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의성 조문국 사적지(금성면 고분군)

큰누리 2025. 9. 28. 16:55

≪의성 조문국(召文亭)≫

조문국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에 존재했던 삼한시대 초기의 부족국가로, 신라에 병합되어 문소군(聞韶郡)이 되었고, 이후 의성군으로 발전한 고대국가이다. 조문국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185년 신라 벌휴이사금 2년에 정벌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후 신라에 복속되어 문소군이 되었다. 도읍지는 금성면 탑리리, 대리리, 학미리 등지에 260~374여 기의 고분군이 남아 있어, 이 지역이 조문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네이버 AI 브리핑에서 퍼옴--

 

의성 금성면 고분군

의성 금성면 고분군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에 걸쳐 조성된 374기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5~6세기 삼국 시대 의성지역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의 역사·문화와 신라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1960년 의성 탑리리 고분군이 발굴된 이래로 17차례의 매장문화재 조사와 9번의 학술조사를 통해 이곳에서는 신라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을 독자적으로 수용한 점, 경주와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머리장식)과 귀걸이(이식, 耳飾), 허리띠 장식(과대금구, 銙帶金句), 고리자루칼(환두대도, 環頭大刀)과 같은 착장형 *위세품이 다양한 형태로 나온 점을 확인했다. 고분군에서 나온 출토 유물의 수량과 위세품의 우수성이 월등히 뛰어나며 고분의 형성 시점을 추정해보면 *국읍(國邑) 지배계층의 분묘(墳墓)군으로 추정된다. 또한, 의성지역의 독특한 토기 형식인 '의성양식 토기'가 발견되어 꾸준한 생산과 유통을 해왔던 사실도 확인되었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에 고분군이 자리한 점은 의성이 전략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국가유산청--

 

* 위세품(威勢品) : 왕이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하면서 지방에 있는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

* 국읍(國邑) : 중앙집권국가 형성 이전에 초기 국가를 이루던 읍락군의 중심 읍락

 

2022. 10.23. 여행사를 통해 난생 처음 의성에 들렀다. 의성은 마늘 밖에 몰랐던 시절인데 이곳을 고른 이유는 고운사 때문이었다. 여행사 안내문에서조차 자세한 설명 없이 처음 들린 '조문국'은 놀라웠다. 공원같은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엄연한 고분들이 상당히 많고 부지도 넓었기 때문이다. 가야 고분군은 몇 년 전에 고령, 창녕, 함안 등을 두루 답사했기 때문에 큰 흐름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의성의 조문국은 가야가 아닌 또 다른 세계(부족국가)인 점이 놀라웠다. 

이 외에 최치원문학관과 고운사는 의성이 최치원 선생과 관련이 깊고, 특히 고운사가 상당히 중요한 곳이라는 것도 새삼 알았다. 고운사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다양한 전각들이 있는데다 왕과 관련된 건물도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당시에 바로 글을 쓰고자 했으나 퇴직을 앞둔 시기라 업무 마무리에만 신경을 쓰고 싶어서 뒤로 미루었다가 깜빡 잊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년(2024)에 의성의 대화재로 고운사가 소실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정말 안타까웠다. 그래서 늦었지만 생각난 김에 글로 남기고 싶었다. 얼마 전 고운사와 관련해 스님들이 주변의 산에 인공조림을 따로 하지 않고 자연적인 회복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기사로 보았다. 한 번 불탄 문화재는 다시 회복할 수 없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연만이라도 잘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평지였던 조문국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큰 피해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대를 해본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 안내도>

 

<晩沙 金振鍾(만사 김진종)의 조문경덕왕릉견비운(堅碑韻)>

생몰 연대가 1883~1951인 분이 쓴 글이니 조문국은 1960년 이래 매장 조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조문국, 심지어 경덕왕릉까지 널리 알려졌던 듯하다. 경덕왕릉은 잘 정비된 지금에 보아도 안내문이 없다면 눈에 안 띄는 평범한 무덤이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조문국 사적지)과 이정표들>

 

<의성 금성면 조문국(召文亭) 사적지(고분군)>

 

<의성 금성면 사적지 입구의 포토존>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관, 의성의 특산물인 마늘이다. 우리는 여행사를 통해서 갔기 때문에 체험장에 들러서 마늘 쿠키를 만들었다. 

 

<의성 금성면 조문국 사적지의 조문정(召文亭)>

 

<산책로를 따라가며 본 의성 금성면 조문국 사적지>

윗 사진의 반원형 건물은 '조문국 고분전시관(대리리 2호분)'으로 원래 대리리 2호분이 있던 자리이다. 발굴조사를 끝낸 후 무덤 내부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자 건립한 전시관으로 대리리 2호분 내부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아래 사진의 검정 비닐이 있는 곳은 작약밭이라고 한다.

 

<의성 조문국 사적지 1호 고분(경덕왕릉)>

분구의 둘레 74m, 높이 8m이며, 능의 전면에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있다.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이던 조문국(召文國)이 이곳에 도읍하여 신라 벌휴왕 2년(185)에 신라 문화권에 병합되기 전까지 인근 고을의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조문국의 경덕왕릉(景德王陵)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 봉 아래에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먼 옛날 외밭이었던 묘역을 발견하고 수호하게 된 데에는 의성현령의 꿈 때문이었다는 전설이 조선 숙종 때 편간된 미수 허목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해마다 봄에 한 번씩 이곳에서 관민이 춘계향사를 지내고 있다. 

 

<의성 조문국 사적지 3호 고분>

평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 3호 고분은 밑지름이 14.3m~10.7m 내외, 높이가 3m 정도였으며, 한 봉분 안에 돌무지덧널무덤(1곽), 덧널무덤(2곽), 유사돌무지덧널무덤(3곽) 등 3기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1곽은 길이 5.8m, 너비 3m, 깊이 0.7m, 2곽은 너비 2m, 깊이 0.3m 정도로 2기는 규모가 비슷하고 11자형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1곽에서는 금귀걸이, 삼엽문대도, 은허리띠 등 장식품이 주로 출토되었고, 2곽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의성 금성면 고분군(조문국 사적지) 西쪽>

 

<의성 금성면 고분군(조문국 사적지) 16호 고분>

 

<의성 금성면 고분군(조문국 사적지) 서북쪽>

 

<의성 조문국 사적지 고분과 일반 묘>

 

<의성 조문국 사적지 北쪽 고분과 주변의 쑥부쟁이>

 

<의성 조문국 사적지 北쪽 고분과 주변의 쑥부쟁이>

조문국 사적지는 전반적으로 아주 말끔한 평지인데 이곳의 쑥부쟁이, 조문정 아래의 산국, 동쪽에 벽오동 밭이 있었다. 입구쪽에는 작약밭이 있으나 철이 지나서... 

 

<의성 조문국 사적지 34호 고분(왼쪽)>

규모는 동서 21.8m, 남북 23.2m, 높이 5.7m, 봉토 경사도는 23~30도이다. 유사적석목곽묘 또는 적석목곽묘로 추정되는 타원형 봉분이다.

 

<조문국 사적지 33호~37호 고분길에서 본 고분과 일반인 묘>

 

<의성 조문국 사적지 중앙 부분>

 

<조문국 사적지 중앙에서 전시관쪽의 19호, 20호 고분>

 

<의성 금성면 고분군(조문국 사적지) 35호 고분> 

 

<의성 조문국 사적지 중앙에서 고분전시관쪽>

 

<의성 조문국 사적지 중앙에서 서쪽>

 

<의성 조문국 사적지 중앙에서 북쪽>

 

<의성 조문국 사적지 중앙에서 북동쪽>

 

<의성 조문국 사적지 북동쪽의 39호분>

 

<의성 조문국 사적지 북동쪽의 40호 고분>

규모는 동서 13.5m, 남북 17.2m, 높이 4.1m, 봉토 경사도는 20~30도이다. 봉토 사면이 중, 하단을 중심으로 수회 이루어졌다.

 

<의성 조문국 사적지 북동쪽의 43호 고분>

 

<의성 조문국 사적지 북동쪽의 43호 고분 뒤쪽의 배수구>

고분 조성 당시의 배수구는 아닌 듯한데 물빠짐이 좋을 법한 이곳에 그것도 봉분 사이에 별도의 배수구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의성 조문국 사적지의 산국과 벽오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