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1.07. 추사관, 추사 김정희의 생애와 글씨들

큰누리 2021. 9. 29. 11:06

-현지 안내문-

≪제주 유배시절의 추사(秋史)≫

1840년 10월부터 절해고도 제주도에서 시작된 추사의 유배생활은 외로움과의 싸움 그 자체였다. 추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편지를 썼고 지인들이 보낸 편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중략-

특히 유배생활 만 2년이 지난 1842년 11월에 귀양살이의 옷가지와 음식을 챙겨주던 아내가 죽었다. 부인의 상을 당한 추사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여 매려 해도 길이 없다'며 통곡의 제문을 적었다고 한다. 외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추사가 제주에서 큰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학구열과 초의나 허련 같은 지인의 방문도 있었지만, 육지와 다른 제주의 풍토도 한몫 했다. -중략-

제주도의 입장에서 보면 뛰어난 유배객을 맞는다는 것은 뛰어난 선생을 얻는 것이었다. 추사는 대정향교의 유생들을 만날 수 있었고, 향교에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을 써주기도 하였다. 또한 집에 연락해서 이들에게 필요한 책을 구입해 주기도 하였다. 유배 기간 동안 강사공, 이시형, 이한우 등이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양아들 상무에게는 이시형과 같이 공부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제주 유배 생활은 55세가 된 육지의 사대부 양반이 견디기에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주 유배가 추사의 업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추사는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굳은 의지로 산고와 같은 제주의 삶을 극복하면서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된 것이다. 추사체와 세한도는 제주가 준 작은 선물이었다. 1848년 12월 6일 사면으로 햇수로 9년, 만으로 8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추사체(秋史體)

추사체(秋史體)는 김정희의 호인 추사(秋史)에서 나온 글씨체이다. 일반적으로 추사가 비석에 새겨진 서한(西漢) 시대 예서(隸書)의 필법을 연구하면서 추사체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실체는 매우 다양하여 정의하기 힘든데, 개화사상가로 유명한 박규수의 <추사체 성립론>이 널리 알려져 있다.

'추사가 어려서는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인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연경에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열심히 본받았다. 이때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제주 귀양살이를 다녀온 후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모습이 사라지고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추사체는 제주도 유배 시절에 완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임창순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도 유배를 거치며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면서 험준하고도 해학적인 면을 갖춘 서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체는 청나라 서예가들도 이루지 못한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 것을 창출한다'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이념을 가장 충실하게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Tip : 이 글에 영조와 부마인 화순옹주 남편 월성위(김한신)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 월성위 김한신이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 때문.

 

 

<제주 추사관 외관과 내부>

 

 

 

<제주 추사관 내부>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부(水仙花賦)>

조선 19세기. 종이에 탁본.

이 글은 청나라 호경(胡敬)이 지은 것으로 추사는 수선화를 무척 아꼈고, 이에 대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첩의 처음과 끝부분만 연결하여 붙인 이 작품은 목탄 탁본한 것으로 글 끝에 '아무렇게나 붓질하면서 한 다발 그렸다'고 적혀 있다.

 

 

<보물 제547-2호, 영조의 글씨들(春祝, 喜雨, 龍樓密近御溝東)>

♣ '春祝'은 영조가 해서체 대자로 직접 쓴 입춘첩으로 화순옹주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喜雨'는 영조가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온 것을 기뻐하며 지은 시이다. 시 왼쪽 끝의 '和進'은 화답을 바치라는 의미이고, 화순옹주 남편 월성위가 바친 화답 시가 '매헌난고'에 실려 있다.

 두 번째 사진 '龍樓密近御溝東'은 영조가 지은 칠언절구이다. 내용은...

궁궐 누각은 고요히 지척에 있고 개천은 동쪽에 있는데 

이밤 그대가 궐안에 있어서 기쁘도다.

법온(法醞)과 진찬(珍饌)을 한밤중에 내리니

감흥이 옛날과 같구나.

 

 

 

<보물 제547-2호, 영조 사위 김한신(화순옹주 남편, 추사 증조부)의 교사시말(郊舍始末)과 매헌난고(梅軒亂稿)>

 왼쪽의 郊舍始末은 김한신이 28세 때인 1747(영조 23) 7월 12일부터 22일까지 쓴 글이다. 김한신이 왕십리 남쪽 고개에 지은 집이 문제가 되었을 때 이의를 제기한 신하들과 김한신의 글, 영조의 비답 등이 실려 있다. 274년 전에도 왕의 측근의 특혜에 대한 신하들의 이의제기가 있었다는 것은 요즘 여론이 들끓는 권력층의 비리나 특혜와 아주 비슷하다.

 오른쪽의 梅軒亂稿는 김한신이 13~34세 때 쓴 자필시 초고본으로 61수가 실려 있다.

 

 

<보물 제547-2호, 영조 월성위(화순옹주 남편) 김한신의 묘표>

영조가 충남 예산에 있는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 묘소 앞에 세운 해서체로 새긴 글이다.

 

 

<보물 제547-2호, 김이주가 쓴 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과 김한신외 1인이 쓴 숙빈 최씨 시책문>

先府君家狀은 김이주가 쓴 월성위 김한신의 행장으로 행장은 죽은 이의 평생을 기록한 글이다. 시책문은 왕이나 후대 사람들이 시호를 내릴 때 그 사람의 일생을 칭송하여 지은 글이다.

 

 

<보물 제547-2호, 유제우화순옹주지령(諭祭于和順翁主之靈)>

1758년(영조 34)가 3월 25일 화순옹주 초상을 주관하는 관원 이세태를 시켜 올린 제문이다. 화순옹주는 영조와 정빈 이씨 소생으로 13세 때인 1732년 김한신과 혼인하였으나 1758년 정월 4일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이 세상을 따나자 14일 동안 곡기를 끊고 따라 죽었다. 추사 고택 왼쪽 산자락에 김한신과 월성위의 합장묘가 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고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추사 김정희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있다.

 

 

<김정희의 연보초고(年譜草稿)>

추사 김정희의 연보를 작성하기 위해 추사의 행적을 조사해 기록한 초고본이다. 추사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후의 관직 이동 등 행적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작자 미상의 추사선생 진영(眞影)>

추사 초상을 그린 후대의 모사본으로 이한철이 그린 추사 초상화처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사 김정희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앞, 뒷면>

영세불망비는 추사가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후 대산 지방을 시찰할 때 베푼 선정을 기록한 비로 1826년 건립되었다.

 

 

<추사 글씨를 탁본한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소봉래(小蓬萊)>

'천축고선생댁'은 추사가 충남 예산의 화암사 뒤 병풍바위에 '시경'과 함께 새긴 해서체 글자이다. '천축고선생댁'은 천축(인도)의 석가모니의 집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추사는 훗날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초년에 예산 화암사에서 지낸 적도 있었고, 중년에 묘향산에 들어갈 때 금강경을 호신부로 갖고 갈 정도였다.

 

소봉래(小蓬萊)는 예산 화엄사 뒷산인 오석산 병풍바위 아래에 새긴 해서체로 오석산을 금강산의 다른 이름인 봉래산에 견주어 '소봉래'라 붙였다. 소봉래(小蓬萊)는 장년 시절 추사가 사용한 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추사의 연행(燕行)과 학예일치(學藝一致), 추사의 제주도 유배>

 

 

 

<추사가 쓴 무량수각(无量壽閣)들>

윗사진은 김정희가 유배를 가던 중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둔사에 들렀다가 써준 예서체의 현판 탁본으로 한껏 멋을 부렸는데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나 장쾌한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아래 사진은 1846년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인 1846년(61세)에 충남 화암사에 예서체로 써 보낸 현판의 탁본이다. 획이 가늘면서도 힘과 멋이 있어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기준이 된다. 

 

 

 

<제주 추사기념관 내부>

 

 

 

<세한도 발문과 유명인사의 추서글들>

 

 

<김정희가 홍우연에게 써준 완당필첩>

추사가 중국 서법의 연원을 논하면서 우리나라의 글씨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이다. 이 글은 추사의 서예 이론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고졸하고 준경한 북파와 이를 지켜온 구양순을 존경하였으며, 남파의 조종격인 왕희지의 법첩을 모본으로 삼던 종래의 글씨를 배격하였다.

 

 

<추사의 학문, 사상>

 

 

<추사의 필체로 추측되는 육영당(育英堂)>

'의문당', '은광연세' 편액과 더불어 제주도 유배 시절 추사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육영당'은 '영재를 기르는 집'이란 뜻으로 이원백이 친구 이민훈이 소장하고 있던 추사의 글씨가 오래 되어 낡아 없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신미년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歲寒圖)>

세한도(歲寒圖)는 서화일치를 추구한 추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명작이다. 1844년, 몰락한 처지의 제주 유배객 추사에게 한결같은 정성으로 책을 구해준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에게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우선은 스승의 작품을 가지고 중국 연경(북경)에 갔으며, 1845년 장악진, 조진조 등 청나라 명사 16인의 제(題), 찬(贊)을 받아 돌아왔다. 이후 세한도에는 김준학,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등 한국인의 글이 덧붙여져 현재의 상태로 꾸며졌다.

 

세한도는 표제, 화면, 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에 '세한도(歲寒圖)'라는 표제 '우선, 이것을 감상해 보게, 완당(藕船是賞 阮堂)이라는 글과 관지가 있다. 화면은 두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 그 사이의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칠고 메마른 필치로 그렸으나 옅은 먹이 아니라 짙은 먹에서 물기를 배제하고 그렸다. 작품에 나타나는 간략하고 절제된 표현방식은 '늘 푸른 나무 같이 한결같은 선비의 지조'라는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화면 왼쪽의 발문에는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이유가 적혀 있다.

 

 

 

<제주 유배시절의 추사와 추사체(秋史體)>

 

 

<추사의 스승들-박제가, 완원, 옹방강>

 

 

 

 

<제주 추사관의 추사의 글씨들>

 

 

<추사의 글씨, 선운사 백파대선사비문과 숙인 상산 황씨지묘 비문>

선운사 백파대선사비문(禪雲寺 白坡大禪師碑文)은 추사가 전북 정읍 백양사의 설두 백암스님으로부터 3년 전에 타계한 당대 대선사이며 스승인 백파선사 궁선(1767~1852)의 비문을 지어달라는 청을 받고 70세 때 쓴 글이다. 이 비문은 추사 말년의 특징을 가장 잘 보녀주는 대표작으로 전북 고창 선운사 부도밭에 비가 세워져 있다.

 

오른쪽의 숙인상산황씨지묘(淑人尙山黃氏之墓)는 글씨는 추사가, 비문은 8촌형인 좌의정 김도희가, 음기는 추사의 동생 김명희가 썼다. 충남 서산군 개심사에 추사의 11대조인 김양수와 그의 부인 상산 황씨의 묘소가 있다.

 

 

<추사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국화와 난초>

설명(작가)을 놓쳤다!

 

 

<추사체의 탁월함과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