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백두산.압록강.고구려유적 답사 5(오회분 5호묘, 환도산성, 산성하무덤떼, 만포마을 조망)

큰누리 2012. 5. 31. 09:28

<2009. 08. 22. 토. 맑음>2

버스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회분묘로 향한다. 좁은 골목길로 이동하는 사이에 차창 밖을 보니 인력거와 삼륜차들이 꽤 보인다. 걷기엔 좀 멀고 차를 타기엔 짧은 거리이다. 관광객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하게 장기를 두는 관리인들 너머로 머리나무가 보이고 그 사이로 아담한 삼각형의 무덤들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다섯 개의 무덤이 보이지는 않는다. '오회분'의 '회'는 투구를 닮았다는 뜻인데 어딜 봐서 투구지? 내 보기엔 꼬마 피라미드 같구만.

 

입구 쪽의 <고구려벽화 전시실>에 오회분 4호묘, 장천 1호묘, 무용총, 각저총의 벽화사진이 걸려있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빛이 바래서 무덤의 실제 벽화보다 나을 게 없다. 직각으로 난 길을 조금 걸어 유일하게 개방하는 5호묘 입구에 다다르니 감시인이 앉아 있다. 널방으로 향하는 지하로 난 다소 긴 통로를 따라 내려서니 공기가 습하고 서늘하다. 컴컴한 널방에 관이 있던 자리 3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4면으로 벽화가 보인다. 처음 대하는 고구려의 벽화에 대한 감격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벽을 타고 줄줄 흐르는 물이 더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에 감격스럽게 봤던 <아, 고구려전>에서의 벽화들과 오회분 5호묘의 그림이 오버랩 된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 컴컴하고 물이 줄줄 흐르는 널방에서 고구려인들의 생활과 사고를 정확하게 엿볼 수 있는 이 벽화를 과연 제대로 분별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마름모꼴을 엇갈려 올린 꺾인 천정과 몇몇 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사신도와 그 밖의 의인화된 신들을 만날 수 있으니 고구려인의 신앙을 가장 총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무덤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회분 5호묘 가는 길>

 

 

<고구려벽화 전시실의 4호묘 벽화>

 

 

<오회분 5호묘 내부/널방으로 통하는 입구>

  

 

시끄럽던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나가자 우리 일행만 남았다. 누군가 “감시인이 안 볼 때 얼른 사진을 찍어도 되는데...” 라고 말하자 뒷골이 당기는 느낌으로 카메라를 슬며시 든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카메라로 벽화를 향해 초점을 맞추지만 너무 어둡고 번들거려서 촬영이 쉽지 않다. 밖을 향해 힐끔거리며 동영상을 찍는데 불안감으로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무래도 난 도둑질을 업으로는 못 하겠다! 3분 촬영을 하고 나오는데 감시인 앞에 이르자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휴우, 무사통과다!  

 

다음 코스는 환도산성과 산성下무덤떼이다. 석양의 주황빛이 사물을 덮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잠깐 버스로 이동을 하니 넓은 벌판에 무덤들이 보인다. 매표소 앞에서 무덤떼 쪽을 촬영하는데 환도산성과 치(답사지의 '점장대'인 듯)를 꼭 봐야한다는 광나루님과 날이 저물고 갈 길이 멀어 무덤떼만 보고 떠난다는 가이드 간에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다행히 완강한 광나루님의 주장이 관철됐다.

 

서두르라고 고함을 치는 광나루님을 따라 환도산성터를 향해 오르니 냇가를 중심으로 양쪽에 성의 돌담과 무너진 단면의 돌들이 보인다. 지금도 무너지는 중이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남아있다. 돌의 폭만 보더라도 단단하기 그지없는 성곽이다. 조선시대의 성을 가장 많이 보아왔던 나로서는 아차산 사전 답사가 고구려 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성곽을 관통하는 시내를 따라 물봉선과 싱아, 고마리, 개쉬땅나무 꽃이 곱게 피어있고 그 옆 풀밭에선 누런 소, 밤색 소,  그리고 처음 보는 흰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고놈들, 참 잘 생겼다! 

 

 

<냇가 왼쪽의 환도산성터. 집안>

 

 

<냇가 오른쪽=산성하무덤떼쪽의 환도산성터. 집안>

 

 

<환도산성터 냇가의 개쉬땅나무>

 

 

사진을 찍다 일행을 놓쳐 목소리가 들리는 산 쪽으로 뛰어오르니 일행이 치 앞에 모여 진지하게 광나루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달음질쳐 오르는 길에 옆의 오미자 밭에 눈길이 간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열매를 몇 컷 찍고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자마자 일행들이 벌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전망대에 올라 아차산에서 김민수님이 설명한 고구려 성과 치의 구조를 떠올리며 치(점장대)를 눈에 꼭꼭 눌러 담고 주변도 둘러본다. 그리고 또 뛴다.   

 

 

<환도산성 점장대>

 

 

무덤떼를 둘러보러 가는 일행의 맨 뒤에 따라 붙는다. 집안에는 12,000여 기의 무덤이 있고, 환도산성 아래 무덤떼에는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400여 기의 무덤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형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무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유실된 것 말고도 몇 십년 전에 상당 부분이 홍수로 잠겼다는 글을 본 것 같다.

귀족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산성하무덤떼를 직접 본 순간 상상을 뛰어넘는 방대한 규모에 상당히 놀랐다. 대부분 흔적만 남고 온전한 것은 몇 기 안 되지만 무덤 하나하나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개인적으로 고구려의 스케일을 가장 강하게 느꼈던 유적이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즈음 혼자 떨어져 풀숲을 헤치며 막 입구 단장을 끝낸 돌무덤을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돌로 된 탑은 뱀의 소굴이다’ 는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글이 퍼뜩 떠오르며 머리끝이 쭈뼛 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용기를 내어 비교적 온전한 돌무덤 위를 기어 올라가니 특별한 건 없고 무덤 윗부분 역시 무너져 어지럽게 쌓인 돌 뿐이다. 그래도 봤으니 됐다. 

 

 

<山城下무덤떼1>

↑ 머리樹(나무)들

 

 

<산성하무덤떼2. 사진의 왼쪽 중앙 끝에 환도산성 터가 있음> 

 

 

다음 코스는 무덤떼에서 10분 거리의 압록강변 만포마을 조망지이다. 집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만큼 몇 걸음만 떼어도 고구려의 유적과 마주친다. 주로 무덤이나 성터이긴 하지만... 집안은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이다. 

 

중, 고등학교 때 배워서 집안이 중국 땅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압록강변, 즉 북한의 바로 코앞에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우리가 돌아본 무덤-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 장군총(장수왕릉)에서 보면 강 건너 북한의 산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북한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 바로 집안 국내성 끝의 만포마을 조망지이다.

해는 벌써 지고 압록강에 붉은 노을 그림자를 드리우는 중이다. 강 건너 만포마을이 보인다. 산 아래 납작 엎드린 열두어 채쯤 되는, 똑같은 단층집들은 멀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줌으로 끌어당겨보아도 개미새끼 하나 볼 수 없다. 지글지글 고기를 굽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강 이편과는 너무도 딴판이다. 산자락 역시 나무는 없고 산을 일궈 가꾼 밭만 보인다. 

 

 

 <압록강과 만포마을>

 

 

<左-중국 집안, 中央-압록강, 前,右-북한 만포마을>

  

 

저녁을 먹으러 인근의 식당으로 들어서니 한국식으로 밥상이 차려저 있지만 상차림이 너무 빈약하다. 숯불 위에 올려 진 화로와 쌈용 야채, 생고추와 마늘 한 접시, 김치와 물김치, 콩나물, 쌈장이 전부다. 풀밭 위에 벌건 게 한 접시 있어서 ‘저건 또 뭐지’ 싶은데 부족하지만 고기를 맛있게 먹으란다. 아하, 쇠고기!

종이장처럼 얇은 고기를 구워 한입 넣으니 들척지근하고 짜장 냄새가 나는 고기양념이 비위에 거슬린다. 하지만 부드러운 고기질은 일품이다. 이곳에서 방목한 쇠고기란다. 고기라고 맛있게 먹는 젊은 층과 어린이를 위해 서너 점을 먹고 물러나 상추로 쌈을 싸서 먹어보니 아주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두 채반을 다 먹어치웠다. 약간은 부실해 보였던 고기에 대한 아쉬움이 싹 가신다.

 

밤 8시, 이제 단동으로 가려나? 지금 출발해도 대여섯 시간이고 도착하면 자정이 다 되겠지? 본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지만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집안의 불고기집 금영식당>

   

 

식당을 나서니 귀에 익숙한 노래가 들린다. ‘청춘은 봄이요, 봄은 꾸움나아라~’ 50년대의 한국 가요 아닌가? 그런데 왜 이곳에서 그 노래가 들리지? 소리를 따라가 보니 장관이다.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밝은 상가 앞에 5열로 줄을 맞춰 집단으로 춤을 추고 있다. 김수로의 꼭지점댄스 수준? 중국이나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함께 모여 춤을 추거나 우슈를 하는 것을 TV에서 본적이 있다. 조선족이 많이 산다지만 그래도 중국인데 한국노래에 맞춰 집단으로 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니 이런 게 한류인가 싶어 신기하다!

 

 

<중국인들의 집단 댄스>

 

 

우리가 지나고 있는 부근 모두가 국내성 안이고 지금 시청인가가 고구려의 왕궁터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를 타려는데 아직 한 코스가 남았단다. 2층의 미용실이 있는 번화한 사거리를 지나 대로 쪽으로 가더니 도시를 지나는 냇가의 다리에서 광나루님이 멈춘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컴컴한 냇가 한쪽에 돌로 쌓은 성의 흔적이 또렷이 보인다. 시민들의 공원인 듯한 냇가를 따라 부분적으로 성의 흔적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이게 바로 배부 받은 답사지에 나왔던, 광나루님이 예전의 답사팀에서 혼자 빠져나와 찾아봤다던 아파트 앞의 그 성터로구나! 자세히 보고 싶지만 내려가서 관찰할 시간이 없다. 컴컴해서 사진으로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성곽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또 길고 긴 버스 길...

 

너무 지쳐 버스 안에서 고꾸라지다시피 하며 6시간의 길을 달려 자정도 훌쩍 넘긴 시각에 우리는 단동의 흠홍호텔에 도착했다. 중국에 도착한 이래 나흘을 강행군 했으니 일행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그야말로 모두 반쯤은 기절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 의자에 짓눌린 다리의 통증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주 오는 차량조차 거의 없는 밤길에 코따커가 조는 게 아닌가 싶어 거울을 보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혼신을 다해 운전하고 있다. 급한 볼일을 위해 딱 한번, 어느 산중에서 일행이 모두 내려 몸을 잠깐 풀었다. 그 곳에서 본 빛나는 별들은 내가 그 어느 곳에서 본 것보다 밝고 아름다웠다.

 

 

<국내성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