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예산의 남연군 묘

큰누리 2025. 8. 27. 01:45

≪예산 남연군 묘≫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

위치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9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 1788~1836)의 무덤으로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약 5,590㎡이고,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다. 남연군 이구는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의 6세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었으며, 후사 없이 죽은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의 친할아버지이다. 1836년 남연군 사망 후 아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의 무덤 자리를 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하였다. 정만인은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는데 그곳에 묘를 쓰면 10년 안에 1명의 제왕이 나오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바로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지만 가야산에는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1840년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금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임시 이장했다가 1846년 석탑이 있던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임시 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舊壙地)라고 하며 지금도 움푹 패어 있다.

남연군과 부인 여흥 민씨를 합장한 현재의 묘는 도굴을 막기 위해 봉분 안에 수만 근의 무쇠를 붓고 강회를 반죽하여 덮었으며 봉분 아래에는 호석을 둘렀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868(고종 5) 당시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통상 요구에 이용하려 했지만 무덤이 워낙 튼튼해서 실패했다. 이 도굴 사건 이후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에 더욱 배타적이 되어 쇄국정책을 강화했고, 당시 서양 문명의 상징이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오페르트에게 자금을 댄 미국의 젠킨스는 불법 파렴치 죄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짜 도둑놈인 오페르트는 어찌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3개월 동안 감방살이를 했다고 한다.

 

<남연군 묘 입구의 호두나무>

남연군 묘에 걸어 들어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 이런 탐스러운 호두들이 우리를 반겼다. 호두나무는 주변에서도 종종 보지만 이렇게 많고 실한 호두나무는 처음이었다.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일행들도 신기해했다. 호두나무 시배지는 천안 광덕사이고, 호두도 그곳이 유명한데...

 

<남연군 묘 입구의 호두나무못지 않은 밤나무들>

마침 밤꽃이 한창이었고, 주변이 온통 밤꽃이라 눈이 내린 것 같다. 대신 악취가 심했지만...어쨌거나 꽃들이 정말 탐스러웠다.

 

<남연군 묘 입구의 뽕(오디)>

 

<남연군 묘 입구의 뜰보리수>

 

<남연군 묘 입구 이정표> 

 

<남연군 묘 입구의 벽오동나무와 꽃>

꽃은 상태가 좋지 않다. 길이 좁아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간 덕분에 남연군 묘 입구에서 다양한 나무들을 만났다.

 

<예산 가야사址>

 

<예산 가야사址 문화재 발굴조사 현황>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하기 위해 폐사시킨 가야사 터를 예산군은 2012년부터 2014년에 걸쳐 조사하면서 수많은 석재를 발굴하였으며 현재 가야사 터에 펼쳐 보관하고 있다. 조사 결과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를 확인하였고, 석조불상 8점, 청동불두 1점, 가량갑사(加良岬寺)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사지 건물 배치 및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연군의 첫 번째 묘비>

손자인 고종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새로 제작한 묘비가 봉분 앞에 세워지고 첫 번째 묘비는 이곳으로 밀려났다. 이 묘비에는 영희(榮僖)라는 시호가 새겨져 있다.  

 

<남연군 묘 입구에서 본 가야사址 발굴 유적과 남연군의 첫 번째 묘비>

남연군 묘 계단 아래 전각에 화려한'남은들 상여' 복제품이 있는데 사람이 많아 나중에 촬영한다는 게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나중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진품을 확인해야겠다.

 

<삼면에서 본 남연군 묘역>

특이하게 서쪽 앞면에 넓직한 바위들이 여러 개가 있다. 무덤 속에 사용하고 남은 회격(灰隔)은 아닐 테고...

 

<남연군 묘 중앙에서 본 가야사址와 남연군의 첫 번째 묘비>

 

<남연군 묘 전경>

왕족임에도 문인석이나 혼유석이 없고 묘비와 상석, 장명등, 석양 1쌍, 망주석 1쌍이 있다. 묘역은 상당히 넓은 편이고, 봉분 뒤에 토장을 둘렀다.

 

<남연군 묘 상석과 섬세한 고석>

상석은 묘제를 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네모난 돌이고, 고석은 상석의 받침돌로 모양이 북 같아서 고석(鼓石)이라고 한다.

 

<남연군 묘 장명등>

 

<남연군 묘의 망주석 1쌍> 

 

<옆에서 본 남연군 묘>

 

<남연군 묘 묘비와 석양>

 

<남연군 묘 상석과 고석, 묘비>

 

≪남연군 묘비≫

남연군 묘 앞의 묘비는 고종 원년(1864)에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후 제작된 묘비로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충정 완산 이공휘구지묘 군부인 여흥민씨 부좌(有明朝鮮國 顯祿大夫 南延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贈諡 忠正 完山 李公諱球之墓 郡夫人 驪興閔氏 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남연군의 원래 묘비에는 영희(榮僖)라는 시호가 새겨져 있었으나 손자인 고종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묘 아래로 이전하고 새로 제작한 이 묘비로 대체하였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과 후의 남연군 묘비 비교>

즉위 전 : 有明朝鮮國 顯祿大夫 南延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贈諡 榮僖公之墓 郡夫人 驪興閔氏 祔左

즉위 후 : 有明朝鮮國 顯祿大夫 南延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贈諡 忠正完山李公諱球之墓 郡夫人 驪興閔氏 祔左

 

<고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제작한 남연군 묘비 옆, 뒷면>

 

<뒤에서 본 남연군 묘>

앞이 툭 트이고 앞산들이 굽이치는 게 일반인이 보아도 명당이다.

 

<남연군 묘 뒷편의 가야사지 유적>

남연군 묘를 금탑(석탑) 터에 세웠다고 하니 이 건물 터는 대웅전이거나 승방 정도 되려나? 아무튼 무덤 터가 너무 좋아도 이곳 가야사나 헌인릉에서 여주로 이장한 영릉(세종대왕릉)에 있던 이계전 묘처럼 왕족들에게 밀려나곤 했다. 석탑 위치로 치면 남연군 묘 뒷 공간이 절터치고 너무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