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안동 도산서원

큰누리 2023. 12. 18. 01:03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작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들은 한국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서원'은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세계유산 등재기준()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 하략...   (현지 안내문)

 

 

≪안동 도산서원≫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림의 발의로 1574년 도산서당 뒷편에 세우기 시작하여 1575년 낙성되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받아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1576년에는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향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 과거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하였다. 그후 도산서원은 19세기 후반 서원철폐령에도 유학의 중심 역할을 해온 중요성을 인정받아 철거되지 않았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기숙사인 농운정사를 비롯하여 퇴계 사후에 만든 전교당, 상덕사, 전사청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박약재와 홍의재, 서원에서 만든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서원 관리인의 숙소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다.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 가는 길>

 

 

<시사단(試士壇)>

지방문화재 제33호.

조선 정조 16년(1792) 정조가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본 장소이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

 

 

<도산서원 앞마당의 왕버들>

이 왕버들은 도산선생이 도산서당을 지을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동댐 조성 시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산서원 앞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2그루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혔다. 퇴계 선생은 「도산잡영」에서 시냇가의 왕버들을 바라보며 풍류 넘치는 버드나무와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였다.

 

 

<앞마당에서 본 도산서원 전경>

왼쪽부터 역락서재, 옥진각, 농운정사, 정문이다. 다른 건물들은 겹쳐서...

 

 

<도산서원 미니어처와 배치도>

 

 

<도산서원 앞마당의 우물(열정 冽井)>

도산서당 때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라며 열정과 관련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도산서원 정문과 도산서원 관람 순서>

이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의 1)도산서당을 본 후 왼쪽의 2)농운정사, 뒤로 연결된 3)하고직사를 보고 되돌아 나와 중앙 윗쪽에 있는 4)광명실과 동·서재, 전교당을 보면 된다. 도산서원은 일정하게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전교당까지는 그럭저럭 건물들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지만 전교당 옆이나 뒤는 자칫 놓치기 쉽다. 나도 퇴계 선생의 사당인 5)상덕사(문은 잠겼겠지만)와 6)전사청을 놓쳤다!

 

가장 중심건물인 전교당을 본 후 서재 뒤에 있는 7)상고직사를 본 후 계단을 내려와 전시실인 8)옥진각을 보고, 마지막으로 서원 서쪽 가장 앞에 있는 퇴계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는 9)역락서재를 보면 끝난다. 옥진각은 다른 곳과 달리 자료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반드시 들러야 한다. 

 

 

<도산서원 정문으로 입장 후 보이는 건물들>

왼쪽은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기숙사인 농운정사, 그 뒷 건물은 관리인들의 살림집 下고직사, 중앙의 채색 건물은 전교당 출입문 진도문(進道門), 진도문 좌우 건물은 책을 보관하던 서고 광명실(光明室), 오른쪽 앞 건물은 도산서당이다.

 

 

<도산서원 도산서당>

퇴계 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몸소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一'자 형태의 부엌, 온돌, 마루 3칸의 구조이다. 거처하던 방은 완락제(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현판이 걸려있다. 두 번째 사진은 완락제와 부엌이다. 왼쪽 사진의 퇴계 선생이 거처하던 방 완락제(玩樂齋)는 특이하게 왼쪽에 광, 혹은 붙박이장 같은 공간이 있다. 

 

 

 

 

<농운정사 담장 기와와 이끼>

 

 

<도산서원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건물은 '工'자 모양이며  퇴계가 설계하였고,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동쪽 마루 시습제(時習齋)는 공부하는 곳, 서쪽 마루 관란헌(觀攔軒)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 마루 뒤쪽 방 지숙료(止宿寮)는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뒤에 있는 하고직사 문에서 본 농운정사(隴雲精舍)>

 

 

<도산서원 하고직사(下庫直舍)>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하고직사는 식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상고직사보다 규모가 작다.

 

 

<도산서원 강당(전교당) 출입문인 진도문과 서고인 광명실>

 

 

<도산서원 서고인 광명실>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 현판(光明室)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동광명실과 함께 총 1,271종 4,917권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전국 서원 장서 중 고서와 진본으로 유명하다(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위탁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도산서원 강당(전교당)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문 지방 양쪽의 태극 무늬가 그려진 북 같은 장식이 독특하다.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과 정료대(庭燎臺)>

지정 : 보물 제210호.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된 강당으로 스승과 제자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는 서원의 중심건물이다. 대청과 서쪽에 한존재라는 온돌방이 있다. 정면에 걸린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 1575년 낙성 후 선조가 사액한 것이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두 번째 사진의 계단 서쪽에는 높게 만든 돌기둥 위에 반원형 모양의 돌을 받쳐놓았는데, 밤에 행사할 때 불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이다. 전교당 동쪽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고, 마당에는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숙소인 동재(박약재, 博約齋)와 서재(홍의재, 弘毅齋)가 있다. 

 

 

 

<도산서원 상고직사(上庫直舍)와 곳간>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 거처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 관리인들의 거처였다. 상고직사는 전교당 서쪽(서재 옆)에 있으며 뒤편의 전사청과 아래의 하고직사와 연결되어 관리인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상고직사 마루에는 겸재 정선, 김창석, 강세황 등이 그린 도산서원 옛그림 복사본 5점이 걸려있다. 남북으로 긴 'ㅁ'자형이며 온돌방 7칸, 창고, 부엌 등 총 21칸 규모이다.

 

 

 

<서쪽 광명실 옆 계단에서 본 도산서원>

왼쪽에는 하고직사, 농운정사가 있고, 오른쪽에는 옥진각과 역락서재가 있다.

 

 

<도산서원 옥진각(玉振閣)과 전시실 배치도>

도산서원은 1969년에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면서 1970년에 퇴계 선생의 유물전시관으로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퇴계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타 선생이 쓰던 문집과 문방구, 혼천의, 문필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퇴계의 생애, 공직생활, 교육관, 사상이나 학문 등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반드시 들려야 한다.

 

 

 

<성리학 해설서 심경부주(心經附註)> 

 

 

<옥진각의 퇴계 선생 관련 서적들>

평소 언행, 시 등을 모아 도산서원에서 목판으로 제작 간행한 책들과 선생의 초고 모음, 유교철학을 도식으로 나타낸 성학십도 등이다. 

 

 

 

<도산서원 옥진각(玉振閣)과 전시실>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 해설서와 목판본>

교육방법이나 경전 등을 도식으로 풀어 설명한 목판이다. 

 

 

 

<수신십훈(修身十訓)>

수신십훈(修身十訓)은 몸가짐에 관한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다. 내용은 입지(立志), 경신(敬身), 치심(治心), 독서(讀書), 발언(發言), 제행(制行), 거가(居家), 접인(接人), 처사(處事), 응거(應擧)이다.

 

 

<무불경(毋不敬), 신기독(愼其獨) 목판과 찍은 글씨>

♣ 무불경(毋不敬) : 조선 중기에 제작된 47×63cm 크기의 목판이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출전은 「예기」이다.

신기독(愼其獨) : 조선 중기에 제작된 47×93cm 크기의 목판이다. 홀로 있게 되면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늘 조심하라는 뜻으로  출전은 「중용」이다.

 

 

<퇴계 선생이 쓰던 문방구들> 

 

 

<퇴계 선생이 쓰던 안석(安席)과 완석(莞席)>

안석(左) : 길이 80cm, 넓이 25cm의 크기이다. 안석(安席)은 가는 왕골로 짠 기대는 방석으로 선생의 유품이다. 

완석(右) : 길이 170cm, 넓이 90cm의 크기이다. 완석(莞席)은 왕골로 짠 자리로 3개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중 한 개의 배면에는 '이첨지댁 퇴계(李僉知宅 退溪)라는 자필 글씨가 있다. 

 

 

<도산서원 역락서재(亦樂書齋)>

도산서당과 닽은 시기에 건립된 건물로 서당 제자들의 기숙사이다. 담장이 둘러져 공간이 독립되어 있으며,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했다. 역락서재(亦樂書齋)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도산서원 마당의 매화나무>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찾았다고 전할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선생이 모델인 천원권 지폐에도 매화 그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