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의 후손)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마현마을(마재, 현재의 능내리)은 선생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若鉉)과 동복 형인 약전(若銓), 약종(若鐘)과 누이(매형은 이승훈)가 있었다. 서울에서의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하고는 주로 남양주 마현마을에서 생활하였다.
선생은 반계 유성원, 성호 이익 선생의 뒤를 이어 조선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후기 개화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經集)과 문집(文集)을 저술했고,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화성을 설계하였으며 거중기 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도 남겼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修己安人)', 즉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한국 최대의 사회과학자'라고 적혀 있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안내도>
유적지 입구의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시커먼 정자 천일각, 정약용 선생이 집필한 서적을 돌로 만들어 쌓은 '꺼지지 않는 불'이란 조형물이 있다. 그 뒤의 길(문화의 거리) 양쪽에 있는 유적지를 둘러보면 되는데 다산문학관, 다산기념관, 정약용 선생 생가(여유당)와 묘, 실학박물관 등이 있다. 기타 정약용 선생 생가(여유당)와 묘 앞에 선생이 만든 거중기 재현품이 있고, 실학박물관 앞에 홍이포 복제품이 있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입구의 천일각>
오래 전에 강진의 다산초당에 들렀을 때 다산초당 지척에 있는 백련사로 걸어가는 길에 초당과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정자가 있어서 기억에 남았는데 바로 천일각이었다. 다산이 남해가 보이는 천일각 자리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심신을 달래며 소일했는데 유배 시절에 없었던 것을 다산초당을 복원하면서 지은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 조형물>
정약용 선생이 집필한 서적 500여 권 중 일부를 겹쳐 조각한 조형물이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문화의 거리에 있는 1표 2서 조형물>
정약용 선생이 집필한 대표적인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와 두 아들에게 쓴 '실학에 뜻을 두거라', 여유당집 원목 등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수원화성>
화성(華城)은 읍성과 산성의 기능을 조화시킨 새로운 형태의 성으로 서울의 도성보다 높고, 돌과 벽돌을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축성의 비용을 절감하였다. 한 군데만 무너지면 연이어 무너지는 석성(石城)의 단점도 보완하였다. 1792년에 정조의 명을 받아 다산 정약용이 과학적인 성곽을 설계했다.

<배를 엮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설치한 배다리>
배다리는 배를 엮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설치한 다리이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과 화성(華城)의 공사 때문에 자주 수원을 찾았는데, 용산에서 노량진 사이의 한강을 건너야 했다. 이때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산이 설계에 참여한 배다리가 설치되었다. 정약용이 고안한 배다리는 장소, 면적, 배의 수량, 판자, 풀과 나무, 사용 기계 등을 정확히 계산하고 한강의 특성을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설계하여 설치하였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실학박물관>
이곳에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임찬웅 선생님의 전반적인 해설만 들었다.

<정약용 유적지 실학박물관 앞마당의 홍이포>
1637년에 중국 연안을 수비하기 위해 설치한 16기 중 하나를 복제한 것으로 발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포구에 화약과 포탄을 밀어넣어 장전하고 포 뒤쪽 구멍에서 화약까지 이어진 심지에 불을 붙이면 불이 화약에 붙으면서 탄환이 발사되는 원리이다. 탄환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쇠구슬(철환)로 목표물을 부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적중률이 많이 떨어졌을 것 같다. '홍이(紅夷)'는 '붉은 오랑캐'란 뜻으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인을 지칭한다. 16세기에 네덜란드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 명나라에 전해졌다.

<실학박물관쪽 언덕에서 본 여유당과 정약용 묘>
정약용 선생 묘도 보았으면 했지만 다산기념관을 제외한 여유당(정약용 생가)이나 묘, 심지어 마당의 서화관도 모두 출입금지였다. 공사중인 듯... 묘는 지대가 높아 이 위치에서 보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모르는데 다른 이의 글에 묘소에서 팔당호와 운길산이 잘 보인다고 했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여유당(생가)과 묘소 입구>
입장료는 따로 없고, 안에 복원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여유당)와 부부 묘, 다산기념관, 다산 사당인 문도사(文度祠), 정약용 선생 동상 등이 있다.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생가 터 비석>
다산선생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ㅁ'자형 20칸의 전통한옥이고, 홍수로 떠내려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재와 독서, 침잠하기에 적당하고 알맞다는 의미로 여유당(與猶堂)으로 불렀다. 아래 사진의 與猶堂은 비석 왼쪽에 다산선생의 묘비석이 있고, 그 위로 묘소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문이 굳게 닫힌 여유당 앞에는 정약용 선생 6대손인 정해인 배우 목소리로 듣는 '정약용 유적지 무료 오디오 가이드' 큐알코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정약용 선생의 자찬묘지명과 묘비, 묘소>
정약용 선생의 자찬묘지명은 생전에 스스로 지은 묘지명이다. '내가 죽으면 묘지에 ...라고 써달라'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스스로 묘지명을 짓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정약용 선생의 묘지로 오르는 계단>
입구가 봉쇄되어 입장 불가...

<정약용 선생의 사당인 문도사(文度祠)>

<정약용 유적지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앞의 나무>
왼쪽에 묘비가 보이고, 그 위쪽에 묘가 있다.

<정약용 선생 사당(문도사) 앞의 동상>

<정약용 유적지 다산기념관>
규모가 크지 않지만 생애와 저서에 관해 볼만한 내용들이 꽤 있다. 다산의 친필 서한과 대표적 저서인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에 대한 내용, 유배지와 말년의 생활 등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500여 권의 서적을 남긴 그의 학문적 업적과 유배생활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산기념관 안의 정약용 선생 생애와 초상>

<다산기념관 내부>

<20대 정약용의 시험 답안 오객(五客)과 40대의 현친유묵 발문>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머문 곳과 당시에 지은 저서>
정약용은 정조 사후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치인들에 의해 천주교에 묶여 무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사의재에서는 1801~1805년까지 머물며 <아학편훈의>, <재경> 등을 저술했고, 보은산방에서는 1805~1806년까지 머물며 <만덕사지>, <대동산교고>를 저술했고, 다산초당에서는 11년 동안 머물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저술했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저술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 1表 2書>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한 것은 억울하지만 다산은 그 세월 동안 호젓하게(!) 역대급 명저를 저술했다. <목민심서>는 젊어서부터 베트남을 통일한 호치민이 애독했다는 말을 듣고 신기했는데 漢子권이라 가능했을 것 같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개혁 군주 정조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케미가 잘 맞은 두 사람과 다른 실학자들이 엄청난 정치개혁을 이루고, 조선이란 나라의 앞날도 바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사에 'if' 란 절대 없는 법이니...



<다산, 선생의 생각을 읽다>
장기를 거쳐 강진까지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은 복숭아뼈가 3번이나 뚫릴 정도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으며 <1표 2서>라는 불후의 명저를 비롯해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다산의 저술에는 고통에 빠진 이웃에 대한 공감과 새로운 나라와 올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마음이 남아 있으며, 선생의 정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는 귀감이 된다.

<다산의 저서(아언각비, 경세유표, 흠흠신서)>

<다산의 저서(송이익위논남북학술설, 이산창수첩, 수종시유첩)>

<유배가 끝난 후 고향(마현)에서의 다산의 생활>
아래 유리장의 책은 다산의 '다신계절목', 제자 이강희의 '운곡잡저'이다.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은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이 끝나자 제자들이 스승인 다산에게 줄 차를 생산하기 위해 맺은 '다신계'의 규약이다. 그의 사위를 비롯해 승려까지 혈연과 신분을 망라하여 구성된 제자들은 모두 다산의 학술 정신을 계승하였다. 이강희는 강진에서 스승의 저술을 도운 제자로 다산이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신안 우이도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정약용이 노론계 학자인 이재의에게 보낸 편지>
<목민심서>의 간행이 논란이 되자 이 편지까지도 세인들에게 알려질까봐 두렵다는 내용이다. 배가 풀린 후에도 조심스럽게 살고자 했던 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북한강 기행과 기행 시첩>
다산은 해배(유배 해제) 후에 고향에 머물며 부근의 북한강 유역을 많이 돌아보며 일종의 기행시를 많이 썼다. 아래의 <소천사시사>는 일대의 풍광을 노래한 시를 엮은 시첩이고, <천우기행권>은 1820년 춘천을 다녀오며 지은 연작 시를 모아 엮은 시집이다.


<다산의 발명품 화성의 거중기(擧重器)>
다산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고안한 기계로,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유용한 건설 기계이다. 1792년 신도시 화성을 설계하고 쌓는데 활용하였다. 정조는 이 기계로 4만냥의 건설비를 절약하였다고 다산을 칭찬하였다. 이 기계는 실학을 상징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남양주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의 다산문화관>
이곳은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볼 엄두도 못내고 땡볕에서 설명을 듣고 유적을 보느라 고생한 회원들이 정수기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이용할 목적으로 들렸다. 그러니 열정적으로 설명하신 임찬웅 선생님이야 말해 무엇하랴 싶다. 나중에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벌겋게 달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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