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가릉(嘉陵)≫ 사적
강화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1222~1237)의 능이다. 순경태후는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아들인 충렬왕과 딸을 연이어 낳고 1237년에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경태후는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외손녀로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아버지는 당시 왕이었던 고종의 신임을 받던 문인 김약선이었다.
가릉은 지하에 돌방과 입구를 만든 돌방무덤이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모두 없어지고 봉분도 무너졌으나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이후 2004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재정비하였다. 강화 가릉은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곤릉과 함께 남한지역에 단 2기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고려 시대 왕비의 능으로 고려 왕비의 능으로 고려 왕실의 묘지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가릉, 능내리 석실분 입구의 비범한(!) 가옥>
지붕 아래를 한옥의 서까래(!)처럼 독특하게 꾸몄다.
<가릉, 능내리 석실분 입구 마을 풍경>
패트병과 선풍기 날개를 이용한 바람개비가 무척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강화 가릉(嘉陵) 정면>
<강화 가릉(嘉陵) 옆면과 후면의 석수>
능내리에 있는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에는 이런 형태의 귀수가 봉분 뒷면에 2기씩 있다. 조선왕릉의 석양이나 석호처럼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앞에도 2기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강화 가릉(嘉陵) 후면>
기단처럼 석축을 쌓은 후 위에 봉분을 올린 무덤의 형태는 앞보다 뒤에서 더 잘 느낄 수 있다. 양끝에 석수가 있다. 도굴이 쉬운 돌방무덤이라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외형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강화 능내리 석실분≫ 인천광역시 기념물
이 석실분은 강화 진강산 남쪽에 있는 고려 시대 무덤이다. 무덤의 앞쪽에는 고려 원종(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지하에 만든 석실 위로 흙을 쌓아 올린 봉분이 있고, 그 바깥쪽으로 난간석과 석수(짐승 형상의 석물)가 배치된 형태이다. 무덤 뒤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나지막한 담이 둘러쌓여 있다. 석실의 높이는 203cm로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와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된다. 축조 연대는 강화가 도읍이었던 시기(1232~1270)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조선왕릉의 경우 보통 하계, 중계, 상계의 3단인데 이 석실분은 5단이나 되고, 아랫단과 중간 단에 능을 지키는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 주춧돌이 4개씩 2개가 남아있다. 봉분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호석이나 석수, 수준 높은 난간석과 난간지대석 등으로 미루어 앞의 가릉보다 이 무덤이 더 왕비의 능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도 있다고 한다.
<강화 능내리 석실분 봉분>
앞면에서만 호석이 보인다. 무덤 전체를 난간석과 난간지대석이 둘려져 있었으나 현재 앞면은 없어지고, 난간석을 연결한 둥근 구멍이 남아 있다.
<뒤에서 본 강화 능내리 석실분>
<옆에서 본 강화 능내리 석실분>
<강화 능내리 석실분의 석수와 난간석>
석수(돌로 만든 짐승)상은 뒤쪽에 2기가 있다. 난간석은 돌이 아니라 밀가루로 빚은 것처럼 곡면이나 무늬가 정교하다.
<가릉, 능내리 석실분 입구 마을의 박석>
경복궁 근정전 마당에 깔은 그 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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