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화성(華城)≫
화성(華城)은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의 행정기구인 읍치를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4개의 성문,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누각인 각루(角樓), 군사 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두루 갖췄다.
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시설, 재료 등을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비를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기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교류를 보여 주는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 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신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PS : 현지의 안내문이나 다른 곳에서 '수원화성'과 '화성'이 함께 쓰여서 어떤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수원화성(華城) 답사≫
우리는 25년 11월 13일의 국립민속박물관 답사에서 화서문(서문)에서 출발하여 장안문(북문)까지는 성밖으로, 장안문에서 동장대(연무대)까지는 성안으로 3시간 동안 돌았다. 동장대에서 훤히 보이는 창룡문(동문)까지 조망했으니 화서문(서문)~창룡문(동문)까지 둘러본 셈이다. 성은 안이나 밖 한 쪽이 아닌 안팎으로 모두 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수성(守城)이라도 안에서는 성을 적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구조이고, 밖에서는 적이 성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에 같은 장소라도 안팎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에 이어 화성행궁, 융건릉, 용주사까지 둘러보았으니 그날 엄청난 강행군을 했다. 날 걸은 걸음은 19,800보 정도였고, 집으로 돌아온 후 이틀 정도를 떡실신 상태로 보냈다.
수원화성은 한참 유적 답사에 미처있던 2011년에 꼼꼼하게 안팎으로 다로 일정을 잡아 돌아보았고, 2023년에도 들렀지만 갈 때마다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게다가 지금은 유적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를 하는 중이기 때문에 보는 시각이 달라져서 더 낯설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2011년에 팀을 이루어 수원화성 안팎을 답사한 후 쓴 글을 찾아보니 사진의 상태가 좀 나쁘긴 했지만 틀린 곳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리되어서 내 스스로 감탄했다. 당시에 다소 복잡하고 많은 수원화성의 구조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나름 점검을 해가며 글을 올린 덕분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쓴 글과 요즈음의 답사를 대조하면서 내용을 심화하고 되짚어보는 것도 쏠쏠 재미가 있다.
<수원화성(華城)과 화성행궁 배치도>
수원화성 안에 화성행궁이 있고, 화성행궁은 일반적인 궁과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그 때문에 화성행궁을 돌 때 좀 헷갈렸다.

<장안문 앞의 수원화성(華城)과 화성행궁 미니어처>
위와 같은 평면도보다 이 미니어처를 보면서 수원화성의 시설물을 파악하면 상당히 유용하다. 정면 앞의 문은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맞은편은 남문인 팔달문(八達門), 중앙 오른쪽의 네모난 공간은 화성행궁(華城行宮)이다.

<수원화성 화서(華西)문과 서북공심돈>
옹성의 전반적인 구조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이다. 우리는 화서문에서 답사를 시작하여 서북공심돈쪽 성밖으로 돌았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문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서 서북쪽에 있다. 화서문 밖은 넓은 평지라 주변 감시를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의 건축에는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에 화서문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수원화성 화서(華西)문 안쪽과 성문의 龍 그림>
화서문의 용은 초록색 1마리이지만 장안문의 옹성문은 검정 바탕에 1마리, 장안문은 검정 바탕에 청룡 2마리가 휘감고 있다.

<수원화성 화서(華西)문 누각>

<수원화성 화서(華西)문 남쪽 성벽과 단풍>
이 방향으로 진행하면 서쪽의 팔달산이고, 서북각루-서일치-서포루-서이치-서노대-서장대(화성장대)-서암문-서포루-서삼치-서남암문-서남각루(화양루)-남포루-남치-팔달문까지 이어진다. 이곳과 융건릉에서 올들어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보았다. 특히 융릉에서 건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서 갈색 함박눈처럼 우수수 쏟아진 참나무 단풍은 영원히 못 잊을 것이다.

<수원화성 서쪽 성벽에서 본 서북공심돈과 화서(華西)문>

<수원화성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오른쪽은 화서(華西)문 옹성이다. 공심돈(空心墩)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로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이 있다.

<수원화성 북포루(北舖樓) 밖의 화려한 단풍>

<수원화성 북포루(北舖樓)>
포루(舖樓)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로 일종의 초소, 혹은 군사 대기소이다. 공격, 혹은 방어를 위해 포를 설치한 포루(砲樓)와는 다르다. 성벽 밖 중앙의 긴 줄은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도 가능한 현안(縣眼)이다.

<수원화성 북서포루(砲樓)쪽 돌담>
수원화성의 돌담은 복원한 구간이 있지만 자연석으로 쌓은 이런 구간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아름답다!

<수원화성 북서포루(砲樓)>
치성의 발전된 형태인 포루(砲樓)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무장 방어시설이다. 여러 단으로 된 포문은 위치에 따라 각도가 다르다.

<수원화성 북서적대(敵臺)>
사진 왼쪽 끝에 수원화성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이 보인다. 적대(敵臺)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으며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 설치된 현안(縣眼) 3줄은 성벽 가까이에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오른쪽의 장안문과 북서적대 측면 사진은 2011년에 수원화성 성밖 돌기를 할 때 촬영한 사진이라 상태가 불량하지만 제대로 된 3개의 현안을 볼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장안문 외도와 내도>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은 각 시설마다 아래처럼 <화성성역의궤>의 그림을 안내해 놓았다. 아주 사실적이어서 성이나 행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남긴 기록 때문에 일제나 6.25전쟁으로 파괴된 수원화성이나 화성행궁 복원이 수월했다. 화성행궁 서쪽 가장 뒤벽에 재현해놓은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도 너무 정교해서 별도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3D 수원화성 장안(長安)문, 북옹성 미니어처>
수원화성 북문인 장안(長安)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에다 옹성 구조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미니어처가 총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수원화성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은 수원화성의 북문으로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추었다. 문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敵臺)를 세웠다. 2층의 누각 우진각 지붕은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은 화려하고 정교한 다포식인데 18세기 이후 백년 동안 궁궐을 짓지 않아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의 성문을 대표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왼쪽은 북옹성, 오른쪽은 장안문(長安門)이다.

<수원화성 북옹성과 장안(長安)문>
왼쪽은 옹성에서 본 장안문이고, 오른쪽은 장안문에서 본 옹성이다. 옹성문의 용은 1마리이고, 장안문의 용은 2마리이다.

<성안에서 본 수원화성 장안(長安)문>
왼쪽 사진은 성문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옆 장식이다. 수원화성이나 화성행궁의 기둥, 기단 장식 등은 서울의 궁궐과 달리 용이나 해치 등의 동물이 아닌 식물 같은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다.

<장안(長安)문에서 본 수원화성 서쪽>
사진 왼쪽 끝부분의 살짝 뒤로 물러난 곳은 북서적대(敵臺), 오른쪽의 반원형 문은 옹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수원화성 장안(長安)문 누각>
장안(長安)문은 2층 누각이기 때문에 내부에 계단이 2개가 있다.

<수원화성 북옹성(甕城)>
북옹성(甕城)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게 했다. 조선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었지만 중앙에 출입문을 만든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五星池)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다.

<장안(長安)문 누각에서 본 수원화성 북동적대(敵臺)>
이곳은 화서문 오른쪽과 함께 성벽 아래로 도로가 뚫려 있다. 도로 건너편 중앙의 왼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수원화성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만 있는 적대(敵臺) 중 북동적대(敵臺)이다.

<수원화성 북동적대(敵臺)>
적대(敵臺)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으며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 설치된 현안(縣眼) 3줄은 성벽 가까이에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내부에 설치된 홍이포(紅夷砲)는 길이 215cm, 구경 10cm, 중량 1800kg의 유럽식 화포이다.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포구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장전식이다.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 성곽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썼다. '홍이(紅夷)'는 '붉은 오랑캐'라는 의미로 머리털이 붉은 네덜란드 사람을 지칭하며 17세기 초 정두원이 서양 선교사에게 받아 조선에 전했다.

<수원화성 북동적대(敵臺)에서 본 장안문(長安門)과 북옹성>

<수원화성 북동치(雉)의 타구>
타구는 성벽 위의 낮은 담장인 여장과 여장 사이의 열린 부분으로 몸을 숨기거나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치(雉)는 놓치고 타구만...

<수원화성 북동포루(砲樓)>
북동포루(砲樓)는 장안문 동쪽의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다.

<수원화성 북수문(화홍문)에서 본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왼쪽 원경은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오른쪽의 지붕만 보이는 건물은 북수문(화홍문)이다. 두 건물 모두 수원화성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수원화성 북수문(화홍문, 華虹門)>
북수문(화홍문, 華虹門)은 수원화성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華虹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 10년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고, 2016년에 창문을 복원했다.


<수원화성 동북각루(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
동북각루(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는 화성 북동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 바위 위에 각루를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 위에 있어서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방화수류정 2층에는 임금을 위한 온돌방 1칸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십자형 벽돌과 쪽문>

<수원화성 북암문(北暗門)과 동북포루(舗樓)>
왼쪽의 북암문(北暗門)은 화성 북쪽의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이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으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수원화성 동북각루(방화수류정)와 북암문>

<수원화성 동북포루(舗樓)>
동북포루(舗樓)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일종의 초소, 혹은 군사 대기소이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추었는데 여장과 건물 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甓磴)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기와도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수원화성 동북포루에서 동암문, 동장대(연무대) 사이 성곽길>
주변에 공간 여유가 있어서 단풍이나 억새가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수원화성 동암문에서 동장대(연무대)>

<수원화성 동암문(東暗門) >
윗사진 앞에 있는 동암문(東暗門)은 현재 주변이 공사중이라 접근이 안 되어 23.9.10의 개인적인 답사 때 촬영한 사진을 게제했다. 암문(暗門)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이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으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수원화성 동장대(東將臺, 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장수가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을 훈련하는 장소로 쓰이고, 서장대는 군사훈련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행사를 자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수원화성 동장대(東將臺, 연무대) 뒤쪽>

<수원화성 동장대(연무대) 뒤쪽의 무기들>
왼쪽은 불랑기(佛狼機) 5호, 오른쪽은 투석, 혹은 비석(飛石)이다. 불랑기(佛狼機)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로 몸체 길이 72cm, 총구 9.5cm이다. 불랑은 Frank라는 유럽인을 뜻하는 말로, 서양에서 만든 화포란 뜻이다. 몸체가 큰 1호부터 작은 5호로 구분된다. 발사 틀 구실을 하는 母砲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 발사하는 子砲로 이루어졌다. 여러 개의 子砲를 이용해 연속 사격이 가능하여 임진왜란 이후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위력을 발휘하여 조선 제일의 화포로 평가받았다. 오른쪽은 공격용 돌을 모아둔 곳이다.


<수원화성 동북공심돈(空心墩), 국궁체험장>
공심돈(空心墩)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로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이 있다. 현재의 국궁체험장은 과거에 군사 훈련장이었다.

<수원화성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은 수원화성의 동문으로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들어가는 위치라 돌출된 좌우 성벽이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의 빈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으로 높은 격식을 갖추었지만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한 단계 격이 낮다.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이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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