림이 걸려있고, 방 내부에는 프랑스 신부 2명의 사진을 보고(실제로는 대면이었겠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모형과 사진이 있다.

 

 

<성 요셉 신학교 벽의 '파견하시는 예수님'과 방 내부>

왼쪽 사진은 방 앞에 붙어있는 그림은 '파견하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 왼쪽은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검은 수단에 모관을 쓰고 십자가와 순교자의 상징인 빨마 가지를 들고 있다. 오른쪽은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신부로 짚신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땀의 순교자'의 모습이며, 아직 시복이 되지 않아 후광이 없다. 

두 분 신부 사이에 있는 초가집은 1855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이자 현재 신학교(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모태인 배론 성 요셉 신학당이다.

 

방 2개 중 1개는 푸르티에(Pourthie), 프티니콜라(Petitnicolas)신부의 사진을 보고(실제로는 대면이었겠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모형이 있고, 다른 방에는 두 신부와 함께 공부하는 신도들 그림이 걸려있다. 그 외에 바깥 벽에 당시에 신학교를 배경으로 촬영한 신도들의 사진이 있다.

 

 

<배론성지 경당, 김옥수신부의 타일조각 벽화>

색상이나 그림이 아기자기하고 테투리가 가늘고 흰 선이라 얼핏 보면 스테인드글라스 같은데 타일조각이라고 한다. 처음 보는 기법인데 느낌이 좋았다. 배론성지의 중심 성당인 최양업신부 기념성당 대성당 안의 옆방도 이 타일조각 벽화로 장식해 놓았다.   

 

 

<배론성지 황사영순교현양탑>

 

 

<배론성지 성 요셉 성당과 순교자들의 집>

 

 

<배론성지가 끝나는 가장 안쪽 부근>

다 떨어져서 바닥에 노란 낙엽으로 남은 은행잎이 마지막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배론성지 최양업신부 조각공원> 

중앙에 예수님 동상이 있고, 둥그런 반원형의 형태로 검은 돌에 최양업신부의 일생을 그림과 글로 묘사해 놓았다. 내가 최양업신부에 대해 제대로 인지한 것은 작년(2022년) 5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신부의 생가 터 '당진 솔뫼 성지'에 들렀을 때였다. 당시에 김대건신부 기념관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보았던 것 같다.

 

최양업신부는 1844년 김대건신부에 이어 사제 서품을 받았고, 김대건신부는 1846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한데 비해 그는 당시에 천주교신자란 사실만 들통나도 죽임을 당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사망한 1861년까지 꽤 오래(!) 활동했다. 신앙심이 깊지 않았다면 그 기간 동안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와 이곳에 무덤이 있기 때문에 배론성지는 최양업신부를 위한 공간 같았다. 최양업신부의 삶을 돌이켜 보면 성인이 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최양업신부 조각공원의 최양업신부상> 

 

 

<배론성지 최양업신부 기념성당과 최양업신부 동상>

왼쪽에 소성당이 있고, 전면은 대성당이다. 대성당 앞에 최양업신부 동상이 있다.

 

 

 

<배론성지 최양업신부 기념성당 별실(!)>

미사를 올리는 대성당과 쪽문으로 연결된 옆의 방이다. 최양업신부 초상이 걸려 있고, 사방의 벽면에는 김옥수신부의 작품으로 보이는 예수의 일생을 표현한 타일조각 벽화가 걸려 있다. 

 

 

<배론성지 최양업신부 기념성당 내부>

옆방에 들렀을 때 미사 중이라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는데 성당 앞마당을 한 바퀴 돌다보니 마침 미사가 끝나서 신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내가 평소에 아는 성당과 달리 아주 단조롭고 깔끔했다. 장식이라고는 정면 맞은편의 성모자상 뿐이었다. 나는 대부분 답사를 목적으로 역사적인(오래된) 성당에 들렀기 때문에 3칸으로 나누어진 전형적인 고딕식 성당들을 주로 보았었다.

 

 

<배론성지 최양업신부 기념성당 앞 풍경>

 

 

<배론성지 미로의 길>

 

 

<배론성지 묵주의 기도(로사리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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