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백두산.압록강.고구려유적 답사 4(광개토대왕과 장수왕릉)

큰누리 2012. 5. 31. 09:26

<2009. 08. 22. 토. 맑음>1  

새벽 4시 10분, 눈을 쥐어뜯으며 전화를 받으니 졸리는 중국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데스크에서 걸려온 알람 전화다. 우리 가족 모두 알람기능이 없다. 내 휴대폰은 벌써 배안에서 돌아가셨고, 동생과 딸은 시계만 찼으니...

 

중국은 우리와 같은 220V라 충전이 가능하다. 중국 여행 내내 호텔 방 배정을 받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이 디카 밧데리 충전이었지만 불행히 휴대폰 충전기는 깜빡했다. 디카 부속품의 반만 챙겼어도... 할 수 없이 전날 밤 광나루님께 아침에 깨워주십사 했더니 데스크에 부탁을 이미 해놓으셨단다. 약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동생을 깨우는데 광나루님이 방방마다 ‘일어나라’며 문을 두드리고 다닌다. 리더는 별 걸 다 해야 되는구나!

 

다섯 시 반, 몸이 무거울 텐데 전원이 집합시간을 지켰다. 호텔에서 아침 대신 준비하는 도시락을 기다리려니 시간이 남는다. 호텔 앞마당격인 숲으로 들어가니 전나무와 자작나무 사이에 미역취, 구절초, 분홍바늘꽃, 배초향, 루드베키아가 있다. 사흘을 함께 하는 동안 낯이 익은 둥글레님과 푸름님도 같이 움직이시며 주변의 꽃 이름을 물어보신다. 두 분은 특히 꽃에 관심이 많으시다. 키는 크지만 부실해서 땅에 쓰러진 분홍바늘꽃은 각시취와 더불어 가장 많이 본 때깔 좋은 붉은계통의 꽃이지만 버스로 스치기만 하는 통에 안타까웠다. 딱 한 장, 제대로 된 분홍바늘꽃 사진을 이곳에서 건졌다. 6시 20분, 도시락이 준비 됐는지 출발이란다. 

 

 

<백두산 백화림호텔앞의 분홍바늘꽃>

 

 

<백두산 백화림호텔앞의 쑥부쟁이>

 

 

<백두산 백화림호텔앞의 자작나무>

 

 

오늘 답사는 집안, 환인지역의 고구려유적, 압록강 만포마을 등이다. 처음 단동에 도착해서 백두산으로 올라온 역코스로 8시간을 또 이동해야 한다. 아, 빡센 일정으로 어제부터 콧물이 줄줄 흐르는데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다. 이놈의 땅덩이는 왜 이리 커서 한번 움직였다 하면 기본이 8시간이고 하루 이동코스는 버스로 열대여섯 시간이란 말이냐!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억지로는 절대 못할 일이다. 일행 중 팔십 안팎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백두산 천문봉까지 거뜬히 오르셨고 초딩인 두 꼬마(?)도 푸념 한마디가 없다.

 

아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이도백하의 외곽에 있는 초라한 가게 앞에서 하차한 시각이 8시 30분경, 일행이 화장실도 들르고 가게를 둘러보는 동안 옆에 있는 민가 마당의 꽃과 풀들이 탐난다. “계세요?” 상대방이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겠지만 기척이 없고 남자바지만 빨래줄에 널려있다. 조심스럽게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마당을 지나 텃밭으로 가니 노인장대, 해바라기, 땅꽈리 등이 보이고 부추, 고추, 파 등이 가지런히 심어져있다. 사진을 찍다 기척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집 주인인 듯 열 살 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남의 집을 무단침입 했으니 미안한 마음에 알아듣지도 못할 변명을 하며 카메라를 보여주니 수줍게 웃는다. 따라온 둥글레님이 한국말로 텃밭 끝에 있는 3급 수준의 부실한 화장실을 가리키며 “써도 돼?” 라고 수차 물으니 알아들었을 성 싶은데도 웃기만 한다. 할 수없이 주차장으로 나오니 일행이 저마다 도시락을 까먹거나 가게에 들러 목이버섯 등을 사고 있다. 초라한 가게만큼이나 진열된 상품들도 초라하다. 꼬마가 쭈르르 가게로 달려간다. 아하, 가게 집 꼬마였구나!

 

답답한 버스에서 도시락을 들고 동생과 가게 앞 토방에 앉는다. 꼬마의 아버지로 보이는 가게주인이 집으로 달려가더니 자그만 상을 닦아 건네며 올려놓고 먹으란다. 미안해서 사양하니 기어이 올려놓는 걸 보고서야 자리를 뜬다. 이어서 전병(? 쌀 튀밥처럼 생겼는데 그 곳 사람들의 주식이란다.)과 대파를 가져와서는 먹는 시늉을 한다. 전병은 조금 뜯어먹어보니 구수하고 쫀득한 쌀 뻥튀기 맛이다. 하지만 생 대파는 어쩌라고? 가이드가 지켜보다가 맛있다고 먹으란다. 떨떠름한 마음으로 한입 씹으니 ‘억’소리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대파랑 똑같은데 매워서 어찌 먹나 그래? 내 모습이 우스운지 가족(할머니와 아버지, 꼬마)이 소처럼 선한 눈빛으로 웃는다.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가 귀여워서 일행들이 과자를 줘도 절대 받지 않는다. 나름의 자존심인가 보다. 결국 통역으로 할머니께 간곡히 부탁해서 과자 몇 봉지를 건넨다.

 

 

<통화에서 백두산 가는 길=이도백하 가게의 노인장대>  

 

 

<통화에서 백두산 가는 길=이도백하 가게 텃밭의 해바라기>  

  

 

가게는 초라하지만 백두산 가는 길목이고 주차장이 넓어서 관광객들을 수시로 볼 텐데 이 꼬마에게 우리들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 꼬마를 통해 무서운 공산국가 중국인이 아닌 순수하고 고운 중국인을 보았다. 그래서 그 꼬마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접했던 소수의 중국인들은 친절하고 순수했다. 특히 우리의 발이 돼준 ‘코따커’에게서 큰 감동을 느꼈다. 한번에 8시간이 넘는 운전을 매일 하면서도 커다란 눈망울로 가끔 손님을 한 번씩 훑어볼 뿐 군소리 한 마디 없이 웃는 낯이었다. 한번에 2시간 30분 이상의 장거리 운전을 못하는 나로서는 흐트러짐 없이 운전하는 코따커를 볼 때마다 ‘원래 중국인들은 저렇게 진득한가’ 싶기도 하고 존경스럽기조차 했다. 코따커가 쉬는 때라고는 손님들이 원해서 화장실을 갈 때와 답사를 위해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 뿐이었다. 두 사람만으로도 이번 여행에서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으니 톡톡히 민간외교를 한 셈이다. 

당아욱, 붉은토끼풀, 각시취 등을 몇 컷 더 찍고 버스에 오른다. ‘꼬마야, 안녕! 건강하게, 그리고 건전한 사람으로 잘 커주렴!’

 

12시 반, 통화시에 들러 첫째 날 연변족의 고성방가로 우리를 경악케 했던 금화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낮이라서 잠잠하다. 물김치, 두부조림, 감자볶음, 고추감자볶음, 오이무침, 미역국으로 차려진 밥상에서 감자볶음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바깥으로 나오니 식당 앞에 어김없이 과일장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일행이 과일을 사는 동안 주변의 문방구 진열대와 시가지 풍경을 찍는데 먹어보라며 들이미는 과일장사의 대추를 받아드니 크기는 계란의 반 정도라서 좀 징그럽기조차 한데 맛이 좋다. 먹었으니 또 출발해야지.

 

 

<통화시> 

 

 

2시간을 더 달려 오늘의 첫 번째 코스,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에 도착했다. 차안에서부터 불안했던 뱃속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큰일이다, 볼 게 많은데... 관람에서 처질까봐 부지런히 일행을 따라 움직인다.

 

입구의 A가 네 개나 붙은 <국가급여행경구> <태왕릉 호태왕비시의도>라 쓰인 안내판과 유네스코지정 안내판을 지나니 사진으로 익숙한 광개토대왕비를 씌운 누각이 보인다. 들어가면서 내부촬영은 안 된다고 가이드가 다시 주의를 준다. 우리 외에 다른 중국관광객 한 팀만 있어서 주변이 비교적 호젓하다. 똑같은 모형을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자주 봤고 내용 판독한 것도 책을 통해 몇 차례 봤었지만 진짜 비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청을 세운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생지라 하여 백두산과 만주 지역을 200년간 출입을 통제하다 열강의 침입으로 무력해지면서 이 지역에 비로소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었다. 1880년 이 비가 처음 발견될 당시 이끼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러 비문이 1차로 손상되었고, 발 빠른 일본인들의 비문 조작으로 광개토대왕이 살아있을 때라면 상상도 못할 수난을 이 비는 당했다. 남아있는 비의 글씨는 비교적 또렷하다. 

1면은 고구려의 건국, 2면은 광개토대왕의 업적, 3면은 왕릉의 관리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된 부분이 바로 2면의 광개토대왕의 업적부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공부하기로 하고...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비문>

 

 

멀리 떨어진 줄 알았던 태왕릉이 비석으로부터 걸어서 7분 정도의 같은 구역에 있다. 잔디가 곱게 깔린 머리樹(우리가 임의로 붙인 단발머리처럼 생긴 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지나자 무너져 내려 야트막한 야산처럼 보이는 태왕릉이 보인다.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 확장을 했던 위대한 광개토대왕의 무덤이 저런 모습이라니... 광개토대왕의 능일 거라는 추정만 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 중, 일 3국이 서로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면서 왈가왈부하는 비석보다  무너져서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능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태왕릉 도편전시당-일종의 박물관>에 들러 비문 사진을 촬영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무덤에 쇠를 박아 무자비하게 설치한 계단을 타고 태왕릉 정상 쪽으로 오른다. 관이 있던 자리까지 올라 갈 수 있게 되어있는데 무너져 내리는 능에 무리하게 계단을 설치해가면서까지 관광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간다. 엉성한 철문이 열려있는 관이 있던 자리는 당연히 도굴되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입구에는 각목, 알루미늄 샤시까지 어수선하게 방치되어 무덤 주인이 누구냐를 떠나 눈을 씻고 봐도 고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다. 살아서 잘난 사람은 죽어서도 무덤에서조차 편히 쉴 수 없나보다.

 

능에서 내려와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니 골고루(!)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저 상태로라도 능으로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착잡한 마음으로 일행을 쫓아 바쁜 걸음을 옮기는데 큰엉겅퀴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원래 고개를 숙이는 야생화지만 광개토대왕의 영혼이 보고 있다면 고개 숙인 저 큰엉겅퀴를 보는 나처럼 비감스럽지 않을까?

 

 

<광개토대왕릉(태왕릉)>

 

 

<태왕릉2. 고분 정상에서 1/3 지점 쯤에 있는, 관을 안치했던 곳> 

 

 

 <태왕릉3>

 

 

배탈난 게 말썽이다. 그래도 참아야 나머지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태왕릉에서 지척인 곳에 장군총(장수왕릉)이 있다. 무너진 태왕릉을 보다 장군총을 보니 마음이 다소 밝아진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능으로 알려진 거대하고 잘 정리된 7층의 무덤을 보니 왜 동양의 피라미드라 부르는지 공감이 간다. 태왕릉이 온전했더라면 눈앞의 거대한 이 장군총을 당연히 압도했을 것이다. 역시 볼 성 사나운 쇠 계단이 능의 정상으로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금지이다. 차라리 잘 됐다. 능위에 있다는 사당(향당)자리를 못 보는 아쉬움보다 능을 보존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 아예 저 쇠 계단도 치우면 좋을 텐데... 능의 사면을 한 바퀴 돌다보니 겉보기와는 달리 장군총도 계단모양으로 쌓은 돌의 곳곳이 많이 기울어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돌이 주저앉고 결국 무덤마저 무너질 것이다.

 

한쪽으로 돌아가니 배총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군총의 사면에서 호위를 했을 거라 추측하는데 남아있는 것은 달랑 하나이다. 그나마 제대로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생김새가 얼마나 깜찍한지 애첩무덤이라고도 불리는 게 이해가 된다. 아차산 사전 답사 때 본 무덤과 너무나 닮은꼴이다. 장군총 앞에서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관광구역을 빠져나온다. 

매표소 옆으로 무덤 폭의 몇 배는 됨직한 단층건물들이 완공을 앞두고 한 면을 다 채우고 있다. 용도가 미심쩍어 광나루님께 여쭈니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란다. 중국정부가 장군총에서 본전을 뽑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다.  

 

 

<장수왕릉(장군총)>  

 

 

<훼손된 장수왕릉(장군총)> 

 

 

 

<장군총 배총>

 

 

장군총(장수왕릉) 관람을 마치고 매표소를 나서니 과일장사들이 한쪽에 늘어서 있다. 땡볕을 돌아다녀서 모두 목이 마르다. 일행 중 한 분이 수박 한통을 사서 잘라준다. 정말 달고 시원한 수박이었다. 지루한 버스 길을 염두에 두고 일행들이 주섬주섬 과일들을 산다. 자두, 사과, 포도 등... 수도의 터진 호스 이곳저곳에서 새어나오는 물로 손수건을 적셔 땀을 닦으며 잠시 숨들을 돌린다. 입장료가 100위안(한화로 18,000원 정도)인 국가가 관리하는 유적지나 경승지에 비해 천원 한장이면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담아주는 과일들이 현지인들의 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 런지...  

 

 

<장수왕릉=장군총 입구의 일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