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1,100년 전에 살았던 신라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어려서부터 무척 똑똑했다. 나라의 장학생으로 뽑혀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은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하면 자신은 천의 노력을 한다(人百己千)는 정신으로 공부하여, 6년만에 당나라의 과거인 빈공사시에 급제했다. 급제 후 지방관인 율수현위로 일하며 상위 시험인 박학굉사과에 응시하려 했으나 당나라가 혼란해지면서 시험이 없어지고 최치원의 생활도 궁핍해졌다. 친구들이 소개한 병마도통 고병(高騈)의 밑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최치원은 서기관이 되어 많은 공식문서의 글을 썼다.
최치원의 뛰어난 실력을 듣고 신라의 헌강왕은 그의 귀국을 원하자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7년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시독과 한림학사를 맡아 여러 외교문서를 썼지만 주위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지방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나라의 개혁을 위한 <시무십여조>를 올렸지만 신라의 골품제도 사회와 6두품 신분이란 신분의 한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치원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당시의 국제적인 감각으로 쓴 훌륭한 작품들이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 --현지의 안내문 요약--
<의성 최치원문학관>
* 불행하게 고운사 입구에 있던 최치원문학관은 2025년 3월 25일 의성의 산불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고운사는 가운루와 연수전만 불타고 다른 전각은 살아남았다고...
2022. 10.22에 이곳에 들렀고 이곳에만 최치원 관련 전시관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함양에도 최치원선생 역사공원이 있고, 그 안의 고운기념관에 최치원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다. 함양의 상림은 그가 태수로 재직 시 홍수를 막기 위해 만든 둑을 따라 조성한 숲이다. 정읍의 무성서원에서는 생사당을 보았고, 아주 오래 전에 들린 신안의 비금도인가에서도 최치원에 관한 전설(!)을 들었으니 이 분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행동반경이 넓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끝부분에 올린 그의 글을 새긴 바위글씨도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의성 최치원문학관·전시관 안내>
의성 최치원문학관은 대강당과 전시 연수관 등 2개의 큰 건물이 있고, 전시물은 전시 연수관에 있다.

<의성 최치원문학관 전시 연수관 관람 안내>


<요약한 최치원의 일생>
1. 1~12세 : 857년 신라 왕경(경주) 출생
2. 12~18세 : 중국 장안의 국자감과 신라 숙위학생 숙소에서 공부,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빈공진사가 됨
3. 18~19세 : 당의 전선 제도(급제 후 대기 상태)에 따라 2년간 낙양 등지에서 글을 지어주며 생활
4. 20~22세 : 장쑤성 난징시 율수현 현위로 근무. 쌍녀분시, 강남의 여인, 중산복궤집(시집) 편찬
5. 22~28세 : 장쑤성 양저우에서 고병 휘하의 관역순관에 임명되어 공적인 글 작성- '격황소서'로 유명해짐
6. 28~29세 : 귀국 길에 태풍을 만나 곡포에서 머물며 <계월필경> 정리, 이듬해 3월에 신라에 도착
7. 29세 이후 : 신라 왕경(경주)에서 한림학사와 병부시랑으로 근무. 주로 국가 외교문서를 뛰어난 필력으로 작성
8. 34세 이후 : 대산군(전북 태인현)에서 태수로 근무. 큰 바위에 시와 글자를 새기고 글씨체를 유행시킴
9~10. 천령군(경남 함양군) 위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대관림숲(현재의 상림) 조성
11. 38~42세 : 현실 정치에 한계를 느끼고 전국 유랑. 의성 고운사,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마산(합포현) 별서 등을 다니며 글과 암각문을 남기고 해운대, 월영대, 쌍계사 지증대사 비문 등을 남김
12. 고운사(경북 의성) : 유랑 생활 중 빙산과 고운사에 들림. 고운사 가운루와 우화루를 짓고 글을 씀
13. 42세 이후 :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가족과 함께 숨어삶. 고승 전기인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정전>,<석순응전> 등 집필. 해인사 결사문 작성. 이후 행적 파악 불가

<12세에 유학길에 오르기 전의 소년 최치원>

<18세에 급제, 20세에 당나라의 관리가 되다>

<당나라 말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쓴 '격황소서'>
당나라 병마도통 고병 휘하에 있을 때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황소를 꾸짖은 격문이다. 황소는 이 글을 보고 놀라 의자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내용은 "오직 세상의 사람들만이 모두 너를 죽여 시체를 늘여놓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요,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이미 암암리에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

<정치 개혁을 위해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
894년 진성여왕에게 올린 정치 개혁안 <시무십여조>가 육두품 최고 관직인 아찬에게만 올려지자 최치원은 벼슬을 그만 두고 전국을 유랑했다.

<전국을 떠돌다 의성 고운사에 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은 경주 남산, 강주(의성군) 고운사, 합주(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마산)의 별서 등을 다녔다. 최치원은 의성의 고운사에 머물며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雨花樓)를 지었다. 42세 이후에 시국이 불안해지자 가족과 함께 해인사에 들어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승려들의 전기와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등과 해인사결사문을 썼다. 908년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이다.

<최치원과 의성 고운사(孤雲寺)>
올해(2025) 의성과 산청지역을 삼킨 산불로 3월 25일에 의성 고운사(孤雲寺)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물론 다른 피해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고운사는 22.10.23에 들러서 인상에 강하기 남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보물로 지정된 가운루와 연수전은 전소되었지만 대웅보전,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고금당선원, 고불전, 사천왕문, 승가대 등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내 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기타 이동 가능한 문화재는 당시에 안동 봉정사로 옮겼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고운사를 최치원이 지었다는 것은 좀 무리인 설정이고, 안내문에도 승려인 여지 여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각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고운사'란 이름은 후대에 최치원의 호에서 유래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의성 고운사는 681년 신라에 화엄종을 전한 의상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약사여래불과 석탑을 만들었다. 900년경에 최치원은 승려인 여지 여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각을 지었다. 948년에 운주가 고운사를 중창하였고, 1695년에 도청과 선조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이전의 관음상과 함께 삼존불상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2024년 화재로 전소되기 전, 가슴 아프다!)까지 전해지는 중요한 문화재로는 보물인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연수전과 사적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인 고운사 삼층석탑과 가운루 등이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이 남긴 문집과 비문>

<계월필경집 복제본, 계원선생문집 복제본 20권 4책>
위는 호남관찰사 서유구가 조선 순조 34(1834)년 홍석주 집안에서 소장한 옛 <계원필경>을 가져와 잘못된 글자를 고쳐서 전주에서 만든 계월필경집의 복제본이다. 아래는 1918년 최치원의 후손 최기호가 경주의 이상재에서 목활자로 다시 만든 <계원필경>이다.

<동문선에 전하는 최치원의 16장르 191개의 작품과 '격황소서'>
윗사진의 <동문선>은 1478년 조선의 성종이 서거정에게 우리나라에 길이 남을 글을 모은 문집을 편찬하라는 명령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동문선>에 실린 최치원의 글은 시(오언율시, 칠율시, 오언절구시, 칠언절구시)와 표전, 계, 장, 격서, 찬, 서, 기, 첩, 제문, 소, 재사 등 16장르 191개의 작품이다. 최치원의 글이 당시까지 많이 전해진 이유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과거를 준비하는 문인들에게 문제를 풀이하는 답안의 모범 필독서였기 때문이다.
아래의 '격황소서(檄黃巢書)'는 최치원이 당나라 병마도통 고병 휘하에 있을 때 황소의 난(881년, 신라 헌강왕 7년)이 일어나자 황소를 꾸짖은 격문이다. 격문은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길거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붙이는 글이다.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으로 밀고 들어왔는데 최치원은 '황소의 행동은 옳지 않다, 배은망덕한 행동은 사람이 아닌 하늘이 벌을 주는 것이라'며 노자의 도덕경과 춘추전의 말을 인용하여 꾸짖었다. 당나라 희종은 최치원의 노력과 수고를 고마워하며 선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했다.

<의성 최치원문학관>

<신라의 위상을 높인 최치원의 외교문서 '상태사시중장'>
'상태사시중장'은 신라의 진성여왕을 대신해서 쓴 외교문서로 <삼국사기> '최치원전'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고 글 전체가 실려 있다. 신라의 사신이 당나라 황제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나라와 신라가 친한 사이이고, 두 나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서로 도운 사이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나라로 들어가는 신라 사신에게 필요한 통행증과 식사, 물품, 호위 등을 요청하였다. 이 글을 통해 신라와 당나라, 발해의 동아시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 문서를 바탕으로 최치원이 896년~897년까지 당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태사시중 주온 치하의 변주 혹은 활주를 거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음이 확인되었다.

<최치원에 관한 글과 초상화>
윗사진은 왼쪽부터 <무성서원원지권지일> 복제본, 의성 관가정공파의 '신라대현문창후최치원선생상'과 '경주최씨관가정공파세보'이다. 아래는 안동 용강서원의 '용강서원지', 경주최씨 두곡문중의 '두곡세지'이다. 선생에 관해 이렇게 많은 내용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3명의 승려와 한 곳의 절에 대해 쓴 '사산비명'>
최치원이 왕의 명으로 신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3명의 승려와 한 곳의 절에 대해 쓴 비문이다. '진감선사비문'은 구산선문 중 쌍계선문을 연 진감선사 혜소(774~850)의 삶과 업적을, '대낭혜화상비문'은 헌강왕~정강왕 대의 가장 높은 승려로 성주산문을 연 낭혜화상 무염(800~888)에 대한 글이다. '대숭복사비문'은 신라 하대 원성왕 이후 화엄종 승려들이 활동한 내용을 적은 비문이고, '지증대사비문'은 희양산문을 연 지증대사 도헌(824~882)의 비문이다. 최치원은 여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과정을 덧붙이고 후기도 남겼다.
헌강왕이 885년에 글을 쓰라고 처음 명령했지만 완성은 8년 후인 진성여왕 대(893)에 했다. 신라 멸망 후 고려 태조 시기인 924년 문경의 봉암사에 비가 세워졌고, 조선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이 4개의 비문을 찾아내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널리 퍼트렸다. 이 과정에서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해안(1567~?)이 <사산비명>이라는 한 권의 책을 만들고 해석을 덧붙여 멋진 문장과 글솜씨를 쉽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화엄종 종주의 일대기 '법상화상전'>
신라가 위험해지자 최치원은 삶의 마지막을 해인사에서 가족과 함께 숨어 지냈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법장과 함께 화엄종 2대조인 지엄의 가르침을 받았고, 법장은 화엄종 완성자로 평가받으며 3대조가 되었다. 최치원은 법장의 <화엄삼매관>의 내용 중 直心의 十玄義에 따라 十科로 나누어 법장의 삶을 썼다. 최치원은 화엄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신라 화엄종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법장화상전>에서 신라의 '화엄십찰(華嚴十刹)'은 웅주의 갑사와 보원사, 양주의 범어사와 미리사, 강주의 해인사·보광사·옥천사, 무주의 화엄사, 전주의 국신사, 삭주의 화산사와 부석사, 한주의 청담사라고 하였다. <법장화상전>은 1090년(고려 신종7)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되었고, <속장경>의 일부분으로 실렸으며, 1149년(고려 의종4) 의화에 의해 다시 책으로 만들어졌다.


<최치원의 영정 6점>
남긴 글도 많고 워낙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이라 아주 다양한 영정들이 남아 있다. 이 정도면 역대 왕의 어진도 따라올 수 없다!
1단 : 하동 운암영당 문창후 최공 진영(1793)과 서산 부성사 문창후 영정(조선)
2단 : 진주 남악서원 문창후선생 영정(조선)과 청도 학남서원 신라 최선생 고운지진영(1882)
3단 : 대구 문창후영당 문창후 최공 진영(1912)과 이규선作 최치원 표준영정(1981)



<최치원이 쓴 현판, 석문, 석각들>


<최치원의 암각문 사진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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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최치원 바위글씨(암각문)들≫
<문경 가온읍의 '仙遊洞'>
아래는 정면에서 클로즈업한 사진.


<경남 하동의 '洗耳嵒'>
'세이암(洗耳嵒)'은 수중과 절벽 2곳에 각자가 있는데 수중 바위의 각자가 최치원의 것으로 전해진다.

<하동의 쌍계(雙磎)와 문경 가온읍의 야유암(夜遊岩)>
'쌍계(雙磎)'는 신라 정강왕이 제호를 하사한 것, 야유암(夜遊岩)은 '月야유암'의 줄임말로 '달밤에 자연풍광을 즐기고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며 즐기는 곳'이란 의미이다.



<문경 고산유수(高山流水)와 명월청풍(明月淸風), 문경 봉암사 백운대(白雲臺)>
문경 가온읍의 高山流水와 明月淸風은 마모가 심하여 글씨 판독이 어렵다고.

<하동의 삼신동(三神洞), 관폭대 등>

<끝이 없는 최치원의 암각문 사진들>
평생 암각문만 쓴 게 아닌데도 정말 많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암각문이나 현판이 많은데 두 분이 겨루면 누가 이기려나?

<충남 보령의 바위글씨들>

<경남 합천의 바위글씨들>


<충남 홍성의 바위글씨들>

<충남 홍성 장곡면 월계리의 장곡월계(長谷月溪)>
쌍계 서쪽 암벽 13개의 바위에 글이 있다고.

<경남 창원의 청룡대(靑龍臺), 치원서(致遠書), 월영대(月影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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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최치원문학관 포토존과 휴식공간>
1층에 설치된 포토존에서 보면 지하 1층에 해당하는 공간에 최치원 선생 부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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