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는 자주 들러도 강화 삼랑성, 정족산사고지는...≫
강화 삼랑성(정족산성)이나 강화 정족산사고지는 전등사 구역 안에 있기 때문에 전등사에 묻어가거나 아예 패스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오랜 기간 전등사를 드나들며 한 번도 눈여겨 보지 않다가 유적답사를 시작하고도 7, 8년이 지난 다음에야 위의 두 곳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삼랑성(정족산성)은 비교적 짧은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완주(!)를 못했다. 그 이유는 항상 동행인이 있었고, 동행인들은 정족산사고지까지 따라가는 사람은 더러 있어도 그 누구도 삼랑성(정족산성)을 둘러보고자 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강화 정족산사고지는 최근에는 꼭 들리지만 이번에도 삼랑성 완주는 못했다. 대신 반 정도는 둘러볼 수 있었다. 삼랑성 동남쪽 모서리에서 보는 강화도는 작은 구역만 보였지만 나름 시원했다.
특이한 점은 삼랑성(정족산성) 동문쪽에서 남문쪽을 둘러보는 정상 부분의 소나무가 대부분 수목장 장소였다는 점이다. 소나무 아래의 작은 명패에 '누구 누구'라고 새겨 철사에 매달아 걸었는데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가 동남쪽 모서리의 소나무 대부분에 걸려있어서 눈여겨 보니 죽은 이들의 명패였다. 동행인은 나무가 옥조인다며 철사를 좀 느슨하게 풀어서 다시 묶었지만 소나무는 활엽수처럼 금방 자라지 않으니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강화 정족산사고지(江華 鼎足山史庫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인 장사각(藏史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璿源譜閣)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옮겼다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 1년(1660) 이곳으로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이 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한 후 옛 현판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을 다시 달았다.
<전등사를 먼저 본 후 들른 강화 정족산사고지>
<강화 정족산사고지 아래의 포토존>
안내문에 제시된 포토존은 두 번째 사진과 위치가 비슷하나 현장에서는 세 번째 사진의 나란히 선 소나무가 포토존 같다.
<강화 정족산사고지 뒷쪽>
정족산사고지를 둘러싼 흙담과 뒤편의 나무들이 어울려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강화 정족산사고지 장사각(藏史閣) 뒷모습>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앞에서 볼 때 왼쪽의 큰 건물이다.
<강화 정족산사고지 옆(서쪽) 모습>
담장 아래의 네모난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담장너머로 본 강화 정족산사고지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
윗사진은 정면 5칸인 장사각(藏史閣)만 보인다. 아래 오른쪽 3칸 건물이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璿源譜閣)이다.
<강화 정족산사고지 삼문의 문고리>
강화 정족산사고지는 항상 문이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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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강화 삼랑성(江華三郞城)은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假闕)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며, 동문 안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동문 밖과 안>
이 문 앞 안내문에 '동문'이라 하지 않고 '동문 방면'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원래 누각 형태였던 문이 암문이나 통로처럼 홍예문 형태만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
<강화 삼랑성 동문 안 수목장 장소>
동문과 남문 모서리 부분에 울창한 소나무숲이 있고, 이 소나무 아래에 명패들이 걸려 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지 고인의 명패들이 철사로 느슨하게, 혹은 허술하게 묶여 있어서 오래 갈 것 같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쪽 성벽 모서리는 폭이 상당히 좁다.
<동문 남쪽 모서리에서 본 강화 삼랑성 동북쪽>
성곽이 마치 전등사와 사고지를 넓게 둘러싼 것 같은 구조이다. 그리 넓지도 않은 성이건만 왜 그리 완주가 어려운지...
<강화 삼랑성 동남쪽 모서리에서의 전망>
<강화 삼랑성 동남쪽 모서리의 가지가 부러져 쓰러진 소나무>
<강화 삼랑성 남쪽 성곽>
전등사 입구 역할을 하는 동문 주변은 돌을 쌓은 성곽만 남아있지만 북쪽으로 올라간 부분이나 이 방면에는 성가퀴(여장)가 남아있다. 성가퀴(여장) 위에 사람들이 쌓은 돌탑들도 나름 정겹다.
<강화 삼랑성 남쪽 여장(성가퀴) 위의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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