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윤봉길의사기념관

큰누리 2025. 8. 26. 19:03

≪예산 윤봉길(尹奉吉) 의사 유적≫ 사적.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 의사를 기리고자 1972년에 그의 출생지와 농촌계몽운동이 펼쳐진 지역 일대를 사적으로 지정한 곳이다.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 출생 이후 4세까지 살던 생가 광현당(光顯堂),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23세 때까지 산 저한당(狙韓堂), 윤봉길 의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등이다.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생애≫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現 광현당)에서 윤황과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였다가, 13세에 한문 공부를 시작한 후 성주록 오치서숙에서 수학하였으며, 이때부터 한학과 더불어 신학문과 민족문제, 농촌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20세에는 야학교재로 3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농본국가의 당위성을 강조하였으며, 부흥원 설립 및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문맹 퇴치운동과 농민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감시 속에 농촌계뭉운동만으로는 식민지의 삶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1930년 3월 고향을 떠났다. 1931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 이후,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로 인해 상해 파견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일본인 수괴를 죽이고 부상 입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환국하여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PS : 효창공원 삼의사묘역 왼쪽은 1946년 묘역이 조성된 이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안되면 모시기 위해 비어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중국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후 매장되었으나 일제는 위치를 철저히 숨겨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참고 :  ** 효창공원, 산천동 부군당  

 

<예산 매헌(梅軒) 윤봉길의사 사적비, 충의사(사당)>

 

<예산 윤봉길 의사 유족 종합 안내>

우리는 충의사는 생략하고 도중도에 있는 생가 터 광현당→중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산 저한당→윤봉길의사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윤봉길의사기념관의 전시내용은 사진 자료들이 대부분인데도 볼거리가 많았다.   

 

<윤봉길 의사의 생가 광현당(光顯堂)이 있는 도중도>

 

<도중도에 있는 윤봉길 의사가 4세까지 살던 생가 광현당(光顯堂)>

복원한 것으로 시골집 치고 규모가 꽤 크다. 4살 이후부터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도중도 건너편에 있는 저한당에서 살았다. 

 

<윤봉길 의사 옛집 저한당의 계명문(啓明門)>

유적지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 문으로 이 계명문(啓明門)과 만유문(萬有門)이 있다. 아담한 공원 같은 저한당 구역에는 저한당(狙韓堂) 외에 윤봉길의사 일대기 체험관, 기념탑 , 윤봉길의사 동상 등이 있다.

 

<윤봉길 의사 옛집 저한당 맞은편의 윤봉길의사 일대기 체험관>

우리가 간 시각에는 문이 닫혀 있었다. 

 

<윤봉길 의사 옛집 저한당 맞은편의 윤봉길의사 기념탑과 동상>

 

<윤봉길 의사 옛집 저한당(狙韓堂)>

도중도에 있는 생가 광현당(光顯堂)과 규모나 구조가 비슷하다. 저한당(狙韓堂)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란 뜻이며,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가 4세였던 1911년에 아버지 윤황을 따라 이사와 살던 집이다. 5남 2녀 중 장남인 윤봉길 의사는 어린 시절 이집에서 여러 학문을 익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0년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민족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따라서 1932년 윤의사가 순국하고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저한당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72년 8월까지 윤의사 유족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10월에 저한당을 비롯한 윤봉길 의사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낡고 헌 부분을 수리하였다.

 

<윤봉길 의사 유적 안의 '윤봉길의사기념관'>

 

<윤봉길의사기념관의 동상과 '丈夫出家生不還'>

윤봉길의사기념관에 들어서면 보이는 글귀와 그 옆에 있는 윤의사 동상이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은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남긴 말로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봉길 의사의 확고한 신념과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 안내(배치도)>

 

<윤봉길의사기념관 전시내용>

보통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한학을 한 만큼 윤의사는 한학에 정통하고 글도 잘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 사진은 매곡(梅谷) 성주록이 후학을 가르친 오치서숙이고, 윤봉길 의사는 이곳에서 수학했다.

 

<윤봉길 의사가 농민운동을 위해 설립한 부흥원>

 

<윤봉길 의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

5남 2녀 중 장남인 윤봉길 의사는 동생들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하며,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대단했던 것 같다. 아래 사진은 윤봉길 의사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런 소중한 편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도 의사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망명길, 수감호송길, 유해송환길>

노란색은 망명길, 파란색은 의거 후 체포되어 일본으로 호송되어 수감된 길, 연두색은 1946년 일본에서 유해가 송환된 길이다. 3개의 길만 보아도 윤봉길 의사의 일생, 혹은 사후까지 얼마나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이 된다.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한 1931년 이후의 사건과 생활>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입단과 거사 직전의 준비상황>

 

<윤봉길 의사의 자서이력서 및 유서>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現 루쉰공원) 의거 전날 김구 선생이 훗날을 위해 경력과 감상을 써달라고 요청하자 수첩에 남긴 윤봉길 의사의 자서이력서 및 유서이다. 

 

<거사에 나선 윤봉길 의사의 결의와 각오를 담은 친필 출사표>

 

<상하이 훙커우공원(現 루쉰공원) 의거 때 사용한 폭탄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現 루쉰공원) 의거에서 사용한 도시락 폭탄, 물통 폭탄이다. 대체로 일본인의 도시락은 검사하지 않는데서 힌트를 얻어 고안했다.

 

<상하이 훙커우공원(現 루쉰공원) 의거 당시의 현장>

왼쪽은 상하이 훙커우공원(現 루쉰공원) 의거 현장 상황도이고, 중앙은 사건 직후 체포된 윤의사의 사진, 오른쪽은 현장에서 즉사한 상해 파견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다. 

 

<일본 내무성 보안과에서 작성한 '상해에서의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

 

<일제에서 만든 감시대상 인물 카드 윤봉길>

 

≪1932년 5월 윤봉길 의사의 재판 및 12월 19일 순국 과정≫

일본군 헌병대 예심의 기소로 1932년 5월 20일 윤봉길 의사는 '살인,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5월 25일, 의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일제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는 윤봉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방청인과 기자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은 비밀재판이었다. 이후 윤봉길은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가나자와 위수구금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7시 40분 가나자와 육군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최후 진술>

 

<윤봉길 의사의 사형판결문과 사형 집행 신문기사>

 

<윤봉길 의사 사형집행 사진과 형틀대>

일제 입장에서는 워낙 중대한 범죄자(!)였기 때문에 사형 사진까지 남겼다보다. 사진 앞의 나무는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가 사형을 당할 때 묶였던 형틀대로 유해 발굴 당시 함께 발견되었으나 가로 부분은 분실되었다. 또 하나의 다른 장면에는 총을 겨눈 일본 경찰의 뒷모습 실루엣이 이 사진 왼쪽에 겹친다. 현재 형틀대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사진을 보니 가장 마음이 아프고 착찹했다!

 

<윤봉길 의사 유해에 대한 일제의 만행>

 

<윤봉길 의사의 유품들> 

 

<윤봉길 의사에 대한 장제스 총통의 유묵과 친필서한>

 

<1946년 윤봉길 의사의 유해 송환 과정>

1945년 11월에 덕산에서 박열, 이강훈, 서상한 등이 윤봉길의사 유골봉환위원회를 조직했다. 윤봉길의사 유골봉환위원회는 1946년 3월 2일 가나자와에서 수색을 시작해 3월 6일 발굴에 성공했다. 3월8일 수습된 유골을 도쿄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사무소에 봉안하였다가→5월 15일 부산 도착, 김구 선생 일행이 유해를 맞이→서울 조계사에 안치→7월 6일 효창원에서 국민장으로 장례, 식이 끝난 후 효창공원 삼의사묘역 안장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윤봉길 의사에게 수여된 건국공로 훈장증과 훈장>

 

<매헌 순례길>

 

<윤봉길 의사 국내 사적지>

 

<윤봉길 의사 관련 세계 유적지>

'충청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산 김정희 선생 고택  (0) 2025.08.27
예산의 남연군 묘  (0) 2025.08.27
예산 이응노 선생 사적지(수덕여관)  (0) 2025.08.26
예산 수덕사(修德寺)  (0) 2025.08.25
단양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0) 202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