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인천

수원 화성행궁

큰누리 2025. 11. 26. 03:50

 

≪화성행궁(華城行宮)≫ 사적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조선시대 지방에 건립된 행궁 중 최대 규모이다. 정조 13년(1789)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천장하고,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신수원부의 관청으로 건립되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평소에 관청으로 쓰이다가 국왕이 행차하면 국왕과 수행관원들이 거처하는 궁실(宮室)로 이용되었다. 정조는 현륭원(顯隆園) 천장이 있던 1789년부터 1900년 죽을 때까지 모두 13차례 화성행궁에 머물렀으며,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이곳에서 열었다. 국왕의 현륭원 행차는 정조 이후에도 지속되어서 19세기 말까지 화성행궁의 기능도 이어졌다.

그러나 1911년부터 일제가 화성행궁을 병원(자혜의원)과 경찰서로 쓰려고 개조 또는 철거하여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수원시는 1994년부터 발굴조사 결과와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사업을 실시해 2002년에 중심권역을 복원했고, 2023년에 우화관과 별주권역을 복원하였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일부 건물과  담장은 복원하지 않았다.

 

<홍살문에서 본 화성행궁과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홍살문 오른쪽 옆에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바로 안쪽에 금천교인 신풍교가 있다. 사진 왼쪽은 남군영, 오른쪽은 북군영이다. 

** 화성행궁은 일반적인 궁궐이 남향인데 비해 東向이라 동서로 늘어서 있고, 수원화성 중앙에서 약간 서쪽인 팔달산 아래에 있다.   

 

<화성행궁관람 안내>

관람시간, 관람료(통합권), 무료해설 등에 관한  내용이다.

 

<화성행궁 배치도>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왼쪽(남쪽)은 남군영-서리청-비장청-외정리소-유여택-복내당이 동서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북군영-집사청을 지나 안쪽에 득중정-노래당-낙남헌이 이어진다. 중앙은 신풍문-좌익문-중양문-장락당과 봉수당이 있다. 산 위에는 미로한정, 내포사가 있고, 궁궐 남쪽(왼쪽)에 별주가, 북쪽(오른쪽)에 정조 어진을 모신 화령전과 화성유수부 객사인 우화관이 있다.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新豊樓)>

신풍루(新豊樓)는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로 바꿨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출입문, 윗층은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남군영, 북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추었다.

 

<장용영 수위의식과 신풍루(新豊樓) 앞의 정조가 쓴 현판>

왼쪽의 장용영 수위의식은 2023년 9월 10일에 들렀을 때 촬영했기 때문에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4월~10월까지 매주 일요일 12:30에 하고 7, 8월 혹서기에는 휴연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오른쪽의 '華城行宮' 현판은 정조 친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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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남쪽(정문에서 왼쪽)의 전각들≫

정문 왼쪽에서 안쪽(서쪽)으로 남군영-서리청-비장청-외정리소-유여택-복내당이 동서로 이어져 있지만 전각마다 담이 둘러져 있어 독립성이 유지되는 구조이다. 모두 복원되어서 깔끔하고, 규모는 앞의 남군영만 약간 넓고 전각은 크기나 모양이 5칸으로 비슷비슷하다. 마지막(안쪽)에 있는 외정리소는 특이하게 좁고 긴 'ㄷ'자형 구조이다. 중앙에서 진입하는 것보다 입구에 있는 별도의 출입문으로 들어가 주욱 훑어보고 중앙의 주요 전각들은 다시 앞으로 나와 신풍루 뒤부터 보는 것이 좋다. 왕을 위한 곳이라기보다 북군영과 함께 수행원들이나 평상시에 근무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화성행궁 남쪽(정문에서 왼쪽)의 남군영, 서리청>

주요 전각만 촬영했지만 모두 마당에 'ㄱ'자 형의 부속 건물들이 있다. 남군영과 북군영은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있으며 약 100여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왼쪽 사진 남군영(南軍營)은 정조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壯勇營 外營)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2002년 북원). 오른쪽 사진 서리청(書吏廳)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행궁 안의 건물이 보통 10칸 내외인데 22칸이고, 마당 건너 남쪽에는 문서 창고가 있다.

 

<화성행궁 남쪽(정문에서 왼쪽)의 비장청, 외정리소>

왼쪽의 비장청(裨將廳)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군무하는 곳으로 원활한 업무를 위해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는 동헌(봉수당) 가까이에 두었다. 화성유수는 정이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오른쪽의 외정리소(外整理所)는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화성행궁 행차시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화성행궁 전각의 재현 인물상들>

윗단 왼쪽은 외정리소의 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장면이다. 오른쪽과 아랫단의 3명은 봉수당 뒤 행각의 서로 다른 칸에 연출된 인물들이다. 윗단 오른쪽은 글 읽는 환관, 아랫단은 채비하는 환관단장하는 상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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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북쪽의 전각≫

화성행궁 북쪽(밖에서 보아 정문 오른쪽)에는 북군영과 집사청이 있다. 남군영이 밖에서 출입할 수 있는데 비해 북군영은 안에서 노거수 느티나무 옆에 있는 문을 통해 입장할 수 있다. 모든 전각이 오픈된 남군영과 달리 북군영은 당시(2023.09.10.)에 잠겨 있어서 집사청만 보았다. 집사청에는 왕과 왕비, 고위 간부들의 복식을 한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화성행궁 집사청 문과 600년 노거수 느티나무>

집사청 앞의 느티나무는 화성 성역 이전부터 있었던 600년이 넘은 노거수로 둘레는 6m이다. 화재로 훼손된 것을 2003년부터 나무 살리기 작업으로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나무 앞에서 '모형이다, 산 나무이다'라며 자세히 관찰했다. 신풍루 밖 좌우의 느티나무도 350년 수령의 보호수이다.

 

<화성행궁 북쪽의 집사청(執事廳)과 북군영(北軍營)>

안에서 입장하기 때문에 먼저 보이는 건물은 집사청(왼쪽 사진)이다. 집사청은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와 화성에서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화성행궁의 객사인 우화관(于華館)에서 왕에게 올리는 의례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오른쪽 사진 왼쪽 근경은 집사청, 원경의 중앙은 당시 잠겨서 들어가지 못한 북군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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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中陽門)>

화성행궁은 건물마다 담장이 있고 담장에는 쪽문(!)이 있어서 사전 정보가 없으면 현장에서 방황하기 쉽다. 수많은 작은 문은 몰라도 상관없지만 정문(신풍루)에서 정전인 봉수당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좌익문과 중양문, 정조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외삼문과 내삼문 정도는 알아두면 좋다. 아래 사진 왼쪽은 외문인 좌익문(左翊門)이고, 오른쪽은 내문 격인 중양문(中陽門)이다. 그 안에 정전인 봉수당이 있다.

 

<화성행궁 정전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은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로 정조 13년(1789)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중앙에 왕이 지나는 어로(御路)를 두고 건물 앞에 넓은 기단인 월대(月臺)를 갖추었다. 

 

<화성행궁 정전 봉수당(奉壽堂) 기단과 드무>

화성행궁이나 수원화성의 건물의 장식은 서울의 궁궐과 다른 점이 많은데 특히 계단의 장식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궁궐 계단은 용이나 봉황 등으로 장식하는데 봉수당은 태극 무늬이다. 수원화성의 동장대 계단에는 식물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화성행궁 정조대왕의 처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행차시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를 재현했다. 현재 봉수당에 있으나 원래는 유여택(維與宅)에 있다.

 

<화성행궁 정전 봉수당(奉壽堂)>

임금 행차 시 정전으로 사용된 '봉수당(奉壽堂)' 중앙의 4칸을 편전으로 연출한 것이다. 을묘원행 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곳으로 '만년의 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로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짓고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했다.

 

<화성행궁 봉수당(奉壽堂)에서의 진찬연>

1795년 을묘원행 시 진찬연 장면을 부분 연출한 것으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고, 상궁들이 왕과 혜경궁 홍씨를 보좌하고 있다. 이날 진찬연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 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봉수당에서의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과 진찬상 모형도>

 

<화성행궁 경룡관(景龍館)과 봉수당(奉壽堂)>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長樂堂)으로 들어가는 대문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당 태종의 궁궐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은 '즐거움에 이른다'는 의미의 지락문(至樂門)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4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화성행궁 장락당(長樂堂)>

장락당(長樂堂)은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지은 건물이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임금이 화성에 오면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3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장락당(長樂堂) 침소에 들기 전의 혜경궁 홍씨>

 

<복내당에서 본 장락당(長樂堂)과 봉수당(奉壽堂)의 지붕과 담장>

화성행궁은 복원한 건물들도 단아하고 아름답지만 모든 건물을 독자적으로 둘러싼 담장과 협문들도 아름답다. 이곳에서 본 장락당과 봉수당의 귀면 모양 치미와 잡상, 담장의 기와가 특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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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복내당(福內堂)과 부엌>

복내당(福內堂)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기 위해 1790년에 지은 내아 건물로 정조 18년(1794) 장락당을 짓기 전까지 왕의 숙소로 쓰였다.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여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에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20세기 초 경기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었다. 

 

<화성행궁 유여택(維與宅) 남쪽>

 

<화성행궁 유여택(維與宅)>

유여택(維與宅)은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이었으나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정조 행차 시 집무공간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화성행궁 유여택(維與宅) 마당의 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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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뒷산(후원)으로 오르는 계단>

뒷산(후원)에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군사시설인 내포사(內舖舍)와 소박한 정자인 미로한정(未老閑亭)이 있다. 민속박물관 답사 때는 주로 중앙 라인의 건물과 화령전 위주로 보았기 때문에 남·북군영과 후원의 건물들은 23년 9월10일에 둘러본 사진으로 대체했다. 후원(뒷산)은 평지에 세운 화성행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아주 좋다.

 

<화성행궁 뒷산(후원)에서 본 낙남헌과 노래당, 득중정>

이 세 건물은 평지에서는 어느 방향에서든지 전체적으로 볼 수 없지만 뒷산(후원)에서는 가능하다. 왼쪽은 당시(23.09.10.)에 공사 진행 중이던 우화관이다. 중앙의 건물은 화성행궁에서 끝까지 원형을 유지한 낙남헌(洛南軒)노래당(老來堂), 오른쪽의 꺾인 건물은 활을 쏘는 정자 득중정(得中亭)이다. 건물 왼쪽의 녹색 문쪽은 낙남헌(洛南軒), 중앙의 분홍색 벽은 노래당(老來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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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후원)에서 조망한 화성행궁>

윗 사진은 계단 위쪽에서, 아래 사진은 미로한정에서 조망한 화성행궁이다. 소나무에 가려지긴 했지만 정문인 신풍루부터 화성행궁 전체 조망이 가능하다. 윗사진은 봉수당(오른쪽)과 득중정 뒤 행각인데 봉수당쪽 담벽에 '팔폭병풍도'와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를 재현해 놓아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볼거리이다. 그림은 따로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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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뒷산(후원)의 군사시설 내포사(內舖舍)>

내포사(內舖舍)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행궁에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하던 군사시설이다. 전면 반 칸은 개방하고 좌우에 낮은 벽을 쳐서 비바람을 막았으며,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후면 1칸에는 온돌을 설치했다. 평상시에는 장교 1명과 군졸 3명이 근무했지만 왕이 행궁에 머물면 장교 2명과 군졸 4명을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2006년에 복원.

 

<화성행궁 뒷산(후원)의 미로한정(未老閑亭)>

미로한정(未老閑亭)은 화성행궁 후원 가장 높은 곳에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화성 축성을 막 시작한 1794년 정월, 정조는 이곳에 올라 허허벌판이던 수원부에 1천여 집이 들어서 번성한 모습을 보며 관리들을 칭찬했다. 2002년에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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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낙남헌(洛南軒)>

낙남헌(洛南軒)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는 건물로 정조 18년(1794)에 창건되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때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교 무과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낙남헌(洛南軒)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낙남헌(洛南軒)은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화성행궁 낙남헌(洛南軒) 연못의 취병(翠屛)>

취병(翠屛)은 고리버들이나 소나무, 주목, 향나무 등 침엽수 가지를 지지대에 엮어 문이나 병풍 모양으로 만든 생울타리이다. 시선을 가리고 공간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며 낙남헌 연못과 유여택 후면, 지금은 사라진 장춘각 전면에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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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우화관(于華觀)>

우화관(于華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客舍)이다. 객사는 지방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에게 의례를 올리는 곳이면서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다.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정청(正廳)을 중앙에 두고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건물을 좌우에 날개처럼 붙인 모습이 일반적이다. 우화관의 정청은 바닥에 벽돌을 깔아 특별히 벽대청(甓大廳)이라 불렀다.

객사의 전패가 국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성행궁 전체가 동향 배치임에도 불구하고 우화관은 남향이다. 건립 초기에는 팔달관으로 불리었으나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된 이후 정조의 명에 따라 개명되었다. 윗 사진은 우화관 정문, 아래 사진은 본 건물이다. 2023년 복원.

 

<화성행궁 낙남헌(洛南軒) 동(東)행각>

우화관과 낙남헌의 경계를 이루는 17칸의 행각이다. 이중 우화관 담장과 연결된 11칸은 행궁과 화성을 지키는 별무사(別武士)와 수첩군관(守堞軍官)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관아는 객사와 주요 문루에만 단청을 하기 때문에 단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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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령전(華寧殿)≫ 사적

수원 화령전(華寧殿)은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정전인 운한각(雲漢閣)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구비하였다. 화령전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일부 공간을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정조의 무덤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현재의 융릉)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하자 당시에 나라 일을 보던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있던 정조의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했다.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1801)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정조의 어진을 모셔왔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1804년에 화성에 처음으로 내려와서 현륭원(융릉)과 건릉에서  제사를 지내고,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봉행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지낸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본행하였다.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중심이 되어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으며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에는 제사를 지냈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

 

** 화령전(華寧殿)은 화성행궁에 붙어 있지만 모든 안내도에서도 제외가 되고 명칭이 '수원 화령전'으로 표기되는 것으로 미루어 화성행궁 부속건물이 아니라 별도의 건물로 다루어지는 듯하다.

 

<수원 화령전(華寧殿) 외삼문과 내삼문>

 

<수원 화령전(華寧殿) 정전 운한각(雲漢閣)> 보물

운한각(雲漢閣)은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이다.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閤子)를 두고, 좌우의 익실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이는 물품을 보관했다.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만들고, 학문을 좋아한 왕을 기리기 위해 익실에 서책을 봉안했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현재 운한각에 있는 어진은 2004년에 다시 그린 표준 영정이다. 원래 모셔져 있던 정조 어진은 1908년에 서울로 옮겼으나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었다. 운한각은 1966년 수리.

 

<수원 화령전(華寧殿) 운한각(雲漢閣) 남쪽면>

건물 모두 단청이나 채색을 안 해서 느낌이 더 특별하다.

 

<수원 화령전(華寧殿) 운한각(雲漢閣)의 정조 어진>

 

<수원 화령전(華寧殿) 운한각(雲漢閣)의 가마>

왕실에서 이용한 다른 가마와 달리 모양이나 장식이 단조로운 것으로 미루어 어진을 운반할 때 사용한 가마가 아닐까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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