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백두산.압록강.고구려유적 답사 2(단동시와 북한, 압록강단교, 오녀산성)

큰누리 2012. 5. 31. 09:23

<2009. 08.20. 목. 맑음>

일찍 일어나서 북적대는 사람들 소리에 6시(한국시간) 쯤에 기상, 비는 말끔히 갰다. 아싸, 일출을 볼 수 있다! 씻지도 않고 침구를 간단히 정리한 후 카메라를 들고 뱃전으로 나간다. (한국시간으로) 7시 10분까지 식사시간을 지키라는 안내멘트가 나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안정되게 자리를 잡은 후 일출장면을 찍기 시작한다. 수평을 잘 맞춰야지! 왜 그렇게 평야나 수평선을 찍으면 애써 신경을 쓰는 데도 사선이 되는지...

발갛게 동이 트는 쪽을 향해 팔꿈치를 배의 난간에 붙이고 셔터를 누른다. 흐믓한 마음으로 카메라의 여러 기능을 동원해 가며 30여분을 찍었다. 해가 다 올라왔을 때 쯤 예쁜 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압록강 하구, 북한의 신의주 땅이다!  

 

 

<서해안 일출사진인데 해 위의 구름으로 구분하려니 일몰사진이랑 헛갈린다.> 

 

 

<압록강 하구 신의주, 왼쪽은 단동> 

 

 

지정된 식사시간은 이미 지났다. 원하는 일 하느라 밥 굶은 나야 상관없지만 내 옆을 지키느라 덩달아 밥을 굶은 동생이 이동 중에 멀미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식당으로 올라가 미안한 표정으로 밥 좀 줄 수 없냐니까 무뚝뚝한 표정에 턱으로 식판을 가리킨다. 고마워요, 오빠! 맛있게 먹을게요! 그나저나 딸애가 밥은 제대로 챙겨 먹었나?

 

한국시간 8시 15분, 드디어 동항에 도착했다. 16시간 만이다. 도착하고 맘대로 하선하는 게 아니다. 끝없이 기다린다. 만만디~. 게다가 우리는 단체라서 마지막에 내린다나? 뭘 하느라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지만 자주 와봤던 광나루님은 중국은 뭐든지 느리다며 기다리란다.

기다리는 동안에 배 밖의 풍경을 찍는다. 야적한 철가루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그죽죽한 인상을 주는 항구와 우뚝 치솟은 굴뚝(동항의 상징이다!), 건너편 북한 쪽의 섬들, 그리고 잘못 쓰인 한국어 경고문(미끄럼 주의 -> 미끄름 주의), 간자 틈에서 몇 개 알아볼 수 있는 각종 경고문 등... 하지만 녹색계통의 제복에 모자를 쓰고 승객이 내리는 임시 계단 양쪽에 부담스럽게 도열한 8명의 중국경찰(?)은 찍지 못했다. 중국에서 공안(한국의 경찰) 사진을 찍다 걸리면 카메라까지 몽땅 압수당한다는 말이 심한 압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우리의 하선 차례, 부담스런 중국경찰을 통과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어수선한 주변을 한참 달려 터미널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복잡한 수속을 마치고 한참 만에 검색대를 빠져나와 광나루님의 지시대로 의자에서 일행을 기다리는데 <나홀로 테마 여행>이라는 엉성한 프린트 물을 든 청년이 여행사 목걸이를 보고 내게 다가온다. 중국 측의 우리 가이드구나! 인물 좋고! 그런데 안색이 창백하고 좀 예민해 보인다.

 

 

<단동=동항>

 

 

<동항의 잘못된 한글표기>

 

 

<동항=단동국제여객선터미널>

 

 

30분여를 걸려 일행이 검색대를 모두 빠져나온 뒤 터미널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날씨가 정말 좋다. 쾌청하고 햇살은 따갑지만 덥지는 않고... 맨 앞자리는 가이드를 위해 비우라는 말에 두 번째 자리를 잡고 동생과 함께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가 연변족의 느낌을 완전히 벋어나지 못한 말투로 마이크를 잡고 자신과 운전기사를 소개한다. 이어서 조금 부담스러운 목소리로 북한가요 <반갑습니다>를 부른다. 나름의 손님을 대하는 방식일 텐데 센스 있는 청년이다. 여행 내내 써먹은 “코따꺼, 신꼴라!”도 배웠다. 우리말로 “허기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란다.

 

동항에서 단동시로 빠져나가는 40여분 동안 가이드의 설명을 반쯤은 건성으로 넘기며 차창으로 스치는 낯선 풍경들을 바라본다. 밀물 때라는데 퇴적층으로 된 섬이나 강둑에 연분홍빛 여뀌들이 일부로 심어놓은 것처럼 예쁘게 줄지어 피어있고 강 건너편으로는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버스가 가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 저게 바로 북한이로구나! 이렇게 가까이 북한이 코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단동시내에 진입하자 한국과는 모양이 다른 가로등을 필두로, 공사가 막 끝난 듯 깨끗한 아파트들이 왼편으로 이어진다. 오른편으로는 연두색 산과 섬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진다. 날로 발전하는 중국 단동시와 60년대쯤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북한이 비교되어 마음이 언짢다. 본격적으로 깨끗하고 쭉쭉 뻗은 빌딩이 왼쪽으로 스쳐갈 즈음에야 TV에서 봤던 낡고 초라한 단층 건물들이 오른편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날씨가 너무 쾌청한 관계로 마지막 일정인 압록강단교 유람을 오늘 하기로 일정을 바꿨다고 한다. 그것도 좋겠다. 

 

압록강 왼편을 따라 형성된 단동시의 중앙 쯤 되는 곳에서 내리니 바로 유람선 타는 곳이다.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 관광을 오는 한국인을 위한 것인지 2008 북경올림픽의 여파인지는 모르지만 강변이 깨끗하고 예쁘게 정비되어 있다. 공사는 최근에 한 것인지 모든 시설에서 페인트가 묻어날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청결하고 무엇보다 공기가 맑은 점이 마음에 든다. 나중에 가이드에게서 들은 말이지만 동북3성은 한국관광객이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란다. 그래서 최근엔 백두산관광객 유치를 위해 산림 속에 830억인가를 들여 공항을 완공했다고 한다.  

 

 

<단동시>

  

 

도로에는 쭉쭉 뻗은 빌딩의 수준에 못 미치는 양의 차량들이 다니고 횡단보도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나름의 질서는 있고 여기저기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모자를 눌러쓰고 카메라를 챙긴 후 유람선을 탔다. 타자마자 시끄러운 중국인 여자목소리가 마이크로 들린다.

김일성주석의 초상이 그려진 북한 지폐, 싸구려 기념품 등을 파는 아가씨인데 조그만 배에 둘이나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전으로 스쳐지나가는 북한 땅과 단동 시내를 구경하며 셔터를 눌러댄다. 배가 돌아가는 지점에 압록강단교가 있고 점심시간인지 강가에 나와 담배를 피거나 쭈그리고 앉아있는 북한 사람 몇 명이 건너편에 보인다. 특히 TV에서 많이 봐서 익숙한 빨간 지붕의 2층 건물, 초라한 가옥들, 낡고 녹 슬은 선박들이 화려하고 말끔한 단동시의 빌딩과 비교되어 더욱 초라해 보인다.

 

 

<단동시 맞은편의 북한과 압록강>

 

 

<유람선에서 본 북한>

 

 

30여분의 유람선 관광이 끝나고 선착장 바로 옆에 있는 압록강단교로 이동했다. 땡볕이 힘들었는지 큰 애는 음료수를 사서 물고 있다. 단체입장을 하고 계단을 몇 개 오르니 단교 바로 옆에 새로 만든 다리가 있고 왼편으론 카페의 사진에서 보았던 군인들 진군모습 부조가 있다. 중공군 개입 때 대장격인 중공군 쪽 장교라는데 내 보기엔 김일성주석의 모습에 더 가깝다. 새로 만든 왼쪽 다리로 하루에 한번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기차가 다닌다고 한다.

 

다리 위의 <압록강斷橋>라고 쓰인 대형현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약간 흥분되는 마음으로 철교 위를 걷는다. 다리 중간 중간에 걸려있는 폭파되기 전의 사진을 보며 1km쯤을 걸어가니 잘린 부분이 1950년의 모습 그대로 흉물스럽게 나타난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단교 부분, 폭파에 사용된 포탄 등이 기념사진을 찍기 좋게 놓여있고 다리의 중간부분까지 내려가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계단도 설치되어 있다.

우리에겐 비극의 현장이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들른다지만 한국인과 맞먹는 수의 중국관광객은 과연 무슨 심정으로 끊어진 다리를 관광하는 걸까? 엄청나게 따가운 햇살에 땀을 흘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되 건너온다. 아까 놓쳤던 유엔군을 향해 중공군이 함포사격을 하던 건물이 작은 감옥처럼 계단 중간에 놓인 게 눈에 띈다.   

 

 

<압록강단교>

  

 

  

 

 

 

비극은 비극이고 배고픈 건 현실이다. 단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해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하는 식사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둥그런 원탁에 2팀으로 나누어 식사하게 되어있는데 상호가 <단동조선대주점>이다. 콩나물에 김치는 한국식이고 찹쌀도넛과 계란, 마파두부, 야채범벅, 빨간 소스를 뒤집어 쓴 큰 생선요리는 중국식이다. 먹을 만하다. 

특히 고추, 돼지고기를 섞어 간장에 볶은 요리는 맵긴 해도 입에 아주 잘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간장으로만 요리한 거무튀튀한 잡채는 비위에 안 맞는다. 그래도 기대 이상의 맛있는 점심을 먹고 뿌듯해 하는데 일정이 촉박하다며 빨리 차에 오르라고 광나루님이 독촉한다.

 

 

<중국에서 처음 먹은 점심. 단동조선대주점>

 

 

2시 반쯤 오녀산성을 보기 위해 바로 환인으로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중국의 모습이 신기하다. 왼편으로는 붉은 기와집이 끝없이 이어진 옥수수밭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압록강과 그 너머로 나무 하나 없어서 거대한 방목장처럼 보이는 북한의 산들이 이어진다. 보기엔 초록색이라 예쁘지만 어찌 산에 나무 하나가 없을까? 우리의 궁금증을 눈치 챘는지 가이드가 북한의 산에 나무가 없는 것은 중국에 팔거나 땔감으로 쓰려고 베어냈기 때문이란다. 래서 사흘만 비가 오면 북한 여기저기서 홍수가 난단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 그랬겠지만 산의 나무를 씨 말린다는 건 바로 인간에게 재앙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어쩜 저리도 나무가 없을까? 김일성 별장의 나무조차 다 베어냈을 정도라니 할 말이 없다. 그 광경은 압록강이 버스길과 어긋나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단동에서 환인 가는 길, 중국의 시골마을>

 

 

다른 장면 하나, 잘 정비된 압록강 가에서 웃통을 벋거나 벌거벗은 중국인들이 6,70년대 한국의 시골에서처럼 즐거운 모습으로 헤엄을 치고 있다. 웃옷을 벋은 중국인은 여행 내내 볼 수 있었는데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국가에서 수치로 여겨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안돼서 할 수 없이 옷 벋는 공간을 마련해 줬다고 한다. 또한 중국인은 화장실 사용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노상방뇨를 많이 하는데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버젓이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지루한 버스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화장실 중에서 가장 저급이 바로 노상방뇨이고 그걸 공산주의 화장실이라고 부른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일행이 모두 웃는다. 그 위 단계는 칸막이만 있고 문이 없는 화장실이란다.

 

해가 기울 무렵 우리도 공산주의 윗 단계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단동에서 3시간이 지날 즈음, 산속의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잠깐 정차를 했다. 하지만 일행 누구도 문도 없고 부근을 진동하는 악취 때문에 그 화장실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화장실 뒤에서 볼일들을 보고 마지막에 나도 산으로 들어갔다.

 

냄새를 피하려 깊숙이 들어가는데 이게 웬 횡재인가? 사방에 희귀한 야생화라니...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는데 어두컴컴해서 피사체가 흐트러진다. ISO와 화이트밸런스를 이용해서 정신없이 찍는데 버스에서 늦는다고 아우성이다. 아깝다!

난생 처음으로 만난 흰진범(진교)을 찍는데 흥분되어 손이 다 떨렸다. 그 밖에도 노랑물봉선, 나비나물, 모시대, 등골나물, 산박하, 싱아, 쑥부쟁이, 영아자, 참취, 동자꽃, 물양지꽃 등을 건졌다. 하얀 취산차례 꽃은 천궁 같기도 하고 개구릿대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언제쯤이면 날 괴롭히는 흰 취산차례 꽃을 잘 구분할 수 있으려나? 30분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귀한 식물들 사진을 실컷 찍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시간을 지체한데 대한 따가운 눈길을 느끼며 탄 버스 안에서도 흥분과 아쉬움이 가셔지지 않는다. 

 

 

<환인에 도착하기 2시간 쯤 전 산골=공산주의 화장실 뒤의 모시대>

 

 

<공산주의 화장실 뒤의 흰진범(진교)>

 

 

<공산주의 화장실 뒤의 참취>

 


화장실에서부터 딱 한 시간을 더 간 시각, 광나루님이 오녀산성이 보인다고 하자 긴 버스길에 늘어졌던 사람들의 눈이 빛나며 일제히 시선이 창으로 쏠린다. 하얀 바위 성에 녹색의 머리를 살짝 얹은 듯 깎아지른 절벽의 오녀산성이 멀리, 그렇지만 또렷이 보인다. 사진에서 수없이 보았지만 저 정도의 험준한 요새였으니 누가 감히 함부로 함락시킬 수 있었을까?

 

<역사 스페셜>에서 고구려의 성에 대한 프로그램을 흥미 있게 봤는데 그 대표적인 성이 오녀산성이었다.  한 면만 트이고 나머지 삼면은 깎아지른 절벽인데다 트인 한쪽마저 가파른 바위틈으로 난 폭이 좁은 험준한 길이라고 했다. 과연 고구려를 성의 나라라고 부를 만 하다. 게다가 성에는 샘까지 있었다니 얼마나 완벽한가? 오녀산성에 꼭 올라야한다는 일행이 있었지만 일정 상 불가능하다는 광나루님의 말에 모두 아쉬움을 안고 조망만 한 체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 옛날 주몽이 부여군에게 쫓기며 건넜다는 비수도 지나고 다시 이어지는 버스길, 차창으로 지나가는 나무와 식물들에 눈길을 준다.

 

 

<환인의 오녀산성> 

 

 

 

단동에서 환인까지 다섯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가로수로 버드나무와 자작나무가 가장 많이 눈에 띄고 가죽나무 비슷하지만 빨간 꽃인지 열매를 단 나무와 이름 모를 잎 끝만 연두색인 예쁘장한 나무가 다음으로 많았다. 민가 근처에는 반드시 개오동나무를 심은 게 독특했다. 길을 따라 심은 샛노란 루드베키아는 내가 평생 보아도 단동에서 백두산까지 이어진 길에서 본 만큼은 못 볼 것 같다. 길가에 꽃은 많이 심었지만 어김없이 루드베키아였고 민가 근처에서만 사루비아를 약간 봤을 뿐이다.

 

오녀산성을 지나자마자 이어진 울퉁불퉁한 길은 태어나서 처음 당한 고행 길이었다. 길이 어찌나 험한지 버스는 평평한 바닥을 찾아 느릿하게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그 나마 버스 바닥이 길의 돌에 닿아서 코따커(허기사)는 중간에 버스를 세우고 몇 번이나 점검을 했다. 이동하는 중간에 도로공사는 부지기수이고 백두산을 향해 도로를 뚫느라 고가도로의 다리가 여기저기 올라가는 중이었다. 작년에 비해 포장도로가 많아져서 고생을 반도 안한 거라는 광나루님의 설명에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길에서 춤추는 버스 안에서도 볼거리는 많았다. 통화 쪽으로 다가가면서 두드러지게 한글간판이 많아졌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조선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란다.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에게 간판을 걸 때 반드시 고유문자와 간자를 병기하도록 한다는데 정말 좋은 제도이다. 그런데도 정치적인 독립을 원하는 민족에 대해서는 가혹하기 짝이 없다! 티벳이나 얼마 전에 소요가 인 소수민족에게 중국정부는 얼마나 가혹했는가? 그것을 가이드는 ‘자유는 주되 힘은 안 주는 중국정부의 방침’이라고 설명한다.

 

한글간판이 많이 보이는 곳에서 단층으로 된 자그마한 교회 두 채를 봤다. 대문 양쪽에 사랑 ‘愛’를 빨간 글로 쓰고 십자가가 지붕 중앙에 나지막하게 걸려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교회를 만난 게 신기하기 그지없다. 

이동 중에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 사이로 간간히 논이 보였는데 漢족은 옥수수나 밀을, 조선족은 벼를 심는다고 한다. 따라서 논이 보이는 곳은 틀림없이 우리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추운 소련 쪽에까지 강제이주를 당하면서도 정착하는 곳마다 논을 일군 우리 선조들의 부지런함과 억척스러움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밤 9시 30분경, 긴긴 8시간의 버스여행이 끝나고 통화시에 도착했다. 동북3성에서 장춘 다음으로 큰 도시답게 초입부터 화려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쫘악 뻗은 잘 정비된 도로하며 도로 복판을 가로지르는 혼강 위로 화려하게 치장한 리본모양의 등과 다리를 장식한 불빛이 흔들려 현란하기 그지없다. 그 사이를 지나 예약된 식당 앞에서 내리니 서툰 한국어로 “천원, 천원, 싸요.” 하며 과일장사들이 몰려든다. 고된 몸을 끌고 2층 식당으로 올라가자마자 들리는 고성방가에 일행의 눈살들이 찌푸려진다. 노래방에 잘못 왔나? 어라, 분명히 한국노래인데...

연변교포들인 듯한데 모처럼 모여서 회포를 푸는 모양이다. 보기에 좋지는 않았지만 TV에서 가끔 본 과거 소련에 거주하는 교포나 연변교포들의 생활상을 생각하고 그들만의 문화인가 싶어 애써 넘어간다. 하지만 밥을 먹는 내내 음식이 어디로 넘어가는지조차 헛갈릴 정도로 괴로웠다. 음식은 시래기국에 통감자튀김, 물김치, 고추, 돼지고기조림, 고기만두, 삼겹살, 두부조림, 야채에 고추장 등이 나왔는데 먹을 만했다.

 

시끄러운 노래 소리로 다소 불편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가이드를 앞세워 식당 앞에서 과일을 샀다. 한국 사과의 1/3정도 크기의 작고 흐릿한 색의 사과는 시지 않고 맛있었다. 유난히 검은 빛에 찌그러진 자두도 생김새와는 달리 맛있었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두꺼운 껍질 속에서 하얀 알맹이만 빼먹는 망고스틴은 특히 맛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어김없이 따라붙는 과일장사는 좀 귀찮기는 했지만 꾀죄죄한 모습으로 “천원, 싸요”를 외치며 조금이라도 팔아보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여하튼 중국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 덕분에 천원 한 장이면 어디에서나 싱싱하고 맛있는 과일을 배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저마다 비닐봉지 과일 보따리를 두어개씩 들고 버스로 잠깐 이동하니 우리가 묵을 만통호텔이 통화시 외곽에 있다. 그새 밤바람이 차가워서 일행들이 춥다며 옷을 여민다. 여행 가방을 버스에서 찾아들고 호텔로 들어가니 썰렁하다. 배정받은 방 열쇠를 들고 동생과 한조가 되고 딸아이는 바로 뒷방에서 낭만과 여유님과 한조가 되어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비교적 널찍하고 깨끗한 편이고 1인용 침대가 따로 떨어져서 두 개씩 놓여있다. 우리가 중국여행 내내 잔 방의 구조이다. 중국에서 처음 맞는 밤이지만 다들 긴 버스여행에 지쳐서인지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척이 없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동생이 가이드가 버스에서 말한 중국정통 안마를 받고 싶다고 한다. 딸까지 거든다. 발 마사지 정도면 좋겠다 싶은데 둘 다 전신 마사지를 받고 싶다나? 에라, 까짓것 1인당 3만원인데 좀 쓰지 뭐.

마사지를 받으려면 12시까지 로비로 내려오라 했는데 20여분이나 지나서인지 졸리는 눈을 한 여직원 한명 밖에 없다. 그냥 올라오려는데 들어오던 남자가 한국어로 가이드가 누구냐, 마사지 받을 거냐고 묻는다. 그렇다니까 중국어로 우리 가이드에게 연락하고 좀 있다 피로로 눈에 핏발이 선 가이드가 나타난다. 졸릴 텐데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괜찮다며 호텔 밖으로 나간다. 허걱, 호텔 안에서 받는 게 아니었어? 동생은 편안한 치마 차림이고 나와 딸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는데... 그래도 괜찮다며 택시를 잡으니 할 수 없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도로는 무서운 느낌이 든다. 통화시를 진입할 때 본 화려한 등불 다리를 건너고도 한참을 더 가 안마하는 곳에서 내렸다. 침대가 3개 놓인 1층으로 따라가니 검은 티셔츠로 통일한 젊은 남자 셋이 들어온다. 대략 난감! 치마차림의 동생은 “우와, 깬다. 미치겠다!”를 연발한다. 어쩌랴,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안마사가 손으로 지시하는 대로 침대에 누우니 한명씩 다가와 안마를 시작하는데 내 담당은 가장 나이가 많고 두 명에게 무언가를 수시로 지시한다.

 

눕자마자 내 담당 안마사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마야가 불렀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틀어 내 귀에 대준다. 마야가 부른 건 아니지만 긴장을 풀 겸 따라 불렀더니 무척이나 좋아한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노래라는 것 같다. 30분 정도 마사지를 하는데 중간에 “아퍼? 간지러워? 세게? 약하게?”를 수시로 묻는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을 상대했기에...

마사지 수준은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고 괜찮다. 다리를 마사지하는 순서에서 치마를 입은 동생이 기가 막혀하며 “깬다”를 연발해서 영어로 스커트를 입어서 그런다고 하니 자기들도 낄낄거린다.

 

마사지가 끝나가자 팁 문제가 고민이 된다. 광나루님은 팁은 1달러 쯤이면 되는데 지금은 달러가 비싸니까 한국 돈 천원 정도면 부담도 없고 다 통하는 액수라고 했다. 하지만 좀 적지 싶다. 3천원을 내미니 제스처로 3명 몫이냐며 실망한 빛이 역력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3천원을 더 얹어주니 비로소 자리를 뜬다. 상대방의 마음을 못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열심히 마사지를 한 그들에게 제대로 보답을 못한 것 같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동안 새우잠을 잔 듯한 가이드가 나타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