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 대한 평≫
*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초산 유최진(樵山 柳最鎭 1791~1869)-
* 공은 매우 청신하고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의 관계에 미쳐서는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 -황사 민규호(黃史 閔奎鎬 1836~1878)-
≪명문가의 후예 김정희(출생과 가문)≫
秋史 金正喜는 충청도 예산 용궁리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향저(현재의 추사고택)에서 1786년(정조 10) 6월 3일에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추사의 가문은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김한신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들였는데 바로 추사의 조부이다. 김이주는 외조부 영조의 비호 아래 대사헌, 형조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김노영, 김노경 등 아들 넷을 낳아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추사는 김노경의 맏아들로 김노영에게 양자로 보내져 월성위의 봉사손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문재가 뛰어났던 추사는 7세 때 쓴 '立春大吉'이 번암 채제공에게 인정받았다고 전하며, 당대 북학의 거두 박제가에게 수학하였다. 1809년 24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生員이 된 추사는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함께 연행에 나섰다.
<추사기념관 앞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동상>

<예산 김정희 선생 유적 추사기념관>

<예산 추사기념관 관람시간 및 휴관일>
휴관일 : 매주 월요일

<예산 추사기념관 전시실>
추사기념관은 2층으로 1층에서 일반전시와 영상 상영을 한다. 우리 국립민속박물관 답사팀은 사전에 양해를 얻고 휴관일인 월요일에 입장해서 1층만 둘러보았다. 내용(자료)은 사진이나 미니어처, 복사본이 대부분이었지만 양이 꽤 많아서 추사에 대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시관은 다른 곳이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난 21년 7월에 추사 김정희가 9년간 유배생활을 한 제주도 대정에 있는 '추사관을 자세히 둘러보았는데 그 둘을 비교하며 보니 좋았다. 당연히 추사고택 바로 옆에 있는 예산의 추사기념관이 규모도 더 크고 내용도 많다. 참조 : 21.07. 추사관, 추사 김정희의 생애와 글씨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가계도>

≪추사 김정희의 생애 미니어처(탄생~청나라 연경 방문까지)≫
<추사의 생애 : 추사의 탄생과 말라버린 우물>
충청도 예산에서 경주김씨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추사가 태어난 날 뒷뜰의 우물이 갑자기 말라버렸다가 첫 울음소리에 다시 샘솟았다고...

<추사의 생애 : 시들어 버린 초목과 예술적 천재성>
뒷산인 오석산과 조산인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추사가 태어나자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추사 선생이 훌륭한 것은 인정하지만 '말라 버린 우물'에 이어 이 정도면 성인도 아닌데 너무 갖다 붙였다는 느낌...). 3살 때 붓을 쥐고 글씨 쓰는 흉내를 내는 천재성을 보였다.

<추사의 생애 : 월성위의 봉사손, 천재를 기르다>
추사는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고, 당대 북학의 거두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웠다.

<추사의 생애 : 연경을 가다>
추사는 생부인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연행을 가게 되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함께 연경행에 나섰다.


<청나라인 스승 옹방강과 완원과의 만남>

<청나라의 스승 옹방강>
-옹방강과 완원에 관한 내용은 제주도 '추사관'에 있는 내용임-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왼쪽의 옹방강(1733~1818)은 청나라의 서예가이자 금석학, 경학의 대가이다. 그의 석묵서루에는 엄청난 서화작품과 탁본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추사가 연경 방문 시 보여주고 그의 아들인 옹수곤을 소개시켜 주었다. 연경 만남 이후에도 추사와 편지, 선물로 사제지간을 이어나갔고, 추사의 금석학 연구와 글씨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추사가 이름과 내용을 알아낸 북한산진흥왕순수비와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추사체 등이 이 분의 영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청나라의 스승 완원>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오른쪽의 완원(1764~1849)은 청나라 호광·양광·운귀의 총독을 지냈으며, 만년에는 체인각대학사까지 올랐다. '청조 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있어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학자인 유득공, 박제가와 친교가 있었다. 경학에도 뛰어났으며, 금석·음운·천문·지리·수학 등에 대한 연구도 있다. <경적찬고>, <십삼경주소>, <황청경해> 등을 출판했다.

<추사와 구양수 초상화, 시경(詩境) 탁본>
왼쪽의 추사 김정희 초상(보물 547호)은 친구 권돈인이 추사영당에 봉안하기 위해 이한철을 시켜 그린 관복을 입은 초상이다. 예산의 추사고택에 봉안되어 오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었다. 추사고택(김정희 선생 고택)의 초상은 복사본이다. 중앙의 송나라 정치가 구양수(1007~1072) 초상은 청나라의 옹방강이 추사의 생일을 기리기 위해 주학년을 시켜 그리게 한 것이다. 오른쪽의 詩境 탁본은 옹방강에게 받은 시경 탁본을 화암사 뒤편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을 것이다.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
완당에게 보내는 간찰(담계수찰첩, 1817년, 옹방강).

<추사가 조눌인에게 보낸 간찰과 추사의 시>
위는 추사가 조눌인에게 보내는 간찰, 아래는 ' 신취미태사잠유시첩'에 실린 10편의 시 중 추사의 詩 부분이다.


<추사가 적은 '신취미태사잠유시첩'에 실린 권돈인의 시>

<김정희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지정 : 국보 제3호
신라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크기 : 높이 154cm, 너비 69cm
왼쪽과 중앙의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와 탁본은 신라의 24대 진흥왕이 553~554년에 백제를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8년 이후에 북한산 비봉에 세운 순수비이다.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씩 해서로 새겨져 있다. 이전에 도선국사나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추사에 의해 순수비로 확인되었고,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대조하여 비문의 68자까지 판독되었다. 내용은 왕이 지방을 방문(순수)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적혀 있는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고 있다. 비석 왼쪽에 추사가 다녀간 사실을 새겨 놓았다. 현재 비는 보존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추사는 서예가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금석학자로서도 이렇게 큰 공을 세웠다.
오른쪽의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10호, 함흥역사박물관 소장, 높이 115cm, 너비 48cm이다. 신라의 24대 진흥왕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정복하고 순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8년에 세운 순수비이다. 진흥왕의 4개 순수비 중 가장 먼저 발견된 비로 16세기 실학자들의 저서에 언급되고 있으나 19세기 무렵 망실되었다. 1832년 김정희의 부탁으로 권돈인이 재발견하였고 김정희가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원래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 정상에 있었으나 1853년 함경도관찰사 윤경현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고개 남쪽 함주군 진흥리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현재 북한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5자씩 해서체로 왕이 지방을 순수한 사실과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 수행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사의 관심분야 - 경학(유교경전 연구), 고증학, 금석학>

<추사가 초의선사의 차 선물에 대한 답으로 쓴 '茗禪'(명선)>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말할 때 禪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추사의 작품 '茗'은 아주 거친 잎으로 만든 차를 말하며 '禪'을 통해 차와 선이 둘이 아닌 경지를 보여준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禪에 대한 추사의 깊은 이해와 함께 속세에서 벗어난 추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茗禪'에 대해 추사는 "초의선사가 손수 만든 茶를 보내놨는데 몽정이나 노아 같은 명품 차 못지 않다. 이 글로 그에게 보답한다. 백석신군비(후한의 예서체 비석"의 필의를 본따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 중이다.

<추사 김정희와 불교>
집안의 원찰로 화암사(華巖寺)를 가지고 있던 추사는 일찍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화암사의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학에 관심을 가졌고 연경에서 400여 권의 불경과 불상을 가져와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특히 추사와 초의(草衣)선사가 나눈 40년 동안의 우정은 잘 알려져 있는데 초의선사는 추사에게 소치 허련을 제자로 삼도록 하였으며, 제주도의 유배지로 찾아가 6개월 동안 함께 머물기도 했다. 추사는 불교를 학문의 대상뿐 아니라 신앙으로 삼아 위안을 얻었다. 말년에는 과천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선지식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사진의 인물은 초의선사, 그 왼쪽은 추사가 쓴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이다. 중간의 글들은 추사가 쓴 <반야심경> 합본첩과 <우사연들>, 아랫단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에 있는 시경루(詩境樓) 현판이다.

<예산 추사기념관의 추사의 작품들>

<추사기념관의 추사의 작품들>
모두 추사가 쓰거나 그린 작품들이다. 첫 번째 사진은 계산무진(谿山無盡), 두 번째는 묵소거사자찬(默笑居士自讚)과 산수도(山水圖), 세 번째는 임한경명(臨漢鏡銘)과 임한경명 발문, 네 번째 사진은 이광사의 '원교필결'을 비판한 '서원교필결후'이다.




<추사가 부채에 그린 난초 그림>

<추사가 그린 문인화(蘭 그림)>
서예를 잘 하는 사람은 특히 난을 잘 그리는데 그래서인지 추사는 난(蘭)을 잘 치기(그리기)로 유명하다. 두 번째 단의 '고사소요(高士逍遙)'는 추사의 문인화 중 인물이 그려진 유일한 그림으로 선비가 사색에 잠겨 오솔길을 걷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세 번째는 산 속의 띠 지붕을 한 정자를 그린 '소림모정(疎林茅亭)'과 난맹첩의 '세외선향(世外僊香)', 네 번째는 난(蘭) 그림이다.




<추사의 제주도 유배기와 만년기>
오른쪽 중앙의 그림은 추사가 그린 세한도(국보)이다.

<제주도 대정현의 추사 유배지>

<한국과 중국의 서예사>

<추사의 서예 개관(서예 변천 과정)>

<추사 김정희 인장>

<추사의 수정염주와 벼루>


<추사의 서적과 책력>


<추사기념관 외벽의 추사의 시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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